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과 제국주의①] 동양과 서양 운명 바꾼 英 네메시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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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과 제국주의①] 동양과 서양 운명 바꾼 英 네메시스호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8.06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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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봉 돈 첫 철제증기선…1차 아편전쟁에 투입돼 청나라 굴복시켜

 

1939년 영국은 비밀리에 대형 선박을 건조했다. 당시의 최고 기술이 총 동원됐다. 증기기관을 장착한 철제선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무쇠로 배를 짓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발주는 인도를 경영하고 있는 동인도회사, 실제 운용자는 영국해군이었다.

선박은 당대 철강과 조선산업을 주무르던 존 레어드(John Laird) 소유의 버큰헤드 철공소(Birkenhead Iron Works)에서 3월간의 공정을 거쳐 완공되었다.

선명은 네메시스(Nemesis). 그리스 신화에서 복수의 여신으로 등장하는 이름이다. 선악의 구분 없이 모든 것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응징하는 악마의 신, 누구를 응징하기 위해 악마의 이름이 붙여졌는지는 곧 알려진다.

길이 184 피트 (56m), 폭 29 피트 (8.8 m), 적하중량 660톤의 네메시스호는 60마력짜리 포레스트 증기엔진 두 대를 장착했다. 배는 두 개의 돛대도 가지고 있었다. 풍력과 증기에너지를 동사에 사용하기 위함이다. 베에는 32파운드의 선회포가 장착되었다. 이 포는 멀리 요새의 성벽에 구멍을 낼수 있을 화력을 자랑했다. 게다가 6파운드 포 5문, 캐논포 10문, 로켓발사대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 내부에는 격벽으로 7개의 방수격으로 나눠져 있었다. 선체에 구멍이 나도 쉽게 수리될수 있도록 현대화했다. 선장에는 영국 해군출신인 윌리엄 허친슨 홀을 임명했다.

이 배가 조선소에서 나와 부두에 모습을 드러내자, 영국이 떠들썩했다. 과연 저 배가 어디로 갈 것이며, 무슨 용도로 사용될 것인가. 영국 정부와 제작사, 발주사는 모든 것을 비밀에 붙였다. 처음엔 흑해의 오데사로 향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당시 유럽에서 최고의 군사적 긴장은 흑해 크림반도에서 전개되고 있었다.

1840년 3월 28일 네메시스호는 영국 포츠머스항에서 출항명령을 받았다. 목적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일단 인도로 향했다. 네메시스는 아프리카 희망봉을 돈 첫 철제선이다.

10월 6일 인도 실론에 도착한 네메시스는 중국으로 향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영국과 중국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아편전쟁에 참가하라는 지시였다.

 

▲ 영국의 네메시스호 /위키피디아

 

아편전쟁의 발발 원인과 전개과정에 관한 스토리는 많이 알려져 있다. 아편전쟁은 동양과 서양의 운명을 갈라놓은 전쟁이었다. 전쟁의 정당성과 중국의 패전에 관한 숱한 분석들이 있지만, 결정적 한방은 네메시스였다. 이 복수의 철제증기선에 대해 중국인들은 ‘악마의 배’라고 부르며 치를 떨었다. 이 배만 없었으면, 중국이 자기 땅에서 지구 반대편에서 온 영국 해군을 무찌를수 있었을 것이다.

 

네메시스가 광둥(廣東)성 마카오에 도착한 것은 1840년 11월 25일. 앞서 전개된 5개월간의 전투에서 어느 쪽도 승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영국함대는 광저우(廣州)와 아모이(厦門)과 같은 연안도시를 공격했지만, 중국인들의 방어가 완강했다. 영국 해군의 화력은 막강했지만, 중국의 전통적인 포와 정크선는 인해전술이라는 수(數)의 방어막을 쳤다. 시간을 끌면 중국에겐 유리하고, 보급이 취약한 영국은 불리한 상황이었다.

 

네메시스가 주강(珠江) 삼각주 전투에 투입되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네메시스는 1841년 1월 7일 후먼(虎門) 포대를 공격했다. 청나라는 양 연안에 11개 포대와 300여개 대포를 설치하고 3개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청군은 네메시스라는 악마가 도착하기 이전에 영국 군함이 시도하는 함포 사격도 버텨냈다. 이번에도 중국인들은 적을 막아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네메시스는 다른 군함을 예인하면서 함포사격을 가했다. 중국의 정크선은 네메시스가 쏘는 포에 맥없이 쓰러졌다. 괴물 철선에서 쏘아대는 콩그리브 로켓포의 위력을 보고 중국 배들은 도망가기 바빴다.

청나라 흠차대신 임칙서(林則徐)는 미국의 증기선 캠브리지(Cambridge)호를 도입해 투입했지만, 배를 조정할 선원을 구하지 못해 방벽 뒤에 방치하고 있었다. 캠브리지호는 네메시스의 공격에 침몰하고 말았다.

