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발견] 1.1. 번역어 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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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발견] 1.1. 번역어 개선
  • 주우(宙宇)
  • 승인 2018.02.25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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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라면 ‘mano’와 ‘citta’의 번역 문제는 익히 알고 있고 인지하고 있을 내용으로 여긴다. 경전을 지도로 비유한다면 경전의 단어는 지도의 특정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이 될 것이다. 그런데 지명이 현실과 들어맞지 않는다면 하루빨리 고쳐야 한다. 아니면 사용하면 할수록 혼선을 줄 뿐이다. 내용은 둘째치고 중요한 개념들조차 오류투성이다. 이런 엉터리 지도가 제공되는 상황에서 길을 제대로 찾기란 어렵다. 특히나 ‘citta’에 대한 번역어가 중요한 것은 이것을 마음으로 번역하면 염처수행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전에서는 마음을 ‘생각 ‧ 감정 ‧ 기억 따위가 생기거나 깃드는 공간이나 자리’라고, 생각을 ‘헤아리고 판단하고 인식하는 것 따위의 정신작용’이라고 정의한다. 필자는 이번에 처음으로 ‘생각’이란 말이 한자가 아니라 우리 고유의 것임을 알았다. 고정관념이 작동되고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부끄럽고 한심했다.

우리말 ‘마음’이 팔리어로 ‘mano 마노’ 영어로 ‘mind 마인드’ 그리스어로 ‘μυαλό 미얄로’ 라틴어로 ‘mens 멘스’이다. 그냥 살펴봐도 발음이 아주 비슷하다. 그리고 ‘생각’도 ‘citta’ ‘thought’ ‘σκέψη’ ‘cogitatio’로 발음이 거의 비슷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같은 말에 같은 개념이다.

이런데도 우리는 중국의 영향으로 ‘mano’를 의意로 ‘citta’를 마음으로 번역해왔다. 위에서처럼 ‘mano’와 ‘마음’은 실제로 같은 말이다. 경에 의하면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작용하는 기능indriya인 ‘mano’는 바로 인간의 ‘마음의 눈’에 해당하는 미간眉間의 인당印堂혈, 즉 ‘제3의 눈’이다. 뇌과학에서는 전전두피질prefrontal cortex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 ‘mano’를 중국식으로 의意라고 쓸 이유가 전혀 없다고 본다.

‘생각하다’라는 말은 쓰나 ‘마음하다’라고 하지 않는다. 마음은 ‘눈’ ‘귀’처럼 감각하는 기관根indriya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하다’ ‘귀하다’로 쓰지 않고 ‘눈에서’ ‘눈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눈에 보인다’ ‘마음에서 생각한다’고 한다. ‘mano’는 마음하지 못하고 단지 ‘mano’에서 대상에 대해서 마음을 일으켜 정할(작심manasikara乍心) 뿐이다.

‘학교(마음)에서 공부(생각)하다’에서 공부(생각)는 학교(마음)가 아니라 어디서든 할 수 있으나 학교(마음)는 움직일 수 없다. 염처수행에서 ‘citta’를 까야kāya身 바로 앞자리에 둬야 하는데, ‘citta’가 마음이라면 눈(眼)처럼 옮길 수 없기 때문이다.

 

‘mano’ ⇒ 마음, 심心

‘citta’ ⇒ 생각, 사思

 

실제로 이 ‘citta’를 마음에서 생각이나 사유로 대체하면 오히려 뜻이 명확해진다. 우리말(훈민정음으로서 한글은 세종이 만들었으나 우리말은 그 이전에도 있었음)을 포함해서 이 모두가 유라시아어에서 파생되었다는 일부 사람들의 주장이 사실로 여겨진다.

 

# ‘saṅkhārā’ 행行 ⇒ 위爲 구성-지어냄-조작

 

일찍이 ‘sabbe saṅkhārā aniccā’란 말을 접했다. 소위 ‘제행무상諸行無常’인데, 다만 ‘모든 것은 무상하다’는 뜻으로 들었다.

