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독 출신 메르켈이 독일 총리 오른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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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 출신 메르켈이 독일 총리 오른 배경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6.18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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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의 동독 정치인을 독일을 넘어 유렵 무대에 올린 헬무트 콜

 

독일 통일의 주역 헬무트 콜(Helmut Kohl) 전 총리가 16일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 독일 총리는 “콜은 내 인생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킨 사람이었다”며 고인을 추모했다.

콜과 메르켈. 두 사람은 독일 통일과정에서 맺어진 인연이다. 메르켈은 동독에서 활동한 무명의 정치인이었다. 그가 통일 독일의 정치적 무대에서 급성장하게 도와준 사람은 콜 전 총리였고, 메르켈은 그의 정치적 여인이었다.

 

1990년 10월, 서독의 기민당(CDU)과 동독의 민주일출(DA: Demokratischer Aufbruch, 영어 Democratic Awakening)이라는 신생정당이 합당했다. 서독 기민당의 총수는 헬무트 콜 총리라는 거물 정치인이었고, 메르켈은 동독에서 이제 막 정치에 입문한 초년생이었다.

메르켈은 합당 행사를 하는 자리에서 “누가 나를 콜 총리에게 소개해줄 사람이 없소”라며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당돌한 여성이었다. 누군가가 줄을 대어 메르켈을 콜 총리에게 소개했다.

노회한 정치인과 정치 초년생의 만남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보았다. 그들은 장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메르켈은 첫 대면에서 콜 총리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다음달인 11월 콜은 그녀를 총리 관저로 초대해 12월에 있을 총선에 나가라고 권유한다. 그리고 다음달 총선에서 메르켈은 동독지역인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에서 하원 의원에 선출된다.

그는 초선이지만 콜 총리의 배려로 독일 정치사에서 가장 어린 나아에 여성장관에 임명된다. 우리나라로 치면 여성가족부 장관이다. 여기서 메르켈의 정치인생이 출발한다.

 

▲ 1991년 메르켈이 헬무트 콜 내각에 최연소 여성가족부 장관으로 일할 당시. /위키피디아

 

메르켈은 1954년 7월 17일 서독 지역인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호르스트 카스너는 동독 출신이고, 어머니 헤어린트 카스너가 함부르크 출신이다. 아버지는 함부르크에서 신학공부를 한 목사였다. 그는 메르켈이 태어난지 50일 후에 동독에서 목사가 필요하다는 교단의 요구를 받아들여 가족과 함게 곧바로 동독의 조그마한 농촌으로 떠났다. 이때까지만 해도 베를린 장벽이 쳐지지 않았고, 독일은 패전국으로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등 4개국에 의해 분할통치되고 있었다. 하지만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설치되고 가족은 동독에 눌러 앉았다.

공산주의 동독은 종료를 억압했다. 많은 목사들이 중도에 직업을 그만두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견디어 냈다.

메르켈은 고등학교 때 러시아어에 능했다. 15세때 학생대표로 러시아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당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로부터 러시아어 실력에 극찬을 받기도 했다.

목사의 딸은 대학 진학이 거의 불가능했지만, 아버지의 정치적 중립성과 노력 덕분에 라이프찌히 물리학과에 입학했다. 사회 인문 계열은 신분상 입학이 허용되지 않았다. 메르켈은 물리학도로선 뛰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석사과정이 끝나기 전인 1977년 첫남편인 율리히 메르켈과 결혼했다. 첫 결혼은 4년만에 끝났다. 남편이 내성적이어서 그녀의 그릇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날 메르켈은 짐을 싸가지고 나갔고, 남편은 그냥 바라보기만 했다고 한다. 자녀는 없었다.

대학을 나와 베를린에 있는 물리화학 중앙연구소(ZIPC)에 취직했다. 연구소에서의 직무는 자유독일청년연맹의 문화담당 사무총장으로, 연구소의 집회나 연주회등 행정업무를 맡아서 했다. 32세에 물리학 박사 학위를 땄지만 전공분야에서 실적을 내지 못했다. 만일 독일이 통일되지 않았더라면, 그의 인생은 이름 없이 묻혔을 것이다.