네메시스는 다른 영국 군함대를 이끌고 서서히 주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주강 삼각주는 좁고 얕은 수로가 미로처럼 얽혀 있어 지금까지 서양의 어떤 전함도 들어가지 못한 곳이었다. 이 곳에 청의 정크선들은 숨어서 게릴라전을 펼칠 태세였다. 하지만 네메시스는 주강을 타고 광저우로 접근했다. 복수의 여신 그자체였다. 보이는 것은 닥치는대로 모두 파괴해버렸다. 중국인들은 공포에 질렸다. 그들은 ‘악마의 배’가 왔다고 베이징 조정에 보고했다.

네메시스의 선장 윌리엄 홀은 승리에 도취해 건조회사의 오너 존 레어드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우리는 귀하의 훌륭한 배에 대해 감탄하고, 중국인들은 귀하의 배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매우 기쁜 마음으로 알려드립니다. […] 중국인들은 이배를 악마의 배라고 부르고….”

네메시스의 등장은 전세를 바꾸었다. 영국 해군은 이 배의 기술과 화력에 열광했다.

 

▲ 1841년 천비 해전에서의 네메시스호 /위키피디아

 

네메시스의 위력은 증기선에 철제선의 장점을 결합한 것이다. 함포는 다른 범선에도 장착해 있었다.

증기선은 증기기관이 발명된 이후 1807년 미국인 로버트 풀턴에 의해 개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개발초기 증기선 사업은 이익을 내지 못했다. 석탄을 많이 실어야 하고 목재선에 화력 엔진을 장착하는 것은 기술상 결함이 많았다. 그러다가 기술이 진전되면서 고압의 엔진이 개발되고 선체를 쇠로 만들고, 프로펠러를 장착하면서 대양을 오가는 배로 자리를 잡아 나갔다.

증기선이 바람을 이용한 범선보다 유리한 것은 계절풍의 영향을 받지 않고 항해를 할수 있다는 점이다. 남중국해에서 전쟁이 벌어질 경우 범선의 시대에는 유럽에서 전함을 동원하는데 몇 년이 걸렸지만, 증기선은 그 시간을 수개월로 단축시켜주었다.

네메시스의 결정적 장점은 철선이라는 사실이다. 쇠는 목재보다 장점이 많은 조선 재료다. 쇠는 목재보다 강하기 때문에 2.5인치(6.4cm)의 철제보가 2피트(60cm) 오크목재의 역할을 했다. 그래서 철선의 배수량이 목선에 비해 30% 가량 더 나왔다. 철선은 목선보다 더 가볍게 배를 만들기 때문에 적은 에너지로도 더 멀리 갈수 있었다.

보다 중요한 장점은 총일이 튕겨나간다는 점이다. 불을 붙여도 타지 않는다. 전쟁은 화력의 싸움이다. 총알과 포탄이 날라와도 버텨주는 것은 철선이 목선에 비해 엄청나게 유리했다.

철선은 목선의 구조적 한계를 극복시켰다. 목선은 나무 길이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최장 100m를 넘기 어려웠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넬슨 제독이 이끈 영국 함대가 60~760m에 불과했다. 하지만 배를 철재로 만들면 길이를 무한정 늘릴 수 있다. 나무를 연결하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쇠를 용접해 이을 경우 길이의 한계를 극복할수 있다.

여기에다 네메시스가 등장할 무렵 프로펠러 기술이 개발됐다. 엔진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프로펠러에 전달해 항해하는 기술은 배의 성능을 크게 높였다. 네메시스는 당대 최고 조선기술의 집합체였다.

 

▲ 1차 아편전쟁 개요도 /위키피디아

 

네메시스의 활약으로 전세는 뒤바뀌었지만, 베이징의 청 황실은 굴복하지 않았다. 영국은 중국의 숨통을 조이는 작전에 돌입했다. 바로 양쯔강과 베이징을 연결하는 대운하의 길목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이 운하는 쓰촨지방에서 나는 쌀을 베이징으로 실어 날랐다. 이 운하가 막히면 수도 베이징이 위태롭게 된다.

1842년 6월 영국 함대는 양쯔강으로 들어갔다. 당시만 해도 전함은 해양용이며,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철제 증기선은 이를 해냈다. 바람의 방향이 필요 없었고, 배의 무게를 훨씬 가볍게 했기 때문이다.

청나라는 양쯔강에 16척의 전쟁용 정크선, 70척의 상선과 어선을 징발해 대비하고 있었다.

이 작전에 네메시스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전투는 오래가지 않았다. 얼마 되지 않아 중국 전함과 양쯔강 양측의 성들의 포사격이 조용해졌다. 네메시스와 그 호위함들이 쏘아대는 포격은 청 조정으로 하여금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수 없게끔 했다. 청은 양쯔강 중류 난징(南京)으로 협상단을 파견했다. 그렇게 해서 체결된 것이 난징조약이며, 1차 아편전쟁은 네메시스의 승리로 끝났다.

네메시스는 이후에도 필리핀과 인도네이사에서 해적선을 추격하는 임무를 수행했고, 1852~53년 영국~미얀마 전쟁에 참여해 아라와디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미얀마 식민화에 일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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