[기자수첩] 콕 집으면 가격 내려가는 '자유 경제?'…인위적 개입 멈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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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콕 집으면 가격 내려가는 '자유 경제?'…인위적 개입 멈춰야
  • 김솔아 기자
  • 승인 2023.06.29 11:4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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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솔아 유통부 기자

[오피니언뉴스=김솔아 기자] 라면업계에서 시작한 가격 인하 움직임이 제과, 제빵 등 식품업계 전반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라면 가격 인하를 요구한 지 불과 열흘 만이다. 지속된 고물가로 지쳐있던 소비자에게 가격 인하 소식은 분명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정부 압박으로 식품업계가 '백기를 들었다', '꼬리를 내렸다'는 표현이 쏟아지는 지금, 시장의 자유를 끊임없이 강조해왔던 현 정부의 경제 정책 기조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가격 인하 행렬은 지난 18일 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한 추 부총리의 발언으로 시작됐다. 추 부총리는 "현재 국제 밀 가격이 전년 대비 50% 가량 내려갔다"며 "기업들이 밀 가격 하락에 맞춰 적정하게 라면 판매가를 내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어 "라면과 같은 품목은 시장에서 업체와 소비자가 가격을 결정해 나가야 한다"며 "정부가 개입해서 가격을 통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소비자단체에서 적극 나서 견제하고 압력을 행사했으면 좋겠다"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선 듯한 말을 덧붙였다. 

그럼에도 국가 경제 수장인 추 부총리 발언의 영햑력은 컸다. 라면값을 콕 집어 언급한 만큼 온 국민과 언론이 라면업계의 행보에 주목했다. 업계는 당시 "밀 가격이 내려도 원가에 반영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며 "가격 책정 구조가 복잡해 재료값 하나가 떨어졌다고 바로 가격을 내리기는 어렵다"고 답했다. 그러자 지난 26일 농림축산식품부는 다시 제분업체들을 '콕 집어' 불러모아 밀가루 가격 안정을 위한 협조를 요청했다.  

효과는 바로 다음날인 27일부터 나타났다. 농심이 오는 7월부터 제분회사로부터 가격이 5% 인하된 소맥분을 공급받아 신라면과 새우깡의 출고 가격을 각각 4.5%, 6.9% 인하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삼양식품과 오뚜기, 팔도가 줄줄이 라면값을 내렸다. 이들 업체가 가격을 인하하는 것은 13년 만이다. 밀가루를 주 원료로 사용하는 제과, 제빵업체의 '눈치 게임'도 시작됐다. 지금까지 롯데웰푸드, 해태제과, 팔도, SPC가 가격 인하를 결정했다. 이 모든 것들이 추 부총리의 말 한마디에 10일 만에 이뤄진 셈이다. 

서울 한 대형마트에 진열된 라면. 사진=연합뉴스

업계에 따르면 라면 한 봉지의 원가에서 밀가루가 차지하는 비중은 30% 수준이다. 팜유나 스프 등의 가격은 아직 안정되지 않았고, 지속해서 오르는 물류비, 인건비 등 생산비용도 가격 결정에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요소다. 한 업계 관계자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제품 가격 인하를 결정하긴 했지만 이로 인해 어느 정도의 손실은 감수할 수 밖에 없다"고 밝혔다. 이윤을 추구해야 할 기업들이 손실을 감수하고 가격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수요와 공급에 따라 가격을 결정하는 자유시장경제와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 시장의 왜곡과 혼란에 가깝다.  

지난 2월에도 추 부총리는 소주업체들이 가격 인상 움직임을 보이자 업계에 인상을 자제해달라는 목소리를 냈다. 추 부총리의 발언 후 국세청의 주류업계의 가격 인상 움직임과 관련해 실태조사에 나서기도 했다. 결국 하이트진로, 오비맥주 등 주류 업체들은 "당분간 가격 인상을 하지 않겠다"는 입장문을 냈다. 자유시장 논리를 누구보다 강조했던 윤석열 정부인 만큼, 이같은 지속된 반(反)시장적 개입은 정책 기조의 일관성을 더욱 의심하게 만든다.

더욱 중요한 건 급급하게 이뤄지는 '가격 끌어내리기'가 국민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다. 기업은 언젠가는 인하로 인한 손실을 보전하려 들 것이다. 추후 가격을 더 인상할 수도 있고,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 인력을 줄일 수도 있다. 제품 용량을 줄이는 '슈링크 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인하 압박으로 억눌렸던 가격이 더 치솟는 부작용이 발생할 여지가 크다. 

전례도 있다. 2008년 이명박 정부는 52개 생필품을 선정, 이른바 'MB물가지수' 품목을 만들어 물가 집중 관리에 나섰다. 이후 3년 간 일반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0.7%를 기록한 반면 MB물가지수 품목의 평균 물가 상승률은 19.1%로 나타났다. 정부의 인위적 개입이 낳은 부작용이다.  

물가 안정은 당연히 중요하다. 그러나 특정 업계를 향한 정부의 압박과 감시, 눈치 주기 등 강압적이고 1차원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어서는 안된다. 정부의 칼날은 시장 질서를 교란시키는 불공정 행위, 불합리한 유통구조 등에 향해야 한다. 

라면값만 콕 집을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서민 경제도 들여다봐야 할 것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전기·가스·수도 요금은 지난해 같은 달보다 23.2% 상승했다. 1년새 전기요금은 25.7%, 도시가스요금은 25.9%, 지역난방비는 30.9%로 모두 올랐다. 50원~100원 저렴해진 라면과 빵 가격만으로 서민 경제의 시름을 덜었다고 자부하기엔 섣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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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값 2023-06-29 12:58:51
"현재 국제 밀 가격이 전년 대비 50% 가량 내려갔다"며 "기업들이 밀 가격 하락에 맞춰 적정하게 라면 판매가를 내렸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