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앞서 조선, 인삼전쟁서 만주에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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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앞서 조선, 인삼전쟁서 만주에 졌다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9.17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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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무역 제한-상인 억압 vs 건주여진, 군자금 마련 위해 상업 장려

 

인삼은 동양권에서 거의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져 있다. 독성이 거의 없다. 예로부터 심장 등 오장(五臟)을 보호하고 정신을 안정시키며, 눈을 밝게 하고, 또 장기 복용하면 몸이 가벼워지고 오래 살 수 있다고 알려져 왔다. 현대에 의학적 조사를 해보니, 실제로 인삼의 신진대사 촉진, 진정 작용, 혈당강하, 혈압강하, 면역력 향상, 암세포 억제, 피로 회복, 노화 방지 등 다양한 효능이 입증되고 있다.

인삼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중국에서 기원전 1세기부터 등장하고, 우리나라에서 인삼이 많이 생산된다는 사실이 5~6세기 중국 기록에 실려 있다. 신라와 백제, 고구려가 모두 중국에 인삼을 수출하거나 조공품으로 사용했다. 고려시대엔 인삼을 장기보관하는 방법으로 쩌서 홍삼을 제조하는 기술이 개발됐다.

인삼은 동양의학의 핵심 약재였고, 건강식품이었다. 그 인삼의 주 생산지는 한반도와 만주였다. 따라서 만주와 한반도 사이에는 인삼을 둘러싸고 잦은 분쟁이 빚어졌고, 인삼 교역을 둘러싸고 심각한 경제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인삼이 사람의 손에 의해 본격적으로 재배된 것은 조선후기였다. 조선 초기에 인삼재배법이 시작되었다고는 하나, 본격적으로 재배된 것은 1724년 개경 사람 박유철에 의해서였다고 한다. 그 이전에는 요즘 말하는 산삼, 즉 야생에서 채최하는 인삼이 전부였다. 따라서 늘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

 

▲ 한약재로 쓰이는 인삼 /KGC인삼공사 홈페이지

 

조선전기, 주요 조공무역품

 

조선시대엔 명(明)나라가 인삼을 조공품으로 바치라고 요구했다. 조선초기 조공품 가운데 으뜸은 인삼이었다. 사무역이 철저히 통제된 가운데 정부에 의해 관리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태종 5년(1405) 9월에 예문관 제학 김한로가 거상 백구(白龜)와 같이 조공사절단으로 중국에 가서 인삼을 사무역했다고 해서 파직된 일이 있었다. 또 태종 17년(1417)에는 연경에 가는 사절 일행이 갖고 가는 인삼의 양을 처음 제한했다.

조선시대에 인삼은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주요 교역상품이었다. 사절이 연경에 갈 경우 공적으로 인정받는 물품의 종류와 수량은 정해져 있었으며 그때 조공품으로서는 주로 인삼을 비롯해서 저마포(苧麻布), 표피(豹皮) 등이 있었으며 또 돌아올 때는 단견(緞絹)등을 갖고 왔다.

대체로 조선의 대외무역은 주로 명나라에 가는 사절 또는 역관 등을 통하거나 사무역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인삼에 대해서만은 사무역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이를 어긴 경우 문책을 받은 경우가 적지 않았다. 조선 초기부터 인삼은 물론 금, 은 등이 허가없이 국외로 유출되는 것을 금했다. 세종 5년(1423) 10월 연경에 갔던 공조참의 이양이 인삼 12근을 가지고 갔다 해서 사헌부가 탄핵한 적도 있었다.

단종 원년(1453)에 압록강변에 있는 여연(閭延), 무창(戊昌), 우예(虞芮)의 3개 군(郡)을 폐한데 이어 세조 원년(1445)에 다시 자성군(慈城郡)을 폐했다. 이를 합쳐 폐사군(廢四郡)이라 한다. 이는 이 4개 군에서 인삼이 많이 채취됐고, 그 대안이 여진(女眞) 땅이었기에 늘 여진의 침입이 자주 있기 때문이었다.

세조 9년(1463)에 명나라 군민이 여진 땅에 들어와 인삼을 채취하다 쫓겨 이 땅에 들어왔다가 명에 송환시켜 준 적도 있었다. 인삼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명나라 사람과 여진족들이 인삼을 채취하기 위해 국경을 넘어 들어온 경우가 잦아진 것이다.

예종 원년(1469)에 일본(왜) 상인이 인삼 50근을 몰래 사가는 것이 발각되어 삼포(부산 제포 감포)의 사무역을 엄금하기도 했다. 140여년 후에 다시 왜와 통교를 했지만, 인삼의 사무역만은 허용하지 않았다.

 

▲ /KGC인삼공사 홈페이지

 

인삼교역에서 뒤바뀐 조선과 여진

 

16세기 후반 들어가면서 동양의 인삼시장은 급변했다. 명나라가 조세제도를 개혁해 쌀과 보리로 받던 토지세를 은(銀으)로 일원화하는 일조편법(一條鞭法)을 시행했기 때문이다. 스페인이 남미광산에서 채굴한 은과 일본의 은을 중국이 빨아들이면서 상거래가 활성화됐다.

이때 만주와 조선의 주교역품인 인삼을 놓고 서로 다른 길을 간다. 조선은 사무역을 통제하고 조공무역에 의존한 한편, 여진족들은 부족장이 개입한 상거래를 통해 명나라와의 교역을 활성화했다. 물산은 조선이 풍부했지만, 상행위에선 여진족에 밀렸다. 조선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여진족은 이제 막 세력을 키워가는 건주여진의 누르하치였다.

