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임금, 백제 무왕…익산 왕궁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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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임금, 백제 무왕…익산 왕궁의 비밀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7.10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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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익산 왕궁리 궁궐 후원과 담장 개방…발굴과 정비 마무리

 

백제 30대 무왕(武王, 600~641)만큼 출생의 비밀이 복잡한 임금도 없을 것이다. 그의 출생이 이리저리 꼬여 있다는 게 아니라, 역사서들이 그의 출생을 다양하게 기록했기 때문에 어느 것을 믿어야 할지 모른다는 얘기다.

정사로 받아들이는 『삼국사기』는 “무왕의 이름은 장(璋)이니 법왕(法王)의 아들이다. 법왕이 왕위에 오르고 이듬해에 돌아가시자, 아들로서 왕위를 이었다”고 기록했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무왕은 정통 계보를 이은 왕이다.

하지만 중국 남북조시대 북조(北朝)의 역사를 기록한 『북사』(北史)에는 27대 위덕왕(威德王, 재위 554~598)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외국의 기록이므로, 다소 정확도가 떨어질수도 있다.

국내의 또다른 사서인 『삼국유사』는 무왕이 역성혁명을 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는 “제30대 무왕(武王)의 이름은 장(璋)이다. 그의 어머니는 과부였는데 수도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다가, 그 연못의 용과 정을 통하고 아들을 낳았다. 어려서의 이름은 서동(薯童)이다.”고 했다.

용은 임금에 비유된다. 용이 어느 과부와 정을 통해 아들을 낳고 임금이 되었으니, 온조왕(溫祚王) 이래 백제 왕가를 이어온 부여(夫餘)씨를 멸하고 새로운 왕조가 태어났다는 얘기인가. 적어도 적통은 아니라는 뜻일 게다.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은 무왕의 탄생 설화의 스토리가 갖는 애매함에 대해 “삼국사기에서는 이 분을 법왕의 아들이라고 하였지만, 여기서는 과부의 아들이라고 전하였으니,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고 얼버무렸다.

 

▲ 전북 익산시 서동공원 /익산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무왕에 대한 서술도 상이하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삼국사기에는 무왕은 할아버지 성왕(聖王)을 죽인 신라를 철천지 원수로 여기고 재임 41년동안 신라와 전쟁을 벌이는 임금으로 나온다. 그래서 시호가 무왕(武王)이다.

삼국사기는 무왕이 풍채와 뛰어나고 뜻과 기상이 호방하고 걸출했다고 기록했다. 그는 재위 기간 내내 신라에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갈등 관계에 있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만으로도 602년(재위 3) 신라의 모산성(母山城)을 포위해 공격한 것을 시작으로 636년(재위 37) 독산성(獨山城) 전투까지 10여 차례 이상 군대를 일으켜 신라를 침공했다. 623년(재위 24) 이후에는 거의 매년 신라와 전투를 벌였으며, 627년(재위 28)에는 무왕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신라에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삼국유사에는 무왕이 신라의 선화공주를 꼬여내 결혼하는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무왕은 어렸을 때 마를 캐 생계를 유지해 서동(薯童)이라고 불리웠다. 그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善花)공주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신라의 도읍인 서라벌로 가서 선화공주가 밤마다 남모르게 서동과 어울리고 있다는 노래(서동요)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다. 그 노래 때문에 선화공주가 궁궐에서 쫓겨나 귀양을 가게 되자 서동은 그녀를 데리고 백제로 와서 결혼했으며, 어렸을 때 마를 캐면서 발견해 모아두었던 황금으로 인심을 얻어 백제의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는 재미있고, 아름다운 설화다.

 

이렇게 엇갈리는 역사 기록 가운데 어느 것이 맞을까. 하지만 굳이 정답을 얻어야 할까. 입증할 자료도 마땅치 않다. 그냥 미스터리로 남겨두기로 하자. 다만 서로 다른 기록 그대로를 우리의 역사로 받아들이면 된다.

