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부 삼척출항의 재조명④…전선(戰船)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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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부 삼척출항의 재조명④…전선(戰船) 형태
  • 이효웅 사진작가
  • 승인 2017.08.14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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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 제작 3요소, 기술자와 선박재료와 조선소…전선 연구에 심층 논의 필요

 

[이효웅 이사부기념사업회 기획이사(해양모험가]

 

선박의 유물은 대부분 서해안과 같이 뻘 속에 있던 것이 발굴되는데 아쉽게도 동해안 특성상 뻘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선박 유물은 기대하기 힘들다. 그러나 일본에서와 같이 주형토기나 고그림에서 단서를 찾아야하는데 이것 또한 쉽지 않다. 지증왕 3년(502)에 신라에서는 순장을 금지하는 제도가 생겨서 부장품들이 많이 간소화되었을 것으로 본다. 삼국시대의 주형토기들은 대부분 낙동강을 중심으로 한 가야와 신라의 주변 지역에서 발굴되고 있다. 4-5세기의 주형토기들에서 보여 지는 선박들은 독목주형의 소형 선박들로 제기용으로 사용되어진 선박으로 전선의 모양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우산국 정벌을 계획할 당시인 505년에는 유능한 선박제작 기술자들은 주로 울산·포항 등의 해안이나 강가에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데, 이들을 모집하기 위하여 왕께 주청하여 지증왕 6년(505) 11월 선박이용에 관한 제도를 제정하였다. 나라에서는 전국 또는 가야국까지 유능한 기술자들을 모집하여 실직의 외딴섬에 보내어 506년부터 전선과 비밀병기를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이사부 전선은 오늘날 우리가 가장 궁금해 하는 관심사이다. 필자가 보트 탐사대를 두 번 이끈 경험 등 지금까지의 모든 상황을 종합하여 이사부 장군 이라고 생각하고 아래와 같이 추론해 보고자 한다. 왜의 7-8세기경 쓰여 진『고사기』‘진구의 삼한 정벌’의 내용을 보면,

 

황후는 신이 가르쳐준 대로 군사를 정비했다. 배를 가지런히 하여 바다를 건널 때 바다의 크고 작 은 고기들이 모든 배를 업고 건넜다. 때마침 순풍이 불어 배들은 파도를 따라 순조롭게 앞으로 나 아 갔다. 그런데 그 배들을 받치고 있던 파도가 신라 땅으로 밀려들어가더니 국토의 반 정도를 덮 치고 말았다. 이를 본 신라 국왕은 깜짝 놀라 두려워한 나머지 “지금부터 천황의 명령에 따라 말 을 사육하는 자가 되어 해마다 배를 정렬하여 배안을 비우는 일 없이, 또 삿대나 노를 말리는 일 없이 하늘과 땅이 있는 한 끊이지 않고 공물을 바치겠나이다.”라고 했다.

 

때마침 순풍이 불어 배들은 파도를 따라 순조롭게 앞으로 나아갔다.’‘삿대나 노를 말리는 일없이’를 보아도 당시 왜의 전선에는‘돛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본다.

 

▲ <도-1> 호암미술관 주형토기(대형독목주) /이효웅 제공
▲ <도-2> 호림박물관 주형토기(첨저형선) /이효웅 제공

 

가야 4-5세기의 <도-1> 호암미술관 주형토기는 대형독목주(통나무) 선박에 좌우의 놀좃으로 보아 쌍노를 사용하였고, 뒷부분에 홈이 있는 것으로 보아 키를 사용하였다. <도-2> 호림박물관의 주형토기는 이체성형선이나 삼체성형선이 용골 형태의 첨저형 선박으로 바뀌는 과정인 것 같다. 독목주 선박은 폭이 좁고 길이가 긴 것이 특징이어서 대부분 노잡이들은 일렬방식의 쌍노와 외노를 사용하였다. 이와 같은 방식의 선박은 연안에서 6-10명 이내의 소형선은 가능하나 20-30명 이상의 중형선에는 맞지 않는다. 전선은 많은 사람과 전쟁 물자 또는 노획물자를 실어야 하므로 당시의 대형독목주 형태 보다는 작은 통나무를 많이 연결하여 밑판을 만들고 측판을 쌓아올리는 형태의 다체성형선(多體成形船)구조선이 되어야 한다.

 

▲ <도-3> 안압지선(평저형 삼체성형선) /이효웅 제공

 

<도-3>의 안압지선은 1975년 경주 안압지에서 발굴하였으며 크기는 620x110x35cm로 여러 개의 노와 함께 출토되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왜인(왜병)들이 타고 온 전선들은 성을 공격할 정도로 많은 군사를 실었고 많은 백성들을 노획하여 갔다. 그리고 육지에서 우산국을 공격하는 데는 최소한 보름 정도의 식수와 식량 및 무기나 땔감 등을 실어야 하므로 중·대형선이 되어야 한다.

