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명예혁명으로 본 법치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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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명예혁명으로 본 법치주의
  • 오피니언뉴스
  • 승인 2017.03.02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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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경제원 토론회, 임종화 교수 발표

<영국 명예혁명으로 본 법치주의>

- 입법기관에 의해 붕괴된 헌법질서를 되돌려 놓아야 할 때

- ‘민심’이라는 말 앞에 법과 질서가 설 자리 좁아져

- 법치주의는 감정이 아닌 ‘논리‘의 토대 위에서 구현

- 법치의 주체인 국회, 오히려 국민감정 부추기는 진원지가 돼

 

 

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은 2월 28일, 자유경제원 리버티홀에서 <영국 명예혁명을 통해 본 법치주의>를 주제로 ‘세계사를 알면 한국의 갈 길이 보인다’ 연속세미나 6차를 개최했다. 이번 세미나에서는 영국 명예혁명이 확립한 법치주의의 역사적 의의와 오늘날 한국에 주는 시사점에 관한 논의가 오갔다.

발제에 나선 임종화 교수(경기대 무역학과)는 “명예혁명은 정치·사회·경제·헌법적으로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는 시대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며 “혁명으로 현실화된 변화는 영국사회를 발전시키는 ‘자유주의’ 제도들을 만들어 냈다”고 평가했다.

임 교수는 “입법권 또는 최고의 권위는 즉흥적이고 자의적 명령으로 통치권을 행사 할 수 없다”라고 강조한 자유주의 사상가 존 로크의 말을 인용하며 “로크의 이론으로 지금의 탄핵정국을 평가한다면 이성의 부재와 민중독재의 도그마”라고 꼬집었다.

임 교수는 이어 “2017년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은 17세기 영국 명예혁명의 역순으로 바라봐야 한다”며 “입법기관에 의해 붕괴된 헌법질서와 행정부의 권한, 민간기업의 규제활동을 다시금 시장질서와 성장에 필요한 건전한 시스템으로 바꿔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임 교수는 “올바른 역사관과 사명이 분명한 시민들에 의한 책임추궁이 지속 되어야하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 1968년 11월 15일 오렌지공 윌리엄이 강한 돌풍을 이겨내고 영국 토베이를 향해 행해하는 모습 /위키피디아

 

<발 제 문>

<무혈(無血)로 성공한 세계사의 근대화, 영국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

임 종 화 경기대 무역학과 객원교수

 

서 론

자유주의의 발전은 영국 명예혁명의 역사적 맥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명예혁명을 거친 후 영국은 전통적·절대주의적 국가에서 입헌주의와 의회 제도를 주요 원리로 하는 근대 국민국가로 변화해가기 시작했고, 자유주의는 바로 그 과정에서 발전하여 혁명을 지지하고 정당화하며 나아가 그 성과의 확산에 기여했다. 영국 이외에도 근대 민주주의를 앞서서 발전시킨 서구 국가들은, 그 정도와 범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자유주의의 유산을 공유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경우 60년대부터 시작된 산업화로 고 도성장을 한 후, 이른바 1987체제로 대변되는 자유민주주의의 헌법 이념을 근간으로 개인의 권리나 관용, 권위주의 청산 및 다양성의 문제와 같은 것들이 보장받는 민주 화 시대로 넘어갔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자유주의는 다른 어떤 이념보다도 근대 민주주의 국가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따라 본론에서는 자유주의를 명예혁명의 세계 사적 맥락에서 들여다봄으로써 그 사상적 특성과 의미를 다시금 조명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명예혁명에 관한 주요 해석들을 간략히 고찰하면서 혁명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는 작업을 선행해야 할 것이므로 명예혁명을 추동한 쟁점들을 짚어보고, 애초 에 자유주의적 문제의식이 어떤 현실적 과제와 대면하는 가운데 발전해 왔는지를 밝 혀야 한다. 이를 통해 명예혁명의 정치사상이라는 견제에서 자유주의 근대 민주주의 국가의 형성에 끼친 영향을 평가하고,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법치 의 붕괴, 즉 대중민주주의의 폐해가 어떻게 헌법질서와 자유주의를 훼손하고 있는지 점검해보려 한다.

