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맹국에 버림받고 내부의 적에 나라 뺏긴 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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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국에 버림받고 내부의 적에 나라 뺏긴 체코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7.09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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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맹이라던 영·불의 유화정책에 내부 분열로 히틀러 침공 허용

 

정치학에서 유화정책을 비판하는 예시로, 1938년 뮌헨 협정에서의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Neville Chamberlain)의 경우를 가장 많이 든다. 유화정책(appeasement)의 교과서는 체임벌린과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의 속고 속이는 과정을 상세히 서술한다. 그리고 체임벌린의 반대편에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등장한다. 한국의 많은 컬럼니스트들도 체임벌린과 처칠에 관한 스토리를 많이 활용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대목은 체코다. 체코인들은 언제까지나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어온 영국과 프랑스에 배신당했으며, 국론 분열로 나라가 갈기갈기 찢겨 끝내 저항 한번도 못하고 나라를 내주고 말았다.

 

체코슬로바키아는 1차 세계대전 후 강대국에 의해 만들어진 나라다. 미국 우드로 윌슨(T. Woodrow Wilson)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에 의해 독립했는데, 민족 구성이 복잡했다.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떨어져 나간 체코슬로바키아는 민족적으로는 체코인 50퍼센트에 독일인 23퍼센트, 슬로바키아인 15퍼센트, 헝가리인 5퍼센트, 우크라이나인 5퍼센트, 폴란드인 1퍼센트로 이루어져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은 프랑스의 작품이었다. 프랑스는 독일을 남쪽에서 압박하기 위해 쐐기처럼 생긴 지역을 분리해 독립시키고 동맹을 맺었다. 슬라브족(슬로바키아인)이 섞여 살았기 때문에 러시아도 우호적 관계를 맺고 있었다.

체코에서 독일인이 많이 거주하던 지역을 주데텐(Sudetenland)이라고 불리웠다. 주데텐은 지역명이 아니라 나치가 등장하면서 임의로 만든 명칭에 불과하다. 독일계 주민들은 동북쪽 산맥지대에 주로 거주했는데, 보헤미아인들이 주도하는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에 대한 귀속감이 적었다.

당시 인구 1,350만명의 체코슬로바키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공업생산 70~80%를 차지했고, 세계 10대 공업국에 들어갔다. 공장지대와 은행은 주로 독일인이 사는 주데텐에 밀집되어 있었고, 은행 주인은 대부분 독일인이었다. 신생국 체코슬로바키아는 중부유럽에서 유일하게 의회 민주주의를 채택해 비교적 안정된 국정을 운영하고 있었다.

 

▲ 그래픽=김송현

 

1933년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가 정권을 장악한 후 체코의 독일인들이 준동하기 시작했다. 나찌는 체코슬로바키아에 분열을 책동했다. 민족의 복잡성은 분열의 단초를 형성했다.

히틀러가 집권하자 교사 출신인 콘라트 헨라인(Konrad Henlein)라는 인물이 곧바로 ‘주데텐 독일당’이라는 나치당을 결성했다. 히틀러는 1938년 2월에 “천만 이상의 게르만인이 우리와 국경을 접한 두 나라에 살고 있다. 이들 동포를 보호하고 그들의 개인적ㆍ정치적ㆍ사상적인 기본적 자유를 확보해주는 것은 독일의 의무”라고 선언했다. 그에 앞서 히틀러는 1935년부터 헨라인에게 자금을 지원하고 비밀 지령을 내렸으며, 1937년에는 ‘녹색 작전’이라는 이름의 주데텐 점령 계획을 기안해 하나씩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주데텐 지방의 나치 세력은 “게르만 민족의 통일”을 살기등등하게 외쳤다. 이런 분위기 속에 동쪽 슬로바키아인마저 독립을 주장했다.

 

독일 히틀러는 단계적으로 팽창정책을 취하면서 체로슬로바키아를 조여왔다. 1936년 비무장지대인 라인란트에 독일군을 진주시키고, 1938년 3월 오스트리아를 합병했다. 다음 타깃은 체코슬로바키아였다.

1938년 9월 12일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총통은 라디오 생중계 연설을 했다.

“이것(주데텐)은 독일 국민들의 문제다. 나는 타국의 정치인들이 독일의 심장부에 제2의 팔레스타인을 만드는 것을 허용할 의도는 없다. 체코에 있는 독일인은 결코 무방비 상태에 있거나 버림받은 것이 아니다. 이 점을 여러분들에게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다.”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에 살고 있는 독일인들이 체코정부에 의해 고문당하고 있는데, 이를 방치할수 없으며, 곧 체코를 침공할 것임을 국제사회에 밝혔다. 히틀러는 체코가 순순히 항복하지 않는다면 10월 1일에 침공한다며 날자까지 노골적으로 흘렸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군사력은 그다지 약하지 않았다. 당시 독일 군부의 평가에 따르면 체코에는 40개 사단의 병력이 었었고, 무장 수준도 유럽 최고였다고 한다. 독일군은 새로 합병한 오스트리아에 12개 사단을 배치하고 남은 병력이 48개 사단이었는데, 최고에 35개 사단을 체코에 투입하더라도 프랑스와 맞닿은 서부 국경지대를 13개 사단으로 방어해야 할 입장이었다. 그나마 서부전선에 남을 13개 사단 가운데 8개 사단은 예비군이었다.

체코 자체병력을 총 동원하고, 동맹인 프랑스가 참전한다면 독일의 침공을 저지할수 있는 충분한 여력이 있었다. 당시 독일 군부는 “현재의 전력으로 체코를 침공할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게다가 영국과 러시아가 참전한다면 오히려 독일의 나치가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독일 군부의 이런 결론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밀어붙였다. 지도자가 미치면 그나라 국민도 피곤하지만, 이웃나라도 걷잡을수 없는 상황에 빠진다. 미친개를 힘으로 적절히 제어해야 하는데, 아무도 그러지 않고 피하기만 했다.

