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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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기린다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5.11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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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남양주 덕혜옹주·의친왕묘 개방…16일부터

 

지난해 여름 손예진 주연의 영화 「덕혜옹주」가 관객 550만명을 돌파하며 흥행에 성공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영화 속 덕혜옹주는 실제와 다른 내용이 많아서 실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면 실제 덕혜옹주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 덕혜옹주 /문화재청

 

문화재청은 오는 16일부터 ‘남양주 홍릉과 유릉(사적 제207호)’ 내 ‘덕혜옹주묘’와 ‘의친왕묘’를 국민에게 전면 개방한다.

문화재청은 영화 상영으로 덕혜옹주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져 지난해 9월부터 11월까지 묘역을 임시 개방한 바 있다. 올해는 올해 대한제국 선포 120주년을 맞아 관람로와 편의시설을 정비하여 전면 개방을 하게 되었다. 다만, 겨울철인 11월부터 2월까지는 관람객의 안전과 관람편의 등을 고려하여 개방하지 않는다.

 

▲ 덕혜옹주 묘 /문화재청

 

고종 임금에게는 9남4녀의 자식이 있었지만 장성할 때까지 살아남은 자식은 순종, 의친왕, 영친왕, 덕혜옹주 4명뿐이다. 명성황후는 4남 1녀를 두었지만 순종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모두 태어나자마자 죽었다. 순종도 몸과 정신이 병약한 분이었다. 아기를 낳을 욕심으로 명성황후가 여러 가지 한약과 효험이 좋은 약들을 많이 지어 먹어서 그렇다는 얘기도 있다.

1912년 5월 25일, 경운궁에 아기울음소리가 크게 울렸다. 나라를 잃은 음울한 기운이 경운궁에 깔려있을 때, 60세인 고종의 고명딸이 태어난 것이다. 을미년 참화로 명성황후를 잃고 1911년 실질적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했던 엄황귀비마저 먼저 보내야 했던 고종이 할 일 없이 이 궁녀 저 궁녀를 보아오다가 키크고 얼굴 이쁜 양귀인을 만나 아기를 낳았다.

이에 고종은 양귀인을 福寧堂으로 봉하고 옹주를 <봉령당 아기씨(阿只氏)>로 부르게 되었다. 덕혜(德惠)라는 이름을 받은 것은 한 참 후의 일이다.

나라를 잃어버린 군주로서의 죄책감과 텅빈 궁궐에서 아무 할 일도 없던 폐위군주 고종에게 덕혜옹주의 탄생은 삶의 근거요 희망이었다. 그것은 만백성의 꿈이었다. 고종은 왕의 체통도 잊은 채 산후조리와 수유에 힘들어하는 복령당 양씨와 변복동 유모의 불편함도 잊은 채 조석으로 아기를 보러 다녔다. 급기야는 본인의 침전인 함령전으로 아기를 데려왔다.

그 후 4살 때에 일본인 교사를 채용하고 여러 대신들의 자녀7, 8명을 불러 모아 유치원을 개설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유치원이 아닐까? 어린 나인들과 유치원동무들은 덕혜옹주를 아기씨로 부르며 극진하게 따라다녔다고 한다. 옹주는 침전인 함녕전에서 아무나 탈 수 없는 4인교 가마를 타고 오직 현자만 출입다는 유현문(唯賢門)을 지나 준명당으로 매일 등교했다. 고종은 여느 아버지들처럼 덕혜옹주의 준명당에서 펼쳐지는 덕혜의 재롱잔치를 보며 망국의 한을 달랬다.

그런데 이 모녀에게 역사의 격랑은 피할 수 없는 것인가! 어린 덕혜의 버팀목인 고종이 1919년 1월 원인도 모르게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 후 거처를 경운궁에서 순종이 계신 창덕궁 관물헌으로 옮겼다. 3년상을 치르고 소학교 2학년에 편입하는데 지금의 충무로 극동빌딩자리에 있었던 일출심상소학교이다.