그런데 ‘行’이 무엇인지 알아보니 오온의 行이라고도 다른 行이라고도 하고 의견이 분분했으나 행위의 行은 확실히 아니었다. 行의 의미가 진실로 무엇인지 더 궁금해졌다. 그래서 오온에 대해서 이리저리 알아보았는데 원문이 ‘saṅkhārā’임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원문이 있으나 해석이 일치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중국을 통해서 들어온 ‘行’이라는 번역어 때문임을 뒤늦게 알았다.

‘saṅkhārā’는 saṁ(함께)+√kṛ(행하다)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 ‘√kṛ(행하다)’ 때문에 아마 중국에서 ‘行’이라 번역했으리라 생각한다. 경(S22:79)에 ‘지어낸 것을 거듭 (의도적으로) 지어낸다고(saṅkhatam-abhi-saṅkharonti) 해서 saṅkhārā라고 한다’고 정의한다.

그런데 ‘行’은 ‘형성’ ‘심리현상’이라는 기존 번역에도 적합하지 않은 한자다. 긍정의 ‘형성’과 부정의 ‘지어냄’이라는 ‘saṅkhata’의 양면적 뜻을 살려서 한자에서도 양면적 의미(‘하다’ ‘지어내다’)가 있는 ‘爲’로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기존에도 ‘saṅkhata’는 有爲로 ‘asaṅkhata’는 無爲로 번역해왔다. 만일 뜻이 이렇게 명확한 ‘saṅkhārā’를 고의로 ‘行’이라 번역했다면 이것이 바로 위saṅkhārā爲의 대표적 사례가 될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런 점이 붓다의 뜻이 왜곡되어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 근본 원인이다. 처음에는 적응이 어려울지라도 붓다의 근본 뜻을 이어받으려면 ‘行’을 ‘爲’로 과감히 바꿔야 한다. 지금도 사대事大하는 이라면 몰라도 과거의 번역을 따를 필요가 있을까?

만일 한국 불교계가 지어냄saṅkhārā의 한자를 ‘행行’에서 ‘위爲’로 바꾸지 않는다면, 엉터리 지명으로 된 보물지도에 혼란을 겪듯이 아마 이 땅의 대다수 불자佛子도 환상을 벗어나기가 어려울뿐더러 전 세계로 퍼지고 있는 보물 같은 붓다의 가르침에서도 뒤처진 상태로 고착될 것이다. 이것은 역사 왜곡처럼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불교 왜곡이다. 이렇게 왜곡하는 이들은 사실상 남들로 하여금 붓다의 뜻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위saṅkhārā爲는 ‘죽간 노자老子’에서도 거의 같은 의미로 쓴다.(『노자의 발견』 35쪽 참고) 거기서 ‘위爲’란 ‘욕欲’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처신하는 태도이자 방법이라 한다. 동물들이 생존을 위해 상대방이 자신을 못 알아보게 하는 위장僞裝부터 인간이 자기 의도를 달성하려는 위선僞善, 욕망을 채우려고 거짓말하는 위조僞造까지 다양하다.

 

긍정적: 형성하다. 창조하다. 만들어내다. 구성하다. 실행하다. 하다.

부정적: 지어내다. 조작하다. 속이다. 꾸며내다. 위장하다. 조종하다.

