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고대에 철 생산 중심지…삼국 각축의 배경
상태바
충주, 고대에 철 생산 중심지…삼국 각축의 배경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6.28 18: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탄금대 뒷사면에서 10여기의 제련로 등 유구 출토…‘백제의 것’ 추정

 

충주는 남한 지도를 놓고 보면, 국토의 한 가운데 있다. 따라서 우리 역사를 관통하는 도시다. 지정학적으로도 요충지이다. 영남에서 문경새재를 넘어 도착하는 곳이며, 또 외적이 영남을 공격할 때 지나는 길목이기도 하다. 남한강 수운을 홀용해 한강 하류로 연결하는 지점이다.

충주의 명물은 탄금대(彈琴臺)다. 대가야 출신 우륵이 나라를 잃은 슬픔을 가야금으로 연주하다가 신라 진흥왕이 그 소리를 듣고 탄복했다는 명소다. 충주 시가지 서북쪽 칠금동, 남한강과 달천이 합류하는 곳에 해발 200m의 야트마한 산에 있다.

그곳에 우리가 아는 다른 역사적 유물이 땅속에 묻혀 있었다. 바로 철(鐵)을 제련하는 시설이다.

 

▲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가 고대 제철 기술을 재현하고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가 충주 칠금동 탄금대 뒤쪽(남쪽) 경사면 지역을 대상으로 고대제철시설 복원사업을 위해 지난해 1차에 이어, 올해 2차 발굴조사를 벌이고 있다.

지난해 1차 조사에서 백제의 것으로 추정되는 제련로(製鍊爐) 4기를 비롯해 철광석을 부수는 파쇄장과 배수로, 불을 때던 각종 소성유구등을 발굴했다. 이어 올해 2차 조사에서 무려 8기의 제련로를 확인했다. 지난해 조사한 것과 합치면 발견한 제련로는 모두 11기다. (1차 조사와 2차 조사에 겹치거나 애매한 것이 1기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에 발굴된 8기의 제련로는 200여㎡ 밖에 되지 않는 작은 공간에 밀집돼 있었다. 따라서 이 곳이 고대에 내륙지방의 주요 철 생산지였음을 알수 있다.

 

▲ 충주 제철유물 발굴지역 /문화재청

 

그렇다면 삼국시대에 충주 일대를 놓고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졌던 것은 지정학적 중요성과 더불어 철(鐵)의 생산지였기 때문이 아닐까.

충주 지역은 삼국시대가 열리기 이전에 마한 연맹체에 속해 있었다가 백제가 서앙하면서 백제의 영향력 안에 편입되었다. 그후 고구려의 남진정책으로 장수왕이 한성백제를 무너뜨린후 충주 지역까지 진격했다.(475년) 고구려는 충주에 국원성을 설치하고, 수도 다음가는 도시로 승격시키고 남한강 일대와 신라 정벌의 중심지로 삼았다. 당시 고구려의 남진정책의 성공을 기린 척경비로 충주 고구려비가 남아있다.

하지만 신라가 강성해지면서 진흥왕은 이사부 장군을 시켜 단양을 점령하고, 그곳에 적성비를 세웠다.(550년) 곧이어 충주는 신라에 넘어간다. 신라도 고구려처럼 충주를 국원(國原)이라고 부르고, 경주 다음 가는 소경(小京)으로 삼는다.

『삼국사기』지리지를 보자.

 

“중원경(中原京)은 원래 고구려의 국원성(國原城)으로, 신라가 이를 평정하여 진흥왕이 소경(小京)을 설치하였고, 문무왕 때 여기에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2,592보였다. 경덕왕이 중원경으로 개칭하였다. 지금의 충주(忠州)다.”