 

당시 동양의 중심은 명나라였다. 명나라에서 은본위제도가 정착하고 상거래를 활성화하면서 인삼의 수요가 급증했다. 돈을 많이 벌면 건강을 생각하는 게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돈이 많아진 명나라 부유층들이 당대 최고 건강식품인 인삼을 찾게 되고 인삼의 공급부족 현상이 발생했다.

조선에서도 조정의 엄격한 감시에도 불구하고 명나라와 사무역을 하는 것을 통제하지 못했다.

인삼의 값이 올라가면서 조선과 만주의 심마니들은 국경을 넘나들며 삼을 캤고, 인삼 채집을 둘러싸고 국경분쟁이 잦아졌다.

선조 33년(1598) 7월 호인(胡人, 여진인) 10여명이 압록강을 건너와 마전암(痲田岩)부근에서 몰래 채삼을 했다. 선조 33년(1600)에는 40~50여 명의 명나라 사람들이 삭주지방에 와서 인삼을 채취해 갔다.

산에서 자라는 인삼이 고갈될 우려에 처하자 선조 39년(1606) 6월에는 평안도 삼산지에 가는 상인은 증명서 없이는 인삼의 거래를 못하도록 했다. 아울러 사무역을 통제하기 위해 해로는 물론 육로의 요소마다 이를 감시케 했다. 특히 중국, 여진과의 접경지역에는 관원을 배치해 검색을 강화했다.

 

하지만 명나라 말기인 16~17세기 동아시아 인삼 경쟁의 최종 승자는 만주의 여진족이었다.

만주 인삼이 명나라 수요량을 대고도 남아 조선에 수출했다. 그 이유는 뭘까. 당시 인삼은 재배를 하지 않고, 산에서 채취에 의존하던 시절에 여진 인삼이 조선에 비해 생산력이 높다거나 질적으로 우수했을리 없다.

그것은 사회제도 때문이였다.

조선은 성리학 국가였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원리가 지켜지는 나라에서 상업은 가장 천한 지위에 있었다. 상인들은 감시의 대상이었고, 인삼 거래는 조공품 이외에 금지됐다. 정부가 요구하는 공물만 인삼으로 내면 되지 더 이상 명나라에 팔아서 돈을 만들 이유가 없었다. 경제적 동인(動因)이 없었기 때문에 인삼의 국제가격이 고공행진을 해도 더 이상 생산하지 않았다. 공자·맹자의 법도에는 쉽게 돈을 버는 상행위는 일종의 병리현상으로 보였다.

여진에는 상황이 달랐다. 여진족에게 성리학은 지배적 가치관이 아니었다. 만주는 춥고 농업생산량이 적었기 때문에 교역을 통해 농산물과 교역하기 위해서도 인삼을 많이 채취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어 평안도에서 삼을 캤던 것이다.

당시 삼과 은은 동일한 무게로 교환되었다. 인삼만 가져가면 명나라 상인들이 쾌히 은으로 바꿔주었다. 경쟁국인 조선이 사무역을 금지한 것이 여진에겐 오히려 어부지리격이었다.

특히 압록강 건너 건주여진의 누르하치는 할아버지, 아버지가 명나라 군대에 살해된데 대한 복수전을 펼치기 위해 군자금이 필요했다. 그들은 국가 존망을 걸고 인삼 채집에 나섰고, 인삼 종주국 조선을 누르고 인삼전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그 결과, 16~17세기에 만주의 인삼이 원조국인 조선에 유입되기도 했다. 여진족들이 중국에 팔고 남은 것으로 조선의 부족분을 채워준 것이다.

중종 33년(1538)에 만주 인삼이 들어왔는데 그 수량은 연간 800근으로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인조 6년(1608)에는 후금(나중에 청나라)에서 인삼 180근을 가지고 들어와 무역을 청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압록강 하구 가도를 점령하고 있던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후금의 채삼선 4척을 맞아 살해하는 참극도 발생했다.

 

이 인삼시장 역전이 역전이 조선이 정체한 가운데 후금의 국력을 강화하는 배경이 되었다. 누르하치는 인삼과 모피, 진주 등을 팔아서 군비 확장에 나섰다. 몽골에 의해 나라(金)를 빼앗긴 여진족은 누르하치라는 걸출한 인물을 통해 400년만에 통일을 이룬 것은 인삼 전쟁에서 승리한 자금을 밑바탕으로 했다. 그 뒤에 벌어진 상황은 정묘호란, 병자호란이었다. 여진족은 마침내 청나라를 건국해 중국대륙의 주인이 되었다.

 

▲ 인삼재배 밭 /KGC인삼공사 홈페이지

 

17세기 이후 조선이 다시 인삼시장 지배

 

조선이 다시 인삼시장을 주도한 것은 여진족이 중원으로 들어가 만주가 텅비어 인삼 채취를 하지 않게 되면서부터였다. 17~18세기에 개성상인들을 중심으로 인삼이 본격적으로 재배되면서 조선은 인삼 강국으로 다시 부상한다. 청나라는 조선에서 인삼을 수입하게 되었다.

1821년 의주상인 임상옥(林尙沃)은 사신단을 따라 청나라에 갔을 때, 베이징 상인들의 불매 동맹을 교묘한 방법으로 깨뜨리고 원가의 수십 배로 인삼을 매각하는 등 막대한 재화를 벌었다. 이 이야기는 후에 최인호에 의해 소설(商道)로도 나오고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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