 

# 집기集起 환멸還滅

 

실험에 의하면 세 명이 모여야 타인의 이목을 끌 수 있다고 한다. 이를테면 길거리에서 특별한 현상이 없는 곳일지라도 한 명이나 두 명이 쳐다보면 효과가 없으나 세 명이 바라보면 많은 이들이 따라서 행동한다고 한다. 이는 핵분열 물질이 연쇄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최소 질량이라는 임계량처럼, 물이 일정 온도가 되어야 요동이 시작되고 그다음에 끓기 시작하는 것처럼, 비행기가 이륙하려면 가속도를 높여서 일정 수준 양력을 확보해야 하듯이, 일정 수준이 될 때까지 축적했던 에너지가 그때야 외부로 드러나기 시작한다거나 아니면 적어도 일정 수준이 되어야 상승작용을 일으키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런 시작하는 과정과 똑같은 현상이 끝나는 과정에도 벌어진다. 이를테면 촛불이 마지막 끝날 때 더 밝아지듯이 사람도 마지막 죽기 전에 오히려 병이 호전된 듯한 현상이 벌어진다. 요지는 특정 현상을 일으키거나 없애려는 효과가 가시적으로 드러나려면 상당 수준의 노력이 들어야 하고, 이 현상들을 사실 그대로 알아보려면 상당 수준의 안목을 갖추지 않고는 어렵다는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현상만으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판단하기 어렵다.

이를 반영하는 불교용어 중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 있다. 집기samudaya集起, 이와는 반대 현상인 환멸nirodha還滅, 같은 요소나 기능들을 지닌 것이 쌓인 온kandha蘊, 오온五蘊의 복합체인 까야kāya身 등이 있다.

발생하고 쌓아올려 누적된다는 ‘samudaya’를 단순히 ‘일어남’이 아닌 ‘집기集起’라고 하는 이유는, 볼타 전지가 묽은 황산 속에 구리와 아연이 집적되어 전기를 발생시키듯이 일정 수준의 에너지가 ‘集’(모일 sam) 때에야 ‘起’(일어남 udaya)가 가시적 현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집기集起’라는 표현에는 항상 다양한 조건이 충족되어서 일어난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도움된다.

마찬가지로 사라지고 소멸한다는 ‘nirodha’도 만사만물萬事萬物이 펼쳐진 의도를 달성해야만 원래의 역할로 돌아오고(還) 그래야 사라지게(滅) 되므로 환멸還滅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환멸nirodha還滅에는 궁극(ultimate)의 진실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즉 특정 현상이 벌어진 궁극의 목적을 달성해야 비로소 맡은 역할을 마치고 본처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환지본처還至本處다. ‘nirodha’는 궁극의 진리인 열반이 아니라 열반에 필요한 전제다. 고환멸dukkha-nirodha苦還滅이란 것은 고苦가 인간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본래의 역할로 귀환함으로써 고苦를 초래하던 상황이 해소된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심청이가 아빠를 위해서 남긴 재산을 뺑덕어미가 탕진하고 나중에 한양가는 노잣돈마저 빼돌림으로써 심봉사를 고생시킨다. 이는 업業이 없어지지 않으면 눈을 뜨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고생하는 심봉사의 상황은, 뺑덕어미가 심봉사의 업業이 소멸하도록 맡은 역할을 다할 때에야 비로소 환멸한다고 볼 수 있다.

업業이 ‘환멸’nirodha還滅하기 전에는, 뺑덕어미가 역할을 달성하고 심봉사가 상황을 ‘졸업’nibbidā卒業하기 전에는, 그래서 죽도록 고생하는 상황에 대한 의미가 바뀌기(atthaṅgama意易) 전에는, 결국 상황을 극복pahāna克復하기 전에는 어찌해서든(누군가 대역해서든) 지속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환멸처럼 ‘nibbidā’도 졸업이라고 하고, ‘atthaṅgama’도 ‘attha’(의미)+‘gama’(가다)이므로 ‘의미가 전환된다’로 보아서 ‘의역意易’이라고 하며, ‘pahāna’도 ‘극복’이라고 하겠다.

