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캡슐 뚫고 나온 경산 압독국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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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캡슐 뚫고 나온 경산 압독국의 비밀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6.23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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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순장…금동관모, 은제허리띠, 귀걸이 등 등 출토…경주에 이웃해 일찍 멸망

 

경상북도 경산시 압량면 일대에 신라 초기에 압독국(押督國)이라는 소국이 있었다. 압량국이라고도 한다. 진한 계열의 독립 소왕국이다.

이 작은 나라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몇차례 등장한다.

 

① 파사이사금 23년 (102년) 8월, 실직(悉直) 압독(押督) 두 나라 임금도 와서 항복하였다.

② 파사이사금 27년 (106년) 정월, 임금이 압독에 행차하여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3월, 압독으로부터 돌아왔다.

③ 일성이사금 13년 (146년) 10월, 압독(押督)이 반란을 일으켰다. 병사를 일으켜 평정하고, 남은 무리들을 남쪽 지방으로 옮겼다.

 

압독국은 파사이사금 때 신라에 복속한다. 이웃나라 분쟁에 끼어들다가 신라의 미움을 받은 것 같다.

 

▲ /그래픽=김인영

사연은 이렇다. 서기 102년, 경주 안강읍에 위치한 소국 음집벌국과 강원도 삼척에 근거지를 둔 실직국이 포항 인근의 땅을 두고 영유권 분쟁을 벌였는데, 신라 파사 임금이 개입했다. 이 때 남해안에서 철강 생산과 해상무역을 독점하던 금관가야의 수로왕도 이 분쟁에 뛰어들었다. 변한 맹주국인 수로왕은 동해안의 해상세력은 실직국을 견제하기 위해 음집벌국의 손을 들어주었다.

경주에서 합의서를 작성하고 합의를 경축하는 연회가 열렸다. 수로왕과 파사임금, 음집벌국의 우두머리 타추간, 실직국왕도 참석했다.

그런데 신라 6부 가운데 음집벌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한기부가 불만을 표시했다. 수로왕의 부하(탐하리)는 한기부의 우두머리(보제)를 죽이고, 음집벌국으로 도망갔다. 물론 수로왕의 지시를 받았을 것이다. 이에 파사 임금은 진노했고, 병사를 일으켜 음집벌국을 공격해 항복을 받았다. 그리고 포항 항구의 영유권도 빼앗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경산에 있던 압독국도 신라에 항복한다. 아마 압독국이 음즙벌국과 가야 수로왕의 편에서 신라에 등을 돌렸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가 차제에 음즙벌국과 압독국을 정벌한 것이다.

 

그로부터 4년후 파사임금은 압독국을 방문해 두달간 머물면서 압독국의 백성들을 위로하며 지배권을 확고히 한다. 압독국왕은 신라의 속국으로 전락했고, 40년후인 일성이사금 때 반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신라는 병사를 일으켜 평정하고, 남은 백성들을 남쪽지방으로 쫓아냈다. 정복국가 신라의 이중적 모습을 보여준다. 고분고분하면 도닥거려주고, 저항하면 말살시키는 정책이다. 고대나 현대나 전쟁은 가혹한 것이다.

 

압독국은 경주에 이웃해 있어 일찍부터 신라에 병합되어 신라영토가 되었지만, 그 일대에 많은 고인돌과 대형 고분이 남아있었다.

그 고분들중 한곳을 파보았더니, 금동으로 된 모자, 은으로 만든 허리띠, 금귀걸이가 나왔고, 어린아이가 순장된 것으로 보이는 인골이 나왔다. 아마 신라에 정복된 이후에 압독국 지역을 다스리던 현지 수장의 것으로 추정된다.

 

▲ < 주곽(우) / 부곽(좌)> /문화재청

 

경북 경산시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사적 516호)을 발굴 조사한 결과, ‘임당 1호분’에서 서 매장 당시의 복식이 그대로 출토됐다. 문화재청은 옛 압독국 지역의 지배층 무덤일 것으로 추정했다. 발굴조사는 경산시와 (재)한빛문화재연구원이 공동으로 진행해왔다.

이 무덤에는 은제허리띠, 순금제의 가는 고리 귀걸이(細環耳飾) 등 최고 지배자를 상징하는 금공품을 착용하고 머리를 동쪽으로 향해 누운 주인공이 확인되었다. 주인공 발치에서는 순장자로 추정되는 금제 귀걸이를 착용한 어린아이 인골 1점과 또 다른 인골 1구도 나왔다.

