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놀부가 왜 악인이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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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놀부가 왜 악인이 되었을까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7.12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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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중심의 상속제도 변화, 계층갈등의 심화로 흥부전 스토리 진화한듯

 

가장 오래된 흥부전 필사본이 발견됐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착한 놀부가 왜 악인으로 변형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새로 발견된 필사본에는 흥부는 무과에 급제했고, 놀부는 악인으로 설정되지 않았다는 점이 놀랍다. 그렇다면 재미가 없어진다. 흥부전의 전개는 착한 동생, 성질머리 나쁜 형의 스토리에다 제비가 물어준 박씨가 행운과 불행을 갈라 놓는다는 권선징악(勸善懲惡)적 요소가 가미해 맛과 흥을 더해준다.

최고본에서 들려주는 흥부전은 작품성이 떨어진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최고본의 무미건조한 내용이 그후에 나온 이본(異本), 즉 우리가 알고 있는 흥부전에서 크게 변형되었을까. 특히 전북 고창 출신의 신재효가 구성지게 읊어댄 판소리 ‘흥부가’는 당시 백성의 애환을 그려내 민중들로부터 갈채를 받게 되었다.

 

최고(最古)로 확인된 ‘흥보만보록’이라는 제목의 필사본은 1833년(순조 33년)에 베껴 쓴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했다. 송준호 전 연세대 교수 집안에서 내려오다 조선일보에 제공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이 필사본은 1853년의 것을 모본(母本)으로 했다는 하버드대 옌칭도서관 소장 ‘흥보전’의 기록을 감안하면 20년 앞선 것이고, 판소리를 집대성한 신재효본보다 40년 앞선 것이라고 한다.

최고(最古)의 흥부전 필사본을 찾았다는 것도 흥미롭지만, 이 최고본에서 나오는 내용이 더 관심을 모은다. ▲ 배경이 평양이라는 점 ▲ 흥부의 성(姓)이 '장씨'로, 나중에 덕수 장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내용 ▲ 흥부와 놀부가 모두 가난한 평민(궁민)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것 ▲ 둘다 부잣집 데릴사위로 들어갔다가 흥부는 친부모 봉양을 위해 돌아오고 놀부는 처가에 계속 머물면서 빈부 격차가 커진다는 내용이 특이하다.

우리가 아는 흥부전은 무대가 삼남(경상 전라 충청)이고, 특히 남원으로 추정되고, 흥부의 성은 박씨 또는 연씨였고, 두 형제가 몰락한 양반 출신이며, 못된 놀부가 착한 흥부를 내쫓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 우리가 알고 있는 흥부전을 전하는 서책들 /한국민속문학사전

 

그러면 가장 오래된 필사본에서 착한 놀부로 그려진 인물이 그후 이본에서 악인으로 재창작었을까. 그 과정을 이해하려면, 당시 사회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흥부전은 가난한 백성들의 생활상이 잘 반영돼 있다는 점에서 조선 후기 광대, 가객등 서민 예능인들에 의해 창작되고 진화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흥부의 모습에서 가난한 농민의 모습이 읽히고, 놀부에게서 어느날 갑자기 부자가 된 졸부의 사회상이 담겨 있다.

흥부전은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거치며 조선사회가 급격히 붕괴되는 모습이 드러난다. 그 첫째는 장자 상속제도의 공고화, 둘째는 부농이 나타나고 상품 유통이 활성화되면서 부익부빈익빈(富益富貧益貧)의 계층 분화가 심화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17세기 이후 조선의 상속제도는 장자 중심으로 이행한다.

흥부 마누라는 이렇게 한탄한다.

“어떤 사람 팔자 좋아 장손으로 태어나서 선영 제사 모신다고 호의호식 잘사는데, 누구는 버둥대도 이리 살기 어려울까. 차라리 나가서 콱 죽고 싶소”