번역과정을 통해 훈련된(?) 필자는 ‘see’ ‘look’ ‘view’ ‘watch’ ‘observe’를 맥락에 따라서 다르게 번역하듯이 ‘vinodana’ ‘pahāna’ ‘viraja’ ‘atthaṅgama’ ‘nibbidā’ ‘khīṇa’ ‘khaya’ ‘vaya’ ‘nassana’ ‘bhanga’ 등 소멸에 관련한 단어들을 유사한 의미일지 몰라도 다른 의미로 사용했다고 본다. 아니면 같은 단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실제로도 현실에서 괴로움은 소멸시킨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으며, 오히려 더 강화되거나 (줄어드는 척하다가 다르게 변신해서) 지속한다. 붓다도 괴로움은 조건으로 집기samudaya集起한다고 했으므로 그 조건을 극복pahāna克復해야 환멸nirodha還滅한다. 원인이 아니라 결과인 고통은 없앤다고 해서 뿌리 뽑히지 않는다. 단지 연기緣起에 기반을 둔 담마를 통해 바르게 마음을 정함으로써 환멸할 뿐이다.

그리고 상처가 딱지 지면서 아물어갈 때 갑자기 더 가려워지는 소위 호전好轉반응이 벌어진 후에야 완전히 낫듯이 마음의 상처도 더 어려운듯한 상황이 벌어진 후에야 완전히 치유되며, 고통도 과거와 유사한 상황이 벌어져서 (생각하기도 싫은) 그 당시의 감정을 직면한 연후에 극복된다. 그래서 고통을 없애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최고 벗으로 만드는 셈이므로 끈기있는 노력이 필요하다.

경(S12:31)에 “학인sekha學人은 그 자양āhāra食의 환멸에서 ‘존재하는 것은 환멸하는 현상이다’고 있는 그대로 바른 반야로 봄으로써 환멸할 현상을 졸업하며 탈피하고 환멸하도록 실천합니다.”고 한다.

경(S12:65)에 “‘집기하고 집기한다’는, ‘환멸하고 환멸한다’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현상에 대한 안cakkhu眼 ‧ 지ñāṇa知 ‧ 혜paññā慧 ‧ 명vijjā明 ‧ 광āloka光이 나에게 펼쳐졌다.”고 한다.

경(14:36)에서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요소에서 괴로움이 펼쳐지고uppāda 환멸還滅하며nirodha, 질병이 지속하고ṭhiti 멈추며vūpasama, 노사老死가 드러나고abhinibbatti 의미가 바뀐다atthaṅgama.’고, 경(S15:20)에 “형성된 것들은 참으로 무상하므로 펼쳐지고 감춰지는 현상이다. 펼쳐짐과 환멸하는 것에 편해져야 즐거워진다.”고 한다.

 

경(Snp3.12)에 “거룩하고 해탈로 이끌어주며 바른 깨달음으로 향하는 선법善法을 듣는 것은 ‘두 겹의 특성’을 지닌 법들(dvayatānaṃ dhammānaṃ)을 있는 그대로 알기 위해서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두 겹’이란 상대적인 의미의 단어들도 있으나 한 단어가 이중二重적인 의미로 사용된 경우가 허다하다. 이는 특정 단어가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는지를 방일하지 말고 항상 깨어서 살피라는 심오한 뜻이 있다고 본다.

 

# 번역어

 

āyatana 처處 ⇒ 장場(6근을 수호하지 않은 상태에서 대상과 만나는 곳인 āyatana는 닫힌 처處가 아닌 열린 장場이다. 수호된 상태는 처處로 한다.)

manasikāra 마음을 일으켜 정하다. 작심乍心, vitakka 탐색尋, vicāra 검토伺

micchā 사邪(사악하다는 판단이 될 수 있으므로) ⇒ 오誤(개선 가능한 오류라는 의미)

sukha dukkha adukkhamasukha 락樂 고苦 비고비락非苦非樂 ⇒ 좋거나 싫거나 무시하는, 즐거워하든 괴로워하든 외면하든지

ariyasāvaka 성스러운 제자 ⇒ 불자(붓다를 따르는 분들의 모범이 되리라는 희망으로)

virāga 탈피 벗겨짐, rāga 집착 탐착貪着, kāma 욕락慾樂, uppajjati 펼쳐지다

kamma 생각 말 행동을 포괄하는 ‘활동’으로 한다. avakkanti 전개되다

chanda 욕망 소망, upekkha 평정 냉담, paṭigha 유대有對 저촉 ⇒ 부정否定

somanassa 만족(기쁨) 쾌락, domanassa 불만(한탄) 원망(불쾌)

sanjanati 착오(오판)하다. pajānāti 분명히 알다. parijānāti pariñña 완전히 알다.