 

▲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모습들. /위키피디아

 

그러나 그에게 혜성처럼 기회가 다가왔다. 메르켈은 1989년 라이프찌히에서 벌어진 민주화 시위를 주도하거나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독일 통일의 움직임이 가팔라지면서 그는 동독 정부의 부대변인으로 TV화면에 비춰졌다. 과학계를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그녀가 선발된 것이다. 그는 물리학 연구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지만, 과학계의 대표로 정치에 입문하는데 성공했다.

그녀의 말 솜씨, 대담함은 정치라는 장소, 통일이라는 시대에 물을 만난 듯 기량을 발휘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는 동독에서 새로운 정치인을 필요로 했다. 에리히 호네커, 한스 모드로프, 에곤 크렌츠 등 동독 정치인들은 이제 지는 태양이었고,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야 할 시점이었다. 그때 갑자기 부상한 사람이 앙겔라 메르켈이었다.

30대 중반의 메르켈은 정치를 하고 싶었다. 그는 서독의 사회민주당(SPD)에 입당할 것을 생각해보았지만, 기존 정당에 들어가봐야 기득권자들의 발에 채여 성공할 가능성아 낮다고 판단했다. 동독에서 새로 만들어진 정당에 가입하기로 하고, 라이프찌히 시위를 주도한 세력이 만든 민주일출(DA)에 입당한다. 이 정당도 처음엔 서독과의 통일보다는 동독의 민주적 개혁을 통해 동서독이 독자적 주권을 행사하는 국가연합 형태를 주장했다. 어쨌든 메르켈은 1990년 봄, 연구소를 때려치우고 당의 대변인으로 맡았다. 그의 정치적 기량은 뛰어났다. 그는 동독 정부의 부대변인을 맡았고, 새정당 DA의 최고위원으로 선출됐다. 그의 선택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이 신생정당은 첫 선거에서 20%의 득표율을 얻었다. 동독 내에서 캐스팅보트를 쥘수 있는 세력이 된 것이다. 그러자 서독 집권당인 기민당(CDU)이 접근해왔다. 콜 총리의 기민당은 DA에 연정을 제의해왔고, 1990년 8월 기민당과의 당대당 통합이 이뤄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콜 총리는 통일을 서둘렀고, 그러자니 동독의 떠오르는 별과 손잡아 정치를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메르켈은 통일을 협상하는 과정에서 동독 대표단으로 활동했다. 그러면서 콜 총리와의 만남을 갖게 된다.

 

▲ 2010년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헬무트 콜 전 총리 /위키피디아

 

1990년 통일독일 총선에서 하원의원이 된 메르켈에게 콜 총리는 든든한 방패막이 되어 준다. 그는 ‘콜의 여인’이라 불리웠다. 메르켈도 살아있는 콜을 자신의 모델로 삼았다. 최연소 여성장관에 이어 1991년 12월 메르켈은 기민당 전국 부대표로 선출되었다. 콜의 지원도 있었지만, 흡수당한 동독의 지분을 한껏 활용한 것이다. 이어 콜 총리의 두 번째 내각에서 환경부 장관을 맡았다.

1998년에 기민당이 총선에서 패배하면서 사무총장에 선출된다. 그해 12월 메르켈은 동독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화학과 교수 요하힘 자우어(Joachim Sauer)와 두 번째 결혼을 한다.

메르켈도 콜 전 총리와 불화의 시기가 있었다. 1999년 콜 전 총리가 비자금 스캔들에 휘말리자 콜 수상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며 당수직 사퇴와 정계 은퇴를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이 일로 콜의 영향력으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이루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틈이 벌어졌다. 물론 후에 메르켈이 콜은 화해했다.

2000년 4월 마침내 기민당 최초의 여성 당수 겸 원내총무가 되었고, 2005년 9월 총선에서는 기민당과 기독교사회연합을 이끌어 집권 독일사회민주당(SPD:사민당)에 박빙의 승리를 거두었다. 그해 10월에는 기민당과 기독교사회연합, 좌파 성향의 사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데 성공하면서 독일 총리로 선출됐다.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 동독 출신 첫 총리, 독일 최초의 과학자 출신 총리로서 메르켈은 독일을 넘어 유럽의 리더로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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