나치는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에 12개 사단을 배치했다. 이 정도면 체코군으로도 충분히 방어할수 있었을 것이다.

 

▲ 좌로부터 체임벌린(영국), 달라디에(프랑스), 히틀러(독일), 무솔리니(이탈리아). 1938년 9월 29일 뮌헨회담. 위키피디아

 

여기에서 그 유명한 영국총리 체임벌린의 유화정책이 등장한다. 체코의 동맹국이었던 영국이 취한 정책은 미친 개에게 요구사항을 들어주는 일이었다. 이 비겁한 총리는 1차 대전이 끝난지 20년밖에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또다시 전쟁을 치르는 게 겁이 났다. 프랑스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영국 언론은 어떤 글을 썼나. 9월 7일자 런던타임스는 “파멸적인 전쟁을 치르느니, 주데텐을 양보하는 일을 체코 정부는 고려해야 한다”는 사설을 실었다. 영국 신문이 남의 나라 내정간섭을 하는 칼럼을 실은 것도 우스운 일이다. 하지만 사설이 목표하는 것은 체임벌린 총리가 체코 정부에 그렇게 압력을 넣으라는 여론 조성이었다.

그러자 체임벌린이 나섰다. 그 후 얘기는 많이 알려져 있다. 체임벌린은 영불 해협을 오가며 프랑스를 설득했고, 체코슬로바키아의 혈맹이라고 부르짓던 프랑스도 히틀러에 굴복했다.

 

당시 체임벌린과 영국인들의 반응은 가관이다. 체임벌린은 의회에서 “어떤 사정이 있어도 대영제국을 전쟁으로 끌어넣을 수는 없다, 무력 충돌은 악몽이다. 나는 영혼 깊숙한 곳까지 평화 애호가다”라고 외쳤다. 영국국민들은 전쟁을 거부하는 체임벌린총리에게 박수를 보냈다.

체임벌린은 연설 후 독일 뮌헨으로 날아가 히틀러와 회담하며 대부분의 요구를 들어주어 평화를 사는데 성공했다. 체임벌린은 영국국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히틀러가 서명한 평화선언문을 들어 보이며 “여기 우리시대의 평화가 있다”고 외쳤다.

체임벌린은 히틀러에 대해 “그 사나이는 냉혹하지만 한번 약속한 것은 꼭 지키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는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이다”라며 지지자들에게서 다시 안도의 박수를 받았다. 자신이 마치 대단한 협상가(negotiator)인양 자부했다.

그때 처칠은 “총리의 협상 결과는 전면적 절대적 패배입니다”라고 부르짖었지만, 많은 의원들로부터 심한 야유를 받아야 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대통령 에드바르트 베네시(Edvard Benes)는 보헤미아 출신으로 반나치 정책을 고수했다. 그는 1차 대전중 오스트리아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을 벌였던 인물이다.

그는 마지막 수단으로 주데텐 독일당의 총수이자 히틀러의 압잡이인 헨라인과 만나 주데텐의 자치권 부여와 주민 투표를 통한 귀속 결정 허용을 제시했다. 주데텐 독일당의 요구를 거의 수용하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타협을 싫어했다. 그는 헨라인에게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결렬시키라는 지령을 내렸다.

 

이런 가운데 영국의 체임벌린은 체코 베네시 대통령의 등에 칼을 찔렀다. 체임벌린은 주데텐을 독일에 떼주어 히틀러를 달래는 방법을 선택했다. 영국 의회도 윈스턴 처칠 등 소수파만 반대했고, 주데텐 할양안을 통과시켰다.

체코슬로바키아의 혈맹인 프랑스는 오히려 영국보다 더했다. 프랑스는 “문제가 되는 지역보다 더 넓은 지역을 할양하도록 하겠다”고 제안했다. 영국은 이탈리아 무솔리니에게 거중조정을 부탁했고, 무솔리니는 히틀러가 만든 중재안을 회담장에 가져 나왔다.

1938년 9월 29일. 뮌헨 회담에는 영국의 체임벌린, 프랑스의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 독일 히틀러, 이탈리아 무솔리니가 만났다. 정작 국토를 내주어야 할 체코 대표는 협상장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옆방에 대기했다. 회담이 끝나고 체코 대표가 “어떻게 됐느냐”고 물었을 때, 체임벌린은 하품을 하며 무반응이었고, 프랑스의 달리디에는 “바쁘니까 나중에 얘기하자”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결론은 뻔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을 독일에 할양한다는 것.

 

뮌헨 회담 다음날인 9월 30일 체코슬로바키아의 총리 실로비는 대국민 연설에서 “세계가 우리를 버렸습니다! 우리는 외톨이입니다.”라고 외쳤다.

체코는 주데텐을 독일에 뺏겼고, 그후 1년내에 폴란드와 헝가리에도 땅을 내주며 슬로바키아도 독립해 면적과 인구는 3분의1로 쪼그라들었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해 1939년 나치의 독일은 보헤미아도 침공해 삼켜버리고 슬로바키아에 괴뢰정부를 수립했다.

나치에 나라를 잃은 베네시 대통령은 런던에 망명정부를 수립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망하고 프라하가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자, 체코슬로바키아는 다시 독립했고, 베네시가 대통령으로 복귀했다.

 

▲ 1938년 9월 24일 독일에서 영국 체임벌린과 독일 히틀러가 만나 악수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 체코 프라하 시청 앞에 있는 에드바르트 베네시 대통령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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