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공화국 비화> 리비아 대수로공사 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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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공화국 비화> 리비아 대수로공사 수주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5.19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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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 값 인하 종용에 동아건설 최원석 회장 “고수”

 

동아건설은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원자력발전소 건설 뇌물 수수사건, 성수대교 붕괴사고 등으로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부실공사와 공사부정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면서도 세계 제일의 토목건설업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회사이기도 했다.

그 자부심이란 리비아 대수로 1단계 공사를 성공리에 마무리했고, 2단계 공사를 진척시켜 나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1989년 동아건설이 따낸 리비아 대수로 2단계공사는 6공화국 기간은 물론 경제발전사에서 가장 큰 해외토목공사 수주였다.

어느날 갑자기 다가온 동아건설의 수주소식은 국민들을 설레게 했지만, 그 업체의 협상 실무자들에게는 지루하고 초조한 나날들이었다.

리비아 대수로공사는 카다피 대통령이 정치 생명까지 걸고 추진하는, 사막을 녹지로 만들기 위한 녹색혁명이었다. 사하라 사막에 매장된 풍부한 지하수를 파이프로 연결해 지중해 연안까지 끌어내는 엄청난 대역사였다. 동아건설은 ‘별다섯개’, ‘무궁화’ 등 암호전문까지 동원하며 2년 5개월에 걸쳐 극비작전을 방불케 하는 수주작전 끝에 21개국 72개 업체를 제치고 1983년 11월 1차 공사를 따냈다.

그러나 1차 공사 시공자라고 해서 2차 공사에서 특별한 이점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국제경쟁입찰이었기 때문이었다.

리비아 대수로 2단계 공사 수주전은 1985년 6월 25일 리비아 대수로공사 관리청(GMRA)이 세계 굴지의 건설업체들에게 사전자격심사(PQ) 초청장을 발송하면서 시작됐다. 초청된 한국업체로는 동아건설과 대우·현대·대림·삼성·한양·삼환·한진등 8개사였다. 외국사까지 합쳐 21개국 72개 업체가 참여했다.

이 중 사전심사를 거쳐 최종 입찰에 참가하게 된 업체는 한국의 동아·대우·현대를 비롯해 프랑스·인도·영국 각 1개업체, 프랑스와 소련의 컨소시엄 1개등 5개국 7개업체로 압축됐다.

당초 1986년 4월로 잡혀 있던 입찰이 몇 차례 연기된 끝에 1987년 4월 6일에야 마침내 본격 입찰이 시작됐다. 그로부터 발주처와 입찰 참여 희망업체 사이에 오가는 협의가 2년여 지루하게 진행됐다.

최원석 회장을 비롯, 동아그룹 임직원은 그 2년을 초조하게 보내야 했다.

마지막까지 남은 업체는 프랑스의 듀메즈사와 인도의 컨티넨탈사. 프랑스는 서유럽 국가들에서 고립돼 있는 리바아의 국제정치적 지위를 바꾸는 외교활동을 벌이는데 앞장서겠다며 프랑스 특유의 국가차원의 로비를 벌였다. 인도의 컨티넨탈사는 마지막 제시가격이 동아보다는 몇억 달러나 낮았다. 인도의 값싼 노동력을 등에 업은 덤핑 가격이었다. 둘 중에 끝까지 경쟁상대가 됐던 업체는 컨티넨탈사였다.

1989년 7월초 최원석 회장은 런던에 가 있었다. 리비아 대수로 2단계 공사수주 마지막 협상을 진두지휘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인도의 컨티넨탈사는 27억 달러를 제시했고, 동아건설이 제시간 가격은 36억 달러였다. 1단계 공사를 맡고 있던 동아건설은 파이프 생산공장을 새로 짓지 않고 기존의 공장에서 2단계 공사에 들어가겠다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인도 회사는 새로 공장을 짓는 조건으로 가격을 제시했다.

파이프 생산공장을 하나 건설하는데 최소한 5억 달러가 들어 공장건설에만 최소한 10억 달러가 드는데 컨티넨탈사가 동아건설보다 싼값을 제시했으니, 국제입찰에서 경쟁이 될리 만무했다. 인도로 낙찰될 것은 기정사실처럼 됐다. 심지어 컨티넨찰사는 거기서 더 깎을수 있다고 나왔다.

인도가 그렇게 덤핑공세를 해오자, 리비아측이 오히려 당황해서 입찰 중단을 선언하고 나섰다. 입찰 중단이 선언된 후 인도는 정부가 앞장 서서 로비를 했다. 부수상과 장관, 그리고 각료급 인사 4명등 모두 6명이 리비아를 방문해 “인도엔 핵기술도 있다”며 리비아측을 설득했다. 리비아측은 동아에 “어떻게 하겠는가. 최종 가격을 제시하라”고 입찰가를 낮출 것을 요구했다.