 

1. 명예혁명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

 

근대 정치사와 헌법체계의 배경을 이야기 할 때 ‘혁명’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혁명은 말 그대로 기존의 체제에 뭔가 심각한 결함이 있었 다는 의미의 주요한 연구 주제임에도 지금까지 국내에서 명예혁명에 관한 법치 주의 적 해석은 그리 많지 않다. 이는 비단 국내의 연구 자료의 한계만이 아닌 당사국인 영국을 비롯해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하다. 이유는 명예혁명을 해석하는 접근방법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문제들이다.

 

통상적으로 명예혁명은 1688년 6월 30일 4명의 휘그(Whig)당의 주요 인사와 3명의 토리(Tory)당 지도자가 연대하여 네덜란드의 오렌지(오라녜)공 윌리엄에게 영국의 상황에 대한 무력 개입을 요청하는 비밀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시작해 같은 해 11월 윌리엄의 영국 남서부 해안 상륙한 후 그해 12월 23일 제임스 2세를 프랑스로 내쫓고 1689년 2월 오렌지공과 그의 아내 메리의 공동 즉위 및 2월 19일의 이른바 〈권리 선언, (Declaration of Rights)〉 제출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을 지칭한다.

명예혁명 을 특정 짓는 ‘명예롭다’는 칭호는 당대부터 이미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그 때의 명예로움이 특별히 무혈성을 강조한 것이라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즉 1685년 왕위에 오른 제임스 2세가 독단적으로 가톨릭(구교) 부활 정책을 펴면서 개신교(신교)와 구교간에 갈등이 심화되자, 의회의 지도자들이 네덜란드와 연합하여 영국의 새로운 왕을 옹립한 것이다.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이라고 불리는 혁명을 통해 왕권과 의회권의 분쟁이 종료되었고, 의회의 권한이 미치는 범위가 확대된 것이다.

국왕이 의회의 허락 없이 자의적으로 세금을 징수할 수 없으며, 정부의 수입, 지출, 차입 등에 대해 의회의 감독을 받아야 하는 법제화가 진행 된 것이다. 여기서 무혈 이라는 의미는 혁명에서 보인 점진적이고 온건적인 성격, 청교도 혁명→왕정복고→명예혁명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변혁에 대한 당시 사가들의 해석이었다.

 

그러나 명예혁명의 성격을 규정하는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또한 명예혁명의 기본성격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혁명 서사 자체가 상이하게 그려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명예혁명을 영국에서 오랫동안 진행되어온 왕위계승 투쟁의 중요한 단계로 규정하는 시각도 존재하고, 가톨릭(구교)와 청교도(신교)의 갈등으로 해석하는 측면도 있으며 제임스 2세의 전제권력에 대항하여 네덜란드와 연합한 영국의회의 의회권력 강화라는 측면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어떤 역사에서도 전제군주의 지배권을 이양내 지 뺏어오는 것은 쉽지 않으니 영국의 명예혁명은 세계사적으로 의미가 매우 크다.

 

2. 무혈(無血)혁명을 아쉬워(?)하는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관

 

현대적 관점에서 명예혁명의 성공은 오늘날 노동당의 뿌리가 되는 휘그(Whig)적 성공과도 곧잘 연결이 된다. 그러므로 혁명에 따른 ‘정통성’의 자리는 대부분 휘그당이 차지한다. 우리의 경우와 비교해 본다면 오늘날 세계적인 민주제도를 성공시킨 대한민국 민주화의 공을 좌파진영과 특정개인들에 의해 독차지되는 경우와 마찬가지지만, 영국의 명예혁명과 대한민국의 민주화는 의회민주주의를 향한 꾸준한 진전이라는 관 점에서 해석되어야 하는 것처럼 어느 한 진영의 정파적 활동에 그 공이 있지 않음은 너무나 당연할 것이다.

 

특히나 명예혁명을 국왕의 절대주의 대 의회 정치라는 오랜 대립 구도에서 후자의 승리를 확정한 사건으로 평가되는 휘그적 역사관의 입장은 20세기 중반까지도 독보적인 지위를 누렸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명예혁명에 대한 맑스주의적(Marxism) 해석은 이러한 휘그적 설명이 혁명의 사회·경제·법치 주의적 요인을 간과하고 역사 과정 전반을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해석함으로써 변화의 변증법을 제대로 파악하는데 실패 했다는 비판에서 출발한다.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명예혁명은 (1640년 청교도 혁명에 이은) ‘부르주아 혁명’이지만 20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이때의 ‘부르주아 혁명’ 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해석상에 차이가 존재한다.