가장 정직한 것은 땅 속에 묻혀 있는 타임캡슐이다. 엣날에 묻어두었던 것들이 천년 후에 발굴되어 나타났을 때, 그것들이 뒤틀리고 애매한 역사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전라북도 익산시에 왕궁리라는 마을이 있다. 이곳에는 왕궁탑이 남아 있고, 궁평(宮坪)이라는 지명이 있다. 이런 점 때문에 오래전부터 마한과 백제의 궁궐터로 추정되어 왔다. ‘임금이 머무는 궁성’의 의미를 안은 왕궁은 면 단위의 이름과 하천 명으로 확대되었다. 인접 금마(金馬)면에는 동고도(東古都)와 서고도(西古都)란 땅 이름이 있음으로, 오랜 도읍지임을 지명에서 뒷받침하고 있다.

 

민가의 전설을 모아 구성한 삼국유사가 정사로 받들어지는 삼국사기에 비해 보다 구체적인 사실을 전해준다. 서동왕자와 선화공주의 로맨스가 실려잇는 삼국유사 무왕편(제2권 기이 제2)에는 이런 얘기가 실려있다.

 

하루는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행차하던 중, 용화산 아래 큰 연못가에 이르렀다. 그때 미륵삼존이 연못 속에서 나타나자 왕은 수레를 멈추게 하고 경의를 표하였다. 부인이 왕에게 말하였다.

“이곳에 큰 절을 짓는 것이 진실로 제 소원입니다.”

그래서 왕이 이를 허락하고 지명법사에게 가서 연못을 메우는 일에 대해 묻자, 법사가 신통력으로 하룻밤만에 산을 무너뜨려 연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그래서 미륵삼존의 모습을 본떠서 만들고 전각과 탑과 회랑을 각각 세 곳에 만들고는 미륵사(彌勒寺)라고 하였다. 진평왕은 수많은 장인들을 보내어 절을 짓는 일을 돕게 하였는데, 지금도 그 절이 남아 있다.

 

▲ 후원 영역 발굴조사 전경 /문화재청

 

그 미륵사의 절 터가 익산시 금마면에 있다는 사실에서 익산은 무왕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 그러면 익산의 왕궁은 누구의 것일까. 일단 무왕의 왕궁으로 해두자.

익산 왕궁리에 오래전에 왕궁이 있었다는 설을 확인하기 위해 고고학자는 물론 정부기관이 확인작업에 나섰다. 1976년과 1977년도에 부분적인 시굴조사가 시행된 후, 1989년도엔 본격적인 전면 발굴조사가 시작됐다.

그동안 발굴 결과를 통해 궁성과 관련된 성벽, 전각, 정원과 후원, 대형화장실 등이 조사됐고, 인장 기와, 중국제 자기, 연화문 수막새 등 중요 유물이 다수 출토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 중에 후원은 대단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후원은 왕궁리 유적 내 북동편에 커다란 구릉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구릉의 경사면 아래쪽에는 담장과 인접하여 폭 2.7∼7.2m, 길이 485m의 대형 수로가 동‧북‧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구릉 주변의 길고 짧은 6개의 곡수로(曲水路)와 4개의 집수시설(集水施設)은 효율적인 물의 저장과 배수, 조경 등에 사용되었다.

후원에는 네모난 연못과 구불구불한 물길을 화려한 정원석으로 꾸민 조경(造景) 기법 등은 고대 중국인 당나라와 일본 아스카 시대, 나라 시대의 궁궐 정원에서도 엿볼 수 있는 양식이다. 이는 당시 백제인들이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들과 문화적으로 활발히 교류하였음을 보여주는 자료다.

 

▲ 왕궁리 후원 전경 /문화재청

 

문화재청은 세계유산인 익산 왕궁리 유적(사적 제408호)의 궁궐 담장과 후원영역을 오는 11일부터 전면 개방한다고 밝혔다. 문화재청의 이같은 조치는 궁궐 담장과 후원영역에 대한 조사와 정비가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궁궐 담장은 안쪽과 바깥쪽을 잘 다듬어진 화강석으로 쌓아 올렸으며, 길이는 동서로 230m, 남북으로 495m(총 1,454m)에 달한다. 발굴조사 결과에 따라 확인된 잔존 높이(최고 1.2m)까지만 담장을 정비하였으며, 관람객은 담장과 함께 7개의 문지(門址)와 수구(水口), 암거배수로 (지하로 물을 빼는 방법)등도 함께 볼 수 있다.

익산 왕궁리 유적은 2015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바 있다.

무왕의 미스터리를 생각하며 왕궁 후원과 담장을 걸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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