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때 제압한 오량합(올량합)…오랑캐의 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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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때 제압한 오량합(올량합)…오랑캐의 어원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5.02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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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사용하는 오랑카이와는 다른 동여진의 부족

 

조선왕조실록에 태조 이성계가 7월 17일(음력) 개성 “임금이 수창궁에서 왕위에 오르다”고 적었다.

그로부터 두달후인 9월 11일 기록에,

“임금이 조회를 보았다. 유구국의 사신과 오량합의 사람들이 조회에 참여하였다. 유구국의 사신은 동반 5품의 아래에 자리를 잡았고, 오량합은 서반 4품의 아래에 자리를 잡았고, 그 종자들은 6품의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유구국에서 방물을 바치었다.” (上視朝 琉球國使吾良哈人等參朝 琉球位於東五品之下 吾良哈位於西四品之下 其從者位於六品之下 琉球獻方物)고 했다.

여기서 유구국은 지금 일본 오키나와현에 나라를 세웠던 류큐국(琉球國)을 의미한다. 그러면 오량합(吾良哈)은 어디일까.

조선왕조실록엔 오량합(吾良哈) 또는 올량합(兀良哈)이라는 표현이 혼재해 나타난다. 오량합이란 표현은 조선 전기에 주로 나오고, 올량합은 전기와 후기에 걸쳐 고루 나온다. 사학자들은 두 표현 모두가 같은 의미이고, 조선 북방에 거주하는 여진족의 한 부족으로 동여진을 지칭하는 것이라는데 이견이 없다.

조선왕조실록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오량합의 기록은 나라가 개국되고 처음으로 사신들이 찾아와 조회에 참여하는데, 여진족 사신이 유구국 사신보다 높은 위치에 놓여 있었음을 알수 있다.

그렇다면 유구국은 문신인 동반에, 여진은 무신인 서반의 줄에 서 있게 한 것은 무슨 뜻일까. 유구국은 일찍이 고려에서 불교 문화를 받아들이고 중국에서 유학을 받아들여 중국식 직제와 예절을 갖추었다는 점에서 동반에 넣었고, 여진은 조선에 예의를 갖췄지만 고려 이래로 국경제서 자주 무력충돌을 해왔기 때문에 서반에 넣은 것이 아닐까.

조선초기엔 오량합 또는 올량합은 조선에 복속해 토산물을 조공으로 바치고, 이에 조선 임금이 의복등 하사품을 내려준 기록이 있다.

하지만 세종때에는 오량합이 함경도와 평안도 국경지대를 침범해 조선인을 살해하고 약탈하기도 했고, 이에 조선왕실은 범인을 색출해 참수하기도 하거나, 군대를 보내 오량합을 영토밖으로 몰아냈다.

세종 17년 1월엔 오량합이 2천7백명의 기병을 이끌고 평안북도 여연성을 포위했다. 이에 군수 김윤수등이 군인을 인솔하고 성위에서 대치하며 싸워 적 90명과 60여필의 말을 쏘아 명중시키니, 적들이 후퇴했다.

이 무렵 압록강 두만강 주변에 오량합 이외에도 홀라온(忽剌溫) 알타리(斡朶里) 올적합(兀狄哈) 등의 부족이 서로 내통해(연합해) 조선 국경을 자주 처들어와 약탈을 일삼았다.

이에 세종임금은 무력을 사용해 이들 여진족을 제압했다. 세종은 최윤덕과 이천을 시켜 4군을, 김종서에게 명해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에서 두만강에 이르는 현재의 국경이 확정되었다.

성종 때 신숙주 · 윤필상 등이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의 여진족을 토벌했다. 국경선이 북으로 뻗어나가자 조선은 그 지역에 백성을 이주시키는 사민 정책을 적극 실시했다. 수만의 남방 지역 민호를 북방으로 이주시키고, 토관 제도를 활용하여 민심을 수습했다.

 

거주지는 주로 두만강 유역인데, 임진왜란에서 가토 기요마사가 그 일부와 교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그래픽=김인영

 

중국에서는 명나라때 몽골고원의 삼림민족을 가리키는 말로 오랑카이(兀良哈, Uriankhai)라고 칭했다. 그러나 명나라와 조선이 한자로 공유하는 올량합은 서로 다른 민족이다. 중국에서 말하는 오랑카이는 몽골 우량카이부의 민족을 의미하고, 여진 또는 만주족을 의미하는 조선시대 올량합과는 의미를 달리한다.

올량합에서 오랑캐라는 단어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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