진고개라 불리는 충무로 지역은 일인들의 주거지였다. 지금의 세종호텔 지역이 진고개였는데 인왕산이 바위산(骨山)인데 반하여 남산은 흙산(土山)으로 비가 오면 땅이 질어 진고개라 하였다. 이곳이 임진왜란 때부터 왜군들이 거주하여 왜성대라 불렀으며 임오군란이후부터 일본인들의 주거지가 되었다.

이곳에 일본인 자녀들을 위한 소학교가 개설되어 있었다. 덕혜는 시와 음악에 남다른 재주를 보였다고한다. 많은 동시를 지었는데 그 동시에 일본의 저명한 작곡가 구로사와다카토모(黒澤隆朝) 등 최고의 작곡가들이 곡을 붙여 동요가 되어 아직까지 전해온다고 한다. 그 동시 중에 한 가지를 소개한다.

 

모락모락 모락모락 /검은 연기가 하늘궁전에 /올라가면 하늘의 하느님 /연기가 매워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고 있어

 

이때 덕혜를 만난 한 동요 작곡가는 덕혜옹주에 대해 “총명하고 기억력 좋은 고아하고 단아한 자태에 놀랐다”고한다. 시의 여왕으로까지 불리며 일본에서도 명성을 떨치던 덕혜옹주에게 시련이 닥치는 것은 소학교 6학년 때인 1925년 일본의 학습원으로 유학을 가면서부터이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병탄하면서 2가지의 큰 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첫째는 국가의 존엄인 왕의 궁궐을 훼파(毁破)하는 것이요. 조선의 황족을 일본의 황족이나 화족과 결혼시켜 혼혈화(混血化)하는 것이었다.

영친왕 이은을 비롯하여 의친왕의 2아들 이건, 이우가 이미 일본에 볼모성 유학을 가 있는 상태에서 이제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마저 일본의 황족과 화족의 자녀들만 보내는 여자 학습원에 보낸 것이다.

 

민족의 고난은 왕족도 비껴가지 않았다. 망한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일개 범부에서 왕에 이르기까지 절절한 고통 속에서 살아간 흔적이 역사에 남아 있다. 이를 바라보는 후손들의 가슴이 아리어 올 뿐이다. 특히 국가의 정체성의 상징이요 國本 자체인 황실가의 자손들은 아무런 의사결정도 하지 못한 채 승리국의 조종한대로 살아갈 뿐이었다.

 

▲ 쇼 다케유키와 덕혜옹주의 결혼식 사진 /문화재청

 

일본에 유학을 갔다고는 하지만 어디 그게 유학인가? 볼모로 잡혀간 것이다. 결혼은 철저히 일본의 황족, 화족계급에 한하여졌다. 혼혈정책이다.

엄밀히 말하면 유학과 결혼이라는 미명아래에 저질러진 기만과 인권유린이었다. 그들은 자기도 모르게 일본화되어 정체성을 상실해갔으며 막연한 불안 속에서 생명이 서서히 소진되어갔다.

이들에게 왜 민족을 위해 저항하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너무 가혹한 것이다. 가련한 소녀 덕혜옹주의 이야기를 풀어 보자.

 

1925년 동경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은 덕혜는 이복오빠인 영친왕의 근처의 집에서 생활한다. 일본에서의 생활은 차츰 안정되어 갔다. 일본의 최고 상위층이 다니는 여자학습원은 황족이나 화족의 자녀들만 다니는 고급학교였으며 조선에서 딸려온 시녀들의 시중 속에서 학교 성적도 최우등권 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연이은 혈육의 죽음은 이역 땅에서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마음의 짐이었을 것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자신을 사랑한 친아버지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 아버지를 보내고...

이복 오빠이지만 친아버지처럼 섬겼던 순종마저 떠나버리고 마음이 지쳐갈 무렵인 1929년 늦가을, 홀로 된 어머니 복령당 양씨의 죽음은 어린 덕혜가 지고가기에는 너무 벅찬 아픔이었다.

마음의 병이 깊어 가는 것인가? 친구들의 증언에 의하면 덕혜는 등교시 항상 보온병에 물을 넣어 다녔다고 한다. 고종의 독살설 등으로 아마 적국인 일본에서 생활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음식에 독을 넣어 죽일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고 한다.