 

명예혁명의 원인과 성격, 결과를 설명함에 있어 휘그적이고, 마르크스적인 입장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입장들 사이에서는 한 가지 공통된 배경이 발견되는데, 그것이 바로 영국의 명예혁명은 무혈(無血)혁명 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 해 맑스주의적 시각에서 영국의 명예혁명은 훗날 프랑스를 피바람을 불러왔던 프랑스 혁명과 비교했을 때, ‘혁명 아닌 혁명(Unrevolutionary Revolution)’ 으로 간주한 것이다. 특이한 것은 명예혁명을 해석하는 국내적 시각에도 명예혁명은 지도계층만 바 뀌었을 뿐 궁극적 변화는 없었다는 학술적 이론도 상당히 많다.

 

영국의 명예혁명이 무혈혁명이라고 인식되는 것은 훗날 미국 독립전쟁과 프랑스 대혁명 등을 겪으면서 보였던 무력충돌과 프랑스식 대공포정치(Grande Peur)에서 보이는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한정적의 제거와 “청산”과 “처단”이 반복된 증오의 보복정 치에 비교해서 훨씬 덜 폭력적일뿐더러 훨씬 더 제도적인 부분에서 타협을 이루어 냈 다는 의미에서 무혈혁명이고 명예스러운 사회변혁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그 당시 영국사회가 가지고 있는 전제군주제도는 분명 법치주의 적인(종교적인) 부분에서부 터 토지개혁과 경제모델 개혁의 전반적인 부분에 수정을 요구하는 시기였으며, 무엇 보다 입헌군주제를 통한 사회개혁이 분명 필요하던 시기이다.

 

3. 자유주의 헌법의 맥락으로 본 명예혁명

 

명예혁명을 보는 다양한 시각들이 공통적으로 그려내는 혁명의 첫 번째 쟁점은 ‘자유와 권리’에 관한 것임은 잘 알려져 있다. 명예혁명의 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하던 당시 제임스 2세의 직접적인 관심도 자유와 권리를 향상시키자는 문제의식은 분명 존재했다. 이러한 그의 관심이 적극적으로 표출된 것이 1687년 4월과 1688년 5월 두 차례 에 걸쳐 공포된 관용령(Declaration of Indulgence)이다. 이를 통해 그는 가톨릭교도 들의 종교적 · 시민적 권리와 자유를 향상시키고자 했다. 즉 표면적으로 제임스 2세 는 ‘절대주의’의 화신이라기보다 ‘관용’의 얼굴을 한 군주였다.

 

하지만 그가 보호하고자 한 자유와 권리는 국교도인 그의 대다수 신민들의 자유와 권리를 위협할 수도 있는 것이었고, 적어도 그의 신민들은 그렇게 믿었다. 그런가 하면 당시 제약 없는 해외 무역 활동을 추구하던 상인들의 자유는 경제적 이권 문제에 있 어 왕가가 전통적으로 누려오던 독점적 권리와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이었는데, 다른 한편 그런 상인들의 자유는 장차 그것이 확보되었을 때 특정 집단 사람들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요컨대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자유’는 ‘법적 시효나 승인에 의해 향유되는 특권 또는 면제’를 의미했고, 그런 만큼 포괄적이기 보다 배제 적이고 제한적인 성격을 지녔다.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점차 ‘인민 전체(The Whole Body of the People)’의 자유와 권리가 쟁점으로 부각되었고, 이는 자유를 보는 새로운 방식, 곧 “사적인 신념의 문제 에 있어 국가나 교회로부터 간섭받지 않을 자유”에 대한 근대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이 해와 연결되었다. 제임스 2세의 관용령(Declaration of Indulgence)은 가톨릭뿐만 아니라 청교도계 비국교도들(개신교신자들) 모두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허용했다. 따라서 애초에 그것이 오랫동안 신앙의 자유를 억압당해온 비국 교도들에게 얼마나 환영받았을지는 충분히 짐작 할 수 있다.

 

하지만 제2차 관용령이 공포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인 1688년 6월 많은 비국교 도들이, 교회에서 그 선언을 낭독하기 거절했다는 이유로 7명의 국교회 주교들을 체 포, 재판에 회부한 정부의 조치를 비난하는 국교도 들에 동조했다. 주교들이 관용령 낭독을 거부한 것은 종교적 관용에 대한 모독이기보다 시민권에 대한 옹호라고 이해 했기 때문이었다. 의회가 합의해서 제정한 법률을 왕이 폐기함으로써 종교적 자유를 보장해 줄 수 있다면, 동일한 논리로 그는 자신이 원할 때 의회에서 제정된 다른 모 든 법들도 자의적으로 바꾸거나 무효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당시 非가톨릭 구성원들의 논리였다.