한 형제로 태어났지만 놀부는 장손으로 제사를 모신다는 이유로 가산을 모두 물려받고 동생을 집에서 쫓아낸다. 최고본으로 추정되는 ‘흥보만보록’에서 두 형제 모두 데릴사위로 들어갔지만 흥부가 부모 모신다고 나오는 것과 설정이 다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흥부전은 당시의 시대상을 보다 정확히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고려시대의 전통이 남아 유산 배분에서 장남과 차남, 그리고 딸 사이에 특별한 차이가 없었다. 사위가 가계를 잇고 제사를 받드는 일도 사회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었다. 족보에 아들, 딸이 공히 기재되었다. 성종 7년(1476)에 만들어진 『경국대전』에는 재산 상속시 본처 소생의 경우 장남부터 혼인한 딸에게까지 균등하게 나누도록 되어 있다. 조선 전기였다면 흥부전이 나올수 없었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성리학이 뿌리내리면서 아들, 특히 장자의 몫이 커졌다.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혈연공동체 의식이 강화되었고, 남성 중심의 가족제도가 강화된 것이다. 이 제도는 상속제도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17세기에 이르면 조선전기에 동등하게 나누어졌던 딸의 상속분이 아들의 3분의1로 줄어든다. 딸은 조상을 모실 의무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특히 장자는 대가족 구성원의 대표로서 우월한 지위를 보장받았다.

악인으로 형상화된 놀부는 가족제도 변화에 따른 상속 배분 차별화의 산물이다. 장손으로 태어나 선영을 모신다는 이유로 형이 동생을 내쫓아도 되는 사회가 형성된 것이다.

 

조선후기의 또다른 변화는 사회경제적 변화로 계층갈등이 심화되었다는 점이다.

그 핵심에는 이앙법(모내기)이 있다. 모내기가 전국적으로 보급되면서 농업 생산이 비약적으로 증대되었다. 조선시대 생산수단은 토지였다. 따라서 땅을 많이 물려받은 사람은 생산성 증대로 경영형 부농으로 성장했다. 사회적 부의 축적은 상품 유통을 성행시켜 상인 부유층이 나타났고, 광산이 개발되었다.

하지만 노동력만 가진 농민들은 임금 노동자(품팔이)로 전락했다. 국가와 사회의 부가 증대되었지만, 그 부가 골고루 배분되지 않고 소수에게 집중되면서 농사를 짓던 사람이 토지로부터 유리되는 현상이 가속화되었다. 농민은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유랑민이 생기고 산에 들어가 화전을 일구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흥부는 이런 사회경제적 변화에서 임노동자로 전락한 농민을 대변한다. 흥부가 부인에게 “우리 부부 품이나 팔러 갑시다”고 한 구절은 품팔이, 즉 임노동자의 어려움을 보여준다.

흥부전에는 품팔이 내용이 자세히 나온다. 흥부 아내는 용정방아 키질하기, 매주가에서 술 거르기, 초상집에서 제복 짓기, 신사에서 떨 만들기, 언 손 불고 오줌 치기, 해빙 되면 나물 뜯기, 충모 갈아 보리 놓기 등의 허드렛일을 한다. 흥부는 가래질 하기, 전답 무논 갈기, 입하 전에 면화 갈기, 이집 저집 이엉 얽기, 더운 날에 보리 치기, 비 오는 날 멍석 걷기, 산의 시초 하기, 말짐 싣기, 마철 박기등 잡일을 하면서 생계를 잇는다. 가장 안타까운 장면은 매품 팔기다. 흥부가 송사에 말린 부자를 대신해 30냥에 곤장을 맞지만, 사면령이 내려 매품도 팔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다음 제비 다리를 고쳐주고 이듬해 봄에 제비가 물고온 박씨에서 나온 기적은 고전소설의 백미다. 가난한 백성들의 염원이 사회 개혁 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한채 기적에 대한 기대로 소극화한 것이다.

 

흥부전은 작가 미상의 민중소설이다. 판소리 ‘흥부가’는 조선 사회에서 천민집단이었던 광대들에 의해 구전되다가 판소리 작가 신재효에 의해 정리된 것이다.

평양을 배경으로 한 초기의 내용이 가렴주구(苛斂誅求)가 가장 극심한 호남지방으로 내려오면서 사회의 극적인 요소들에 대한 노골적 풍자가 가미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최고본이 발견되었으므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이본 흥부전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구전소설이 진화하는 과정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최고본으로 추정되는 필사본의 내용과 이본의 내용이 다르다는 사실에서 그 사이에 조선사회가 극심한 변화과정을 겪었고, 민중들의 삶이 더 나락으로 빠진 과정을 음미해 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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