덕혜의 행동이 이상반응을 보이기 시작한다. 흔히 조발성 치매라고 하는데 일종의 정신분열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몽유병환자처럼 자다 일어나 걷기도 하고 급우들과의 대화가 없어졌다.

어느덧 나이는 스무살이 되어 가는데..

이때 덕혜의 결혼설이 각종 매체에 자주 등장한다. 일본의 11황족인 산계궁 등마왕이라는 황족인데.. 어떤 이유인지 결혼은 성사되지 못했다.

아마도 신랑측에서 조선의 황녀와의 결혼을 거부하지 않았을까하는 추측이 있다.

그 이후 새로운 혼처로 등장한 것이 대마도 번주의 후예인 쇼 다케유키 (宗武志)이다. 황족은 아니었으나 대마도는 조선과 가까워 조선인에 대해 잘 아는 섬이었고...

 

결혼 이듬해에 딸 정혜가 태어날 때 까지는 병세가 많이 호전되었다. 하지만 그 후에 아무런 기록이 없어 어떤 상황을 겪었는지 사실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세간에 알려진 대로 남편이 못났거나 무식했다거나 하는 것은 잘못 전달된 것이다.

세월이 깊어갈수록 덕혜의 마음의 병은 깊어가고 남편의 사랑이 덕혜를 치유하기에는 병이 너무 깊어만 갔다. 딸 정혜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더욱 없다. 아마 조선황녀인 엄마와 일본 화족인 아빠 사이에서 방황하지 않았을까하는 추정이 있을 뿐이다.

 

결국 딸 정혜는 장성하여 결혼 후 1년 남짓 지나서 자살하러 나간다는 메모만 남긴 채 역사의 그늘로 사라졌다. 이때는 이미 덕혜는 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정신분열증으로 일본의 외곽에 있는 정신병원에서 생활할 때이다. 결혼생활을 계속 할 수 없고 2차 세계대전으로 황실과 화족에 대한 지원이 끊긴 상황에서 남편도 더 이상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힘들어, 이혼 후 정신병원에 감금된 것이다.

 

▲ 덕혜옹주 귀국사진 / 문화재청

그 후 덕혜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서울신문 김을한 동경특파원을 통해서다. 한때 어린 덕혜를 일본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 고종의 시종인 김황진의 조카인 김장한을 덕혜의 신랑감으로 내정했었다고하는데.. 그 김장한의 형이 김을한이다.

<덕혜옹주가 누구요?> 516군사정부가 들어섰을 때 김을한기자의 말에 박정희가 한 질문이다. 군사정부에서 가뜩이나 정통성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조선황녀에 대한 혁명정부의 배려는 국민에게 호감을 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1962년 드디어 37년 만에 덕혜가 김포공항을 통해 돌아왔다. 아무 말도 못하는 모습으로..

그녀를 맞이해준 사람은 어릴 때의 유모 변복동할머니와 함께 준명당에서 유치원 생활을 했던 소꿉친구들...

덕혜옹주가 아닌 대한민국 국민 이덕혜 이름으로..

일본 유학시 승리국 일본인들이 환영한 것과 마찬가지로 해방을 맞이한 대한민국 국민의 환대는 큰 것이었으나 덕혜는 이것을 누릴 줄 모르는 장애인이었다. 1989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숨을 거뒀을 때 같은 처지의 이방자여사가 한 말이 가슴을 친다.

 

▲ 초라한 회갑연 사진 /문화재청

 

<어서 눈을 뜨세요. 지금 죽기에는 인생이 너무 슬퍼요>

돌아갈 때까지 단 두 가지의 말만 할 수 있었다. <싫어!>와 <정혜>

<싫어!> 무엇이 싫다는 것인가? 적국 일본에서의 화려한 생활보다는 소박한 조국에서의 삶이 그리웠을까?

<정혜> 한 점 혈육 딸 마사에. 정혜에 대한 그리움이 병을 키워갔을까?

마음속에 가득 찬 외로움과 그리움을 안고 살다간 덕혜옹주의 슬픈 목소리가 경운궁 준명당에 울려 퍼지는 듯하다.

 

▲ 덕혜옹주 영정사진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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