즉 시민적 자유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 종교적 자유는 진정한 자유일 수 없으며, 그것을 지지하는 것은 왕의 자의적인 지배를 용인하는 것과 같다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명예혁명은 진실한 믿음을 지키기 위한 저항이라는 청교도적 전통이 시민적 자유와 권리를 유린하는 자의적 지배에 대한 저항이라는 세속적이고 자유주의적인 혁명 논리로 자연히 발전해 간 것이지만, 또한 여기서 간과하면 안 되는 사실은 당시 교회 와 의회의 유착관계와, 매우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밝은 종교 공동체의 성격을 이해 해야 한다. 이러한 군주의 자의적 지배에 대한 거부는 자연스럽게 의회주권에 대한 지지로 연결되었음은 너무도 당연하다.

 

우리에게 너무도 유명한 “왕권신수설”은 17세기 유럽의 절대적 지배 이데올로기였고, 정도가 훨씬 덜했던 영국에서 의회권한을 통한 왕권의 견제는 너무도 당연했으므로 의회가 점차 인민의 대표기관이라는 상징성을 획득해가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인민의 대표기관인 의회가 자의적으로 법을 제정 혹은 개정하거나 폐지를 집행하는 왕의 권한을 제한하고 입법권을 장악하여 주권자가 되어야 한다는 의회 주권의 쟁점은 단순히 왕의 자의적인 지배에 대한 거부를 드러내는 것만은 아니었고, 인민의 의사가 반영된 법의 지배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요구도 당연히 포함한다.

 

군사적 우세에다 자신의 영토 내에서 싸운다는 이점에도 불구하고 제임스 2세가 제대로 전쟁을 수행해보기도 전에 프랑스로 달아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그의 측근을 비롯한 영국의 주요 정치 인사들과, 지방 엘리트들이 ‘자유로운 의회’라는 윌리엄의 대의에 동참하여 대거 윌리엄 측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윌리엄이 군사적 개입을 감행 한 진짜 목적은 영국에서 가톨릭의 성장을 막는 동시에 제임스 2세가 프랑스와 가까 워지는 것을 저지함으로써 유럽의 세력균형을 확보하려는 것이었을 수 있지만 그가 군사 개입을 개시하기 전에 발표한 선언은 영국인들의 가톨릭 적이고 자의적인 정부 에 대한 반감과 청교도적 전통 및 자유로운 의회에 대한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시민적 권리와 자유, 의회주권, 법치 등 혁명의 쟁점들이 대중적 호응을 얻는데 있어 영국 사회가 경험한 공적담론 영역의 확장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혁명이 일어나기 20년 전부터 영국사회는 미묘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정보교환의 주된 장소였던 커피하우스의 존재가 그것이다. 1650년대부터 영국 전역에 걸쳐 급속도로 보급되 어 17세기 말에 이르면 런던에만 수천 개의 커피하우스가 있다고 말해질 정도였다. 그곳에서 최신정보와 뉴스들이 교환되고, 로크, 시드니, 퍼거슨 등 당대를 주름잡던 고전학자들의 저작들이 읽히며 그에 관한 논쟁이 벌어지고 보급되던 이상적인 장소를 제공했고, 당대의 언론들 또한 논쟁의 공적 영역을 확장시키는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4. 발전적 견제(?)를 가져온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전통’

 

명예혁명 전후의 맥락에서 인쇄매체들과 커피하우스의 정보공유 전통은 전제군주제가 해결해야 할 다양한 문제들을 여러 가지 자극적인 방법으로 제기하며 정치적 논쟁에 불을 붙였다. 혁명의 기운은 정치적·종교적 담론들을 통제하려는 복고 왕정의 집요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계약 정부나 인민주권, 저항권과 같은 불온한 쟁점들을 다룬 엄청난 분량의 팜플렛과 소논문, 책자들을 양산해냈다. 이 같은 공적 논의의 활성화는 영국 사회에서 정치를 궁정이나 의원실로부터 끌어내어 일상적인 것으로 만들었는데 이러한 변화가 궁극적으로 당시의 여론을 혁명에 우호적인 방향으로 바꾸고 나아가 정치적 실천에까지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혁명이 끝나가던 1689년 1월 22일에 소집된 공회의회(Convention Parliament)는 그것을 지지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공회의회에서 벌어진 열 띤 토론은 비록, “권리장전”으로 도출된 그 최종적인 형태가 애매하고 보수적인 방식 으로 제시되었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혁명의 결과 단순히 군주가 바뀐 것이 아니라 새로운 종류의 군주정이 확립되었음을 알렸고, 왕은 입법권과 특권(Prerogative)에서 의회의 제약을 받고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나가게 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러한 의회의 권한이 제대로 지켜지는 데는 10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으며, 명예혁명 이후 영국은 의회와 왕실 사이에 발전적 견제기능을 하는 역 할 역시도 생겨났다고 평가해야 옳다.