 

<표> 과거 전선의 형태에 따른 특징 비교표

구분

노평저선

노첨저선

준범선(평저선)

범선(평저선)

돛대

.

.

1-2

3개 이상

측판

.

.

대형키

2

주동력

노(50%이상),돛

노,돛(50%이상)

복원성

2

1

3

4(킬 없음)

능파성

2

1

3

4

무게

4

3

2

1

접안성

1

3(2)

2(3)

4

화공 취약

3

4

2

1

부두 필요

4

3

2

1

항해 거리

4

3

2

1

저항

3

4

2

1

피로도

1

2

3

4

순간 속력

2

1

3

4

제작 비용

4

3

2

1

수리 능력

1

3(2)

2(3)

4

조선소 필요

4

3

2

1

용도

강, 해안

수심 깊은 곳

연안 항해

대양 항해

 

<표>의 과거 전선의 형태에 따른 특징 비교표에 보듯이 과거에는 양질의 항구가 없는 곳이 대부분이므로 주로 강을 타고 출입하거나 정박하며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어야하므로 노를 주로 사용하고 만들기 쉬운 평저선형이다. 또한 과거의 전선은 기술과 도구의 부족으로 내구성과 수밀성(방수)이 약하여 풍랑이나 태풍 시에는 대부분 침수되거나 파괴된다. 첨저선 제작은 특수한 조선소와 기술이 있어야 가능하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이사부 전선은 동해바다의 파랑과 싸워야 하므로 당시의 기술력으로 보아 첨저형선 보다는 선수를 뾰족이 하는 첨형평저선일 가능성이 높다.

 

『잃어버린 왕국 대가야』에 보면,

경남 합천 옥전 고분M3호의 무덤 속에서 주인공의 널안에는 주조 쇠도끼가 직사각형으로 깔려 있 었고, 금동제 말 장신구 등 상당량의 철기, 한 쌍의 금귀고리, 용과 봉황 무늬를 새긴 고리모양 손 잡이 큰칼 두 자루가 놓여 있었다. 중략...주인공이 안치된 주곽에서는 대가야 지배층 무덤 중 질 과 량에서 압도적인 철제품들이 쏟아졌다. 갑옷 6점, 투구 2점, 대검 1점, 대도 13점, 소도 70여 점, 화살촉 400여점, 찬13점, 말투구 2점, 안장 2점, 재갈 3점, 덩이쇠 28점, 주조 쇠도끼 121점, 단조 쇠도끼 15점 등, 이중 더욱 눈길을 끈 것은 망치, 집게, 숫돌, 덩이쇠, 주조 쇠도끼였다. 이른바 단야구(鍛冶具)인 셈인다.

1992년 관동대박물관 등 4개 기관은 동해시 추암동 및 구호마을의 북평산업공단 부지에서 400년대 후반부터 600년대 중반의 신라 고분 64기를 발굴하였다. 여기에서 동관 1점, 금동장신구 2점, 청동 장신구 1점, 쇠칼, 쇠화살촉, 쇠도끼, 쇠낫 등 철기류 36점, 귀고리18점, 토기 등 370점의 유물이 나왔다.

 

옥전 고분 M3호의 고분과 북평 추암동 고분은 400년대 후반부터 600년대 중반의 가야와 신라 고분에서 발견된 부장품들이다. 철제품에는 무기류와 생활도구인 쇠도끼와 쇠낫이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쇠도끼는 무기 보다는 나무를 자르는 도구로 저 세상에서도 왕국을 건설하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보아지는데, 이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톱 보다는 쇠도끼, 낫, 칼 등으로 건축이나 선박을 제작하였다 본다.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안압지선이나 2013년 발굴된 영흥도선은 삼체성형선으로 판재방식이 아닌 독목주 방식이므로 이 부분도 다시 한 번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전선을 만들기 위한 3요소는 기술자와 선박재료와 조선소일 것이다. 기술자는 주즙제도를 통하여 신라와 가야에서 최고 기술자들을 모집하였고, 조선소는 정라진의 외딴섬 건너불에 터를 마련하였다. 선박재료는 삼척의 인근 산에서 소달구지를 이용하여 운반하거나 오십천 주변에서는 가을걷이가 끝난 후 지역 주민들을 동원하여 산에 들어가서 선박재료들을 절단하여 뗏목을 만든다. 봄철의 눈 녹은 물이나 폭우를 이용하여 오십천 하류의 조선소로 보내지고 2년 정도 나무를 말린 다음 전선을 만든다. 아울러 전선을 만들기 위하여 선박전문가와 많은 기술자들이 모여 새로운 전선을 만들기 위하여 많은 논의를 하였을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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