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수 에세이] 남들을 선하게 대하면…
상태바
[조병수 에세이] 남들을 선하게 대하면…
  • 조병수 프리랜서
  • 승인 2017.05.15 16: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벤토리 체크로 본 세상 사는 방법

 

[조병수 프리랜서] 영국의 임차주택은 대개 가구나 비품이 딸린(furnished) 것이므로, 상호간에 이를 사전에 점검하는 절차가 필요했다. 보통 입주하는 날에 중개회사측에서 나와서 집안에 있는 가구와 그릇 등 모든 물건의 상태를 점검하고 목록을 만들어서 상태를 기록하는 재물조사(inventory check)를 하는데, 매우 철저하게 진행된다.

그리고 임차계약이 종료될 때 다시 그 재물조사 목록(inventory check list)를 기준으로 점검해서 손상부분이 있으면 임차보증금 성격의 예치금(deposit)에서 공제하게 되니까, 임차인 입장에서는 입주점검 때 결점을 최대한 찾아내어 지적해두는 것이 유리하다.

처음 시작한 런던생활이 1년 반쯤 지났을 때, 집주인이 들어와서 살아야겠다며 집을 비워 달라고 해서 다시 재물조사를 하게 되었다. 마치 군대에서 내무반 사열 받는 것처럼 집 전체를 닦고 청소하며 비품 수를 맞추고, 카펫세탁전문업체에 의뢰해서 바닥 러그(rug)까지 말끔히 세탁을 마쳤는데도 왠지 마음이 가뿐하지는 않았다.

만년필 촉이 열린 채 거실바닥에 떨어지면서 생긴 조그만 잉크자국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었고, 딸 아이가 놀다가 찢은 침대 옆 벽지를 그냥 붙여 둔 것도 은근히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 사진=조병수

 

둘 다 많은 비용이 들거나 크게 문제될 만한 사안은 아니라고 생각되었기에 나름대로 성의를 다해서 세탁과 청소를 해두었는데, 조사원은 영락없이 그 잉크자국과 벽지 문제를 짚어내었다. 휙 한번 둘러보면서도 그 조그만 티끌들만 잡아내길래 ‘참 대단하다’ 싶었다.

그런데 문제는 집 주인에게서 날라온 편지를 보는 순간이었다. 벽지수리와 바닥 러그 교체로 예치금을 돌려 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한달 반 치 월세에 해당하는 약 700파운드(8~900,000원)정도였던 것 같은데, 30여년 전의 가치로는 적지 않은 돈이었다.

그런데 종이벽지 20cm정도 찢어졌던 것과 1mm정도의 희미한 잉크자국 때문에 그런 큰 돈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건축자재 파는 곳에 가봐도 그 정도의 벽지는 몇 파운드 하지도 않았고, 바닥의 러그도 정말 얼마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니 작은 방 전체 벽지를 교체하고, 거실바닥 러그를 통째로 바꾼다고 하더라도, 기껏해야 백 파운드면 쓰고도 남을 것이었다.

그래서 야근을 마치고 자정 무렵 귀가해서는 밤을 꼬박 새우며 장문의 편지를 써내려 갔다. “도대체 벽지 한 장이 얼마나 하길래 그 많은 돈이 들며, 조그만 거실에 있는 러그 한판이 얼마길래 그렇게 많은 돈을 요구하느냐? 수리비용 명세와 견적을 보여달라.”

그리고 시장가격에 기초한 예상비용과 그 정도의 감가상각을 감당할 만한 월세를 지불한 사실을 들면서, “터무니없는 주장을 철회하고 예치금을 돌려달라”고 했다.

며칠 후 답신이 왔는데, “한 푼도 돌려줄 수 없다. 더 이상 이야기하면 사무변호사(solicitor)를 통해서 법적 절차를 밟겠다”고 씌어 있었다. 몇 십 파운드면 충분할 수리비를 핑계로, 예치금을 통째로 떼어 먹으려는 심산이었다.

정말 마음 같아서는 법적 절차를 통해서라도 끝까지 따져보고 싶었지만, 잘못하다가는 추가비용만 더 들어갈 수도 있겠고, 흘러 넘치는 일 속에서 사적인 일에 매달릴 여유도 없겠기에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현지의 문화와 법률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방인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는 안타까움이 남는 기억이기도 하다.

그 후로 집주인이 어떻게 해 놓고 사는지 궁금해서 그 집 부근을 일부러 둘러 보았다. 저녁 무렵 불이 켜진 집 앞을 지나가면서, ‘저렇게 남한테 각박하게 하고 살면 마음이 편할까?’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사는 것은 아니었다. 그 다음에 살던 서비튼(Surbiton)의 집주인은 너무나 점잖은 분이었다. 서울로 돌아오기 전날, 재물조사 겸해서 주택을 살피러 먼 길을 달려온 노부부는, 집안을 깨끗이 청소해둔 것에 매우 흡족해 하면서 온화한 미소를 머금었다.

세상을 사는 방법이 이렇듯 극명하게 다른 경우를 먼 이국 땅에서 체험하고 돌아온 셈이다.

조엘 오스틴 목사의 저서 『최고의 삶(It’s Your Time)』에는 “진실하게 살고, 베풀고 섬기고 남들을 선대(善待)하면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도록 임할 것”이라는 표현이 있다. 일찍이 체험하게 된 이 경구(警句)의 의미를, 세월의 고비마다 쉽게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나의 모습을 다시금 돌아다본다.

 

▲ 사진=조병수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