서울 본사에 있던 최원석 회장과 최재영 리비아 본부장 사이에 매일 암호 전화가 오갔다. 그러나 최 회장은 “대답을 최대한 연기하라”고 할 뿐, 뾰족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았다. 7월말이 되자 리비아측은 다시 가격협상을 시작하겠다고 통보했다.

동아로선 달리 도리가 없었다. 공사수주를 포기하는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최 회장은 며칠을 고민한 끝에 리비아 현지에 전화를 걸어 암호 지시를 내렸다.

“한푼이라도 더 깎아 달라면 포기하라.”

최 회장은 “그룹이 사느냐 죽느냐 기로에 서 있는데, 그때 심정은 아무도 이해를 못할 것”이라며, 전화를 하고서도 잠을 자지 못했다고 당시 심정을 회고했다.

 

▲ /그래픽=김송현

 

36억 달러 응찰, ‘27억 달러’ 눌렀다.

 

그러나 절망의 순간도 일순간, 희망이 들려왔다. 8월초 최 회장은 리비아의 최재영 본부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회장님, 인도로 가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결정적인 반전의 기회는 8월초 아즈다비아에서 있는 1차 공사 예비통수식이었다. 리비아혁명 20주년을 맞아 정식 통수식을 앞두고 그동안 묻은 관을 통해 진짜 물이 나오는가 시험가동을 하는 행사였다.

 

▲ 리비아 대수로공사 통수식/동아건설 사이트

 

당시 정황을 최 회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사막 한가운데 지표면 저 아래서 나온 샘물이 장장 400km, 높이 10m, 저수량 400만톤의 아즈다비아 저수조에서 콸콸 쏟아지니까 그 사람들이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리비아인들은 물 없는 사막에서 물이 곳 신이었습니다. 리비아의 부족장과 정부 지도자들이 그 광경을 보면서 엄지 손가락을 위로 치켜올리며 ‘세리카 동가’를 외쳤다고 합니다.” (‘세리카’는 리바아 말로 회사라는 뜻이고 동아건설의 영자표기안 ‘DONGAH’를 리비아 사람들은 ‘동가’라고 읽었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동아건설 직원은 대수로공사 관리청의 수석위원인 시알라라는 사람으로부터 “동아가 최고다. 인도는 물론이고, 다른 회사 아무도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얘기를 들었다. 그 직원이 상급자에게 그 이야기를 전했고, 최 회장이 그 소식을 보고받은 것이다.

서울 시각 8월 7일 새벽 3시, 현지시각 8월 6일 밤 8시. 최 회장은 그 소식을 듣고 협상을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며칠을 고민한 끝에 협상팀에게 암호전화로 최종가격을 내려줬다. 8월 7일부터 협상은 재개됐다.

협상을 재개한지 1주일 후인 8월 15일 리비아측은 갑자기 “87년 4월 6일 실시한 대수로 2차공사 국제입찰을 무효로 한다”며 입찰 중단을 선언했다. 동아측은 처음에는 영문을 몰라 당황했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사실상 동아건설에 2단계 공사가 떨어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공개경쟁 입찰에서 수의계약 입찰로 전환된 것이고, 동아에 공사를 준다는 뜻이었다.

1989년 8월 31일 역사적인 가조인이 체결되고 나서야 공사현장은 축제분위기에 휩싸였다. 공사규모 53억1,000만 달러로 인류 역사상 최대의 토목공사가 한국의 동아건설에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동아가 리비아 대수로 2단계 공사를 따내고 최원석 회장은 리비아의 권력실세인 카다피와 보통 친분이 아니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에 대해 최 회장은 스스로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그 분(카다피)은 녹색 혁명을 수행하려는 정치가이고, 나는 그들과 계약을 맺어 대수로공사 건설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리비아는 정경분리가 철저히 돼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정치가인 카다피가 대수로공사등 구체적인 사안에 큰 영향을 끼칠수가 없어요. 물론 사후에 보고받고 추인은 하겠지요. 언젠가 카다피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대단한 환대를 받으며 한국 업체에 공사를 주지 말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대수로공사를 계속 우리가 맡은 것은 정경 분리가 철저했기 때문입니다.”

1990년 2월 4일 동아건설은 뱅가지의 망구시 장관실에서 2단계 공사에 관한 정식 계약을 체결하고 곧바로 공사에 들어갔다.

 

▲ 공사현장 /동아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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