 

5. 전제군주에서 입헌군주, 농업에서 제조업: 두 마리 토끼를 잡다

 

자유주의 발전의 역사적 맥락이라는 측면에서 명예혁명의 정치경제적 쟁점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명예혁명에 대한 많은 연구들은 그 시기 영국 사회가 아직 자본주의 시대로 완벽하게 진입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최소한 중세적 가치관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평가한다. 그렇다고 해도 네덜란드와 영국의 발전사항은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다른 국가나 문명권 보다는 1세기 이상 빠른 것이었다. 이는 특히 국가를 덕성의 함양이나 종교적 구원이라는 측면에서 보다는 물질적 번영 및 삶의 질과 관련하여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윌리엄 3세는 물론 제임스 2세 또한 정치와 경제가 근대적 통치술의 핵심이며 그들 자신이 신민들의 경제적 복지를 향상시킬 책임이 있다고 믿었고 두 인물 모두 거기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다만 이 둘은 ‘근대 국가’에 대한 매우 다른 비전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당시 “태양왕”이라 불리던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성공에 크게 자극받았던 제임스 2세는 경제적 부의 원천을 토지와 농업에 두고 국왕이 절대적 권위를 가지며 정치적으로도 통일된 강력한 관료국가를 추구했었다.

 

그 반면 윌리엄 3세는 자신의 고향인 네덜란드 공화국으로부터 근대 국가에 대한 영감을 끌어와 부의 원천을 농업에서 제조업으로 바꾸고 법을 통한 재산과 종교적 관용을 보장함으로써 산업 발전의 동인을 제공하는 국가를 구상했다. 이렇듯 근대 국가에 대한 서로 다른 비전이 충돌하는 명예혁명의 과정에서 국가의 목적을 신민의 복지 또 는 물질적 번영과 관련하여 이해하는 입장이 확고히 자리를 잡아갔다.

 

그런데 국가의 목적에 대한 이러한 입장이 자의적인 통치에 대한 거부, 의회주권과 시민적 자유, 법치를 요구하는 시대적 경향과 만났을 때, 그것이 시민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통치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거나 위로부터 엄격하게 통제되는 경제 정책 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어려웠으리라는 점은 쉽게 짐작 할 수 있다. 인민주 권이나 법치 관념의 토대를 제공하면서 무르익어 가고 있던 인간의 이성과 자유에 대 한 근대적 이해는 무엇이 복지 상태이고 어떻게 번영에 도달할 것인지에 관해 단 하 나의 우월한 판단을 인정하지 않았다.

 

쉽게 말해, 명예혁명의 맥락에서 인민의 복지와 번영을 책임질 국가에 대한 구상은 더 이상 국왕의 절대적 권위나 자의적인 지배와 짝하는 것이기 어려웠다. 그리고 이 점에서 새로운 국가에 대한 구상은 인간의 노동이 부의 원천이며 재산의 사적 소유와 자유로운 경쟁은 법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연결되었다.

인간의 노동을 부의 원천으로 보는 것은 인민주권론만큼이나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명예혁명의 맥락에서 윌리엄 3세를 새로운 왕으로 지지한 세력들 가운데는 영국의 제조업 공동체와 깊은 유대 관계를 갖거나 그들 자신이 제조업자인 경우가 많았다. 인간의 노동을 부의 원천으로 인식하고 있던 이들은 제조업 부문의 희생을 감수하면서 토지를 가진 중산층인 신사계급에게 유리한 정책을 시행하는 제임 스 2세에게 불만을 가졌으며, 제임스 2세가 경제적 · 제국주의적 정책을 의회와는 무 관한 왕의 대권에 속하는 문제라고 여기는 것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결 론 1. 명예혁명의 경제적 쟁점으로 본 2017년 유력경제인 구속

여기서 다시금 명예혁명을 바라보는 맑스주의적 시각을 거론해 보자. 앞서 설명한 제임스 2세를 몰아내려했던 중산계급들은 분명 농업정책에 불만을 품고 자본의 극대화를 제도적으로 통제받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농업에 대한 이해가 없었을 뿐더러 농업을 향한 노동의지도 없던 계층들이다. 그러나 분명 그 당시 경제수요로 평가한다 할지라도 농업이 가진 그것보다 더 많은 이윤을 창출 할 수 있는 산업은 영국에 존재했 고 이들은 그것에 대한 결과를 바라던 이들이었다.