 

그렇다면 신라와 고구려가 충주를 제2의 수도로 삼고, 백제가 이 곳을 선점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철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철은 고대인에게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다. 철로 만든 무기는 구리보다 뛰어났고, 철로 만든 농기구는 금새 무뎌지는 청동기보다 강하여 대량생산을 가능케 했다. 철은 녹이 잘 슬어 장신구로서의 매력은 적었지만, 지배자 집단에겐 철이 매력적이었다. 철을 확보한 나라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농업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켜 잉여 생산물을 확보할수 있었다. 고대 고분에서 나오는 무수한 철정(鐵鋌, 쇳덩이)는 고대인들이 철을 얼마나 중히 여겼는지를 알수 있다.

역사 기록에는 가야에 철이 생산되었다고 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나라(國)에서 철을 생산하는데, 한(韓), 예(濊), 왜(倭)가 모두 와서 얻어갔다. 장사를 할때에 철을 사용하는데, 마치 중국에서 돈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이 곳에서 생산된 철이 두 군(낙랑과 대방)에 공급된다.”(國出鐵, 韓濊倭皆從取之. 諸市買皆用鐵, 如中國用錢, 又以供給二郡)

 

고대에는 철이 화폐로도 사용된 것이다.

가야는 철을 생산했기 때문에 주변국의 침공이 잦았다. 『일본서기』의 주장에 따르면 왜는 가야를 속국화하려 했고(임나본부설), 고구려가 5만의 군대로 가야를 침공하고(광개토대왕비), 가야는 나중엔 신라와 백제에 의해 갈기갈기 해체됐다.

충주도 철광석 때문에 백제와 고구려, 신라의 각축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 충주 칠금동 제철유적 - 발굴현장 배치도 /문화재청
▲ 제4제련로 /문화재청
▲ 제6, 7 제련로 /문화재청

 

중원문화재연구소가 이번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제철 유물들은 4세기 백제의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 연구소의 한지선 연구사는 “탄소연대측정을 해보니 4세기로 추정되었고, 유물의 형태로 보아 백제의 유물들로 추정했다”고 말했다.

충주는 예로부터 철광석 산지였다. 충주는 양양, 울산과 함께 남한에서 3대 철 매장지의 한 곳이다.

발굴조사에서 제련로 외에, 일련의 철 생산 과정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유구들이 나왔다.

조사 결과, 6호~11호 제련로에서는 과거에 쓰던 제련로 위에 새 제련로를 다시 축조해 사용한 양상이 확인되었다. 또 4호 제련로의 경우 상부에서는 슬래그(Slag, 철을 만든후 나오는 찌꺼기)가 흐른 원형의 수혈(구덩이) 유구가, 하부구조 바닥에서는 다수의 불탄 목재가 확인된 소성(燒成) 유구가 나왔다. 제련로까지 합치면 총 3기의 유구가 겹쳐진 채로 발견되기도 했다.

특히, 제련로가 상하로 중복 축조된 것은 충주 제철 시설이 오랜 시간 조업해왔던 공간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 곳에서 생산된 철은 남한강 수운을 이용해 운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충주 탄금대 /충주시

 

충주는 신라 지배세력의 하나인 김씨 족단이 남하하는 길목이었다는 점에서 충주 제철시설이 신라의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역사학자 강종훈은 저서 『신라상고사 연구』에서 김씨 족단이 소백산맥 남쪽의 경북 영주를 발상지로 하고, 소백산맥 이북의 충주, 괴산, 보은, 소백산맥 이남의 상주, 문경을 세력권을 형성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진흥왕때 김씨 왕족들은 충주를 ‘국원(國原)’이라 부르며, 소경(小京)으로 삼아 서라벌의 귀족자제와 육부의 백성을 이주시켰다. 국원은 ‘나라의 들판’이라는 뜻으로, 김씨 세력의 유서가 깊은 곳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충주 제철 유적지가 김씨 왕족들이 경주에 입성하기 앞서 철기 문화를 구축하며 세력을 확보했던 지역의 유물일 가능성도 생각해 볼 일이다.

 

▲ 충주의 입지 /충주시청 사이트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