abhijānāti 직관적으로 알다. abhiññā 직관지直觀知 적중지的中知

āsava 고루痼漏, khīṇa 종결된, khaya 쇠멸, pahāna pajahati 극복 포기

ekagga 대상 하나에만 집중, ekodi 상相 하나에 몰입, nirāmiso 탈속하다

nidāna 인연因緣, paccayo 조건條件, khema 평심平心, moha 어리석음⇒ 외면痴

‘의식意識’consciousness과 ‘식識’viññāṇa은 되도록 구분한다. sāmisa 인간적 세속적

 

# 인용 자료

 

A: 앙굿따라니까야 Aṅguttara Nikāya

D: 디가니까야 Dīgha Nikāya

M: 맛지마니까야 Majjhima Nikāya

S: 쌍윳따니까야 Saṁyutta Nikāya

Snp: 숫타니파타 Sutta-nipāta

Dhp: 법구경-담마파다 Dhammapāda

 

# 인용이나 참고한 서적

 

빠알리성전협회 전재성의 『디가니까야』 『맛지마니까야』 『쌍윳따니까야』 『앙굿따라니까야』 『숫타니파타』 『법구경-담마파다』

초기불전연구원 대림스님의 『맛지마니까야』 각묵 스님의 『디가니까야』 『쌍윳따니까야』 『앙굿따라니까야』

스캇 펙의 『거짓의 사람들』 『아직도 가야 할 길』, 켄 케이즈의 『의식상승의 길』

랄프 루드비히의 『정언명령』 『순수이성비판』, 빅토르 프랑클의 『삶의 의미를 찾아서』

데비 포드의 『착하다는 사람이 왜 나쁜 짓 할까?』 『그림자 그리고』

닐 도널드 월시의 『신과 나눈 이야기 『내일의 신』 『신이 거들 때 기적이 일어난다』

에리히 프롬의 『인간의 자유』, 김형효의 『원효에서 다산까지』

이중표의 『아함의 중도체계 『불교의 이해와 실천, 스티브 로더의 『영혼수업』

요한슨의 『초기불교의 역동적 심리학』, 임승택의 『초기불교-94가지 주제로 풀다』

아날요의 『Satipatthana 깨달음에 이르는 알아차림 명상 수행』

조애너 메이시의 『불교와 일반시스템 이론』

 

# 인용이나 참고한 논문

 

김석수의 논문 「칸트의 ‘사이성’의 철학과 주체」 「칸트의 도덕법칙 자유 그리고 최고선」

김범진의 「사마타와 위파사나의 중도적 관계」, 전미옥의 「초기불교의 지각이론 연구」

전재성의 「초기불교의 연기성 연구」, 조준호의「초기불교에 있어서 지관止觀의 문제」

임승택의 「사띠(sati)의 의미와 쓰임에 관한 고찰」 「사띠(sati)의 위상과 용례에 대한 재검토」 「초기불교의 경전에 나타난 사마타와 위빠사나」

정준영의 「대념처경에서 보이는 수념처의 실천과 이해」 「두 가지 해탈의 의미에 대한 고찰」 「사마타止와 위빠사나觀의 의미와 쓰임에 대한 일고찰」

김재성의 「위빠사나의 이론」, 서현희의 「족쇄와 성인의 관계 연구」

한성자의 「사마타와 위빳사나의 불가분성不可分性에 대한 고찰」

최지연의 「무색정 개념 도입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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