 

임당동 구릉의 말단부에 자리한 임당 1호분은 5기 정도의 묘곽이 연이어 축조된 연접분(봉분을 이어나간 무덤)으로 하나의 동산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고분 정상부에 있는 당목으로 인해 전체 고분의 절반 정도만을 조사했는데, 대형의 으뜸덧널(主槨)과 딸린덧널(副槨)로 구성된 소위 주부곽식(主副槨式)의 암광목곽묘(岩壙木槨墓) 2기(1A호/1B호)가 드러났다. 이 가운데 먼저 축조된 1A호는 다행히 도굴의 피해를 입지 않아 매장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고분은 토기류 등의 유물양상으로 보아 5세기 말 또는 6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판단된다.

 

* 암광목곽묘(岩壙木槨墓): 암반을 파내 무덤구덩이를 만든 후 시신과 유물을 부장하기 위한 나무덧널을 내부에 축조하고 봉분을 씌운 무덤형태

 

1A호분은 둘레돌(호석, 護石) 장경 17.78m, 단경 15.36m, 잔존높이 3m의 타원형 봉분의 내부에 길이 430cm, 너비 216cm, 깊이 190m의 장방형 으뜸덧널과 길이 359cm, 너비 428cm, 깊이 77~118cm의 사각에 가까운 딸린덧널을 ‘昌(창)’자형으로 배열하였다. ‘昌’자형의 주부곽식 고분은 경산 임당지구 고총에서 보이는 전형적인 형태이다.

으뜸덧널에는 나무덧널(木槨)을 설치하였고, 무덤구덩이의 어깨 위에 5개의 큰 돌로 뚜껑을 만들었다. 딸린덧널은 길이 310cm, 너비 350cm, 높이 70~80cm의 나무덧널을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으뜸덧널 바닥에서는 은제허리띠, 순금제의 가는 고리 귀걸이 금동관모(冠帽)와 관장식(冠飾), 고리자루칼(環頭大刀) 등 최고 지배자를 상징하는 금공품을 착용하고 머리를 동쪽으로 향해 누운 주인공이 확인되었다. 또한, 주인공 발치에서도 금제 귀걸이를 착용한 어린아이 인골 1점이 확인되었는데, 순장자로 추정된다.

주피장자가 착용하고 있는 복식인 금동제 관모와 관장식, 순금제 귀고리, 은제 허리띠, 은장식 고리자루큰칼 등은 이 고분의 주인공이 압독국(押督國) 또는 압량소국(押梁小國)의 지배세력인 간층(干層, 지배자)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또 가는고리 귀걸이를 착용한 점, 고리자루큰칼을 포함한 큰칼 3자루가 함께 부장된 점으로 보아 주인공의 성별은 남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딸린덧널에는 큰항아리(대호, 大壺), 짧은목항아리(단경호, 短頸壺), 긴목항아리(장경호, 長頸壺), 굽다리접시(고배, 高杯) 등의 다양한 토기류가 빈틈없이 가득 채워진 상태로 출토되었고, 금동제 말알장, 철제 발걸이 등의 말갖춤(馬具類)을 올려 부장하였다. 또 딸린덧널의 서쪽 묘광 가장자리에서는 따로 부장된 많은 제사용 토기류와 금동제귀고리를 착용한 순장자로 보이는 또 다른 인골 1구가 확인되었다.

이번에 발굴된 임당 1A호분은 도굴되지 않고 고분 축조당시의 유물 부장상태 그대로 조사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다양한 종류의 금공품과 토기자료, 어린이 순장인골 확인 등을 통해 삼국 시대 상장례와 순장풍속 등 고분문화와 지역 역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사적 제516호로 지정된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은 삼국 시대 신라의 지방 세력이 축조한 고총으로 구성된 고분군이다. 1982년 임당동의 고총과 1987년 조영동의 고총이 발굴되면서 문헌 기록에 단편적으로 나오는 압독국(押督國) 지역에서 세를 이루던 지배층 무덤임이 밝혀졌다. 지난해부터 임당 1호분에 대한 구조와 성격을 밝히고 정비복원을 목적으로 한 학술발굴조사가 시작되었으며, 이제 마무리 단계에 있다.

 

▲ 임당1A호분 부곽전경 /문화재청
▲ 어린이 순장 인골 /문화재청
청재
▲ 임당1A호분 출토 금귀걸이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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