 

본인의 이해득실에 따라 지지하는 대상은 판이하게 다른데 맑스주의자 혹은 그 본인 도 영국의 명예혁명을 미완의 혁명으로 규정한 반면, 군주제자체를 폐지시킨 프랑스 혁명에 대한 그의 시각은 환호에 가깝다. 오늘날 명예혁명을 부정적으로 보는 이론들 을 종합해 보면 근본적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군주제를 완전히 폐지 시키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존재하는 듯하다. 제도권의 지배방식이야 무엇이 든, 혁명은 분명 주동세력들과 성공한 이후의 결과가 긍정적이어야 한다. 명예혁명의 그것은 영국을 농업중심 국가에서 제조업 중심국가로 탈바꿈 시키는데 성공했다

.

제조업을 기반으로 한 영국은 훗날 산업혁명을 성공시키는데 사회 인프라적 뒷받침을 해준 것이 명예혁명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영국의 명예혁명은 단순히 의회권력의 팽 창만이 아닌 “제도적 변화”를 통한 경제적 · 법률적 · 군사적 발전으로 까지 이어지는 데 완벽히 성공했다는 것이다. 혁명의 주체세력들이 철저히 효율적 변화를 창출해 내 는 성공을 했으며, 실패했을 시 명예혁명이 가진 “명예(Glorious)”라는 명예는 맑스주 의자들과 수정주의자들뿐만 아닌 모든 역사학자들에게 철저히 외면 받았을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눈부신 발전은 국민들의 열정적인 인고의 노력, 대기업의 총수들 과 그들의 획기적인 목표와 전략의 결과물이다. 광장의 촛불 주도세력들은 심심치 않 게 국민의 명예혁명, 시민혁명을 논한다. 그러면서 따라오는 슬로건들은 “핵사이다”, “분노의 호통”, “◯◯◯ 대폭발”, “혼쭐을 내다”, “◯◯◯ 처단” 본인이 가진 내면의 증오를 표현만 하면 그것은 정당성을 인정받는 기형적인 군중심리가 판을 친다. 그 뒤에 따라오는 것은 절대자 혹은 특정한 재능과 재력을 지난 대상에 대한 증오와 감 성폭력, 조선과 프랑스식 처단과 모함의 군중심리가 정의인양 포장되고 있다. 오늘날 까지도 논의되는 명예혁명과 프랑스혁명 모두 그 이면에는 경제적 효율성을 목표로 하는 대상들의 절심함과 협조가 있었다.

 

자칭 진보진영에서 논하는 프랑스혁명의 위대함도 시장에 개입하려는 제1계급에 대한 폭발인 것은 전혀 언급도하지 않고 지배대상을 “처단”했다는 유아기적 배덕 감을 보 란 듯이 드러낸다. 명예혁명과 프랑스혁명의 공통점은 모두 절대왕정시기 경제적 제 도와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여기서 자칫 대기업 총수의 체포를 이 두 혁명과 동일시 하려는 얄팍함으로 해석 할지 모르는데 그것은 정서가 불안한 어린이가 본인의 분노를 애꿎은 동물의 생명을 거두면서 해결하려는 과대망상과도 다를 바 없다.

 

대한민국은 전제군주는커녕 입헌군주국가도 아니며, 영국명예혁명이 의회권한을 확대 시키며 시장의 자율성을 철저히 보장했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영국이 명예혁명 이 후 만들려했던 구조가 완벽에 가까우리만치 보장되고 갖춰진 국가다. 명예혁명의 결과물은 경제적 팽창과 헌법의 질서를 가져왔다는 긍정적인 차 원에서 의회권력이야말로 시장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입헌군주제로 견제를 하며 허 용한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대기업의 대주주와 소액주주들 간의 의결행사 권한이 동 일시 되어있는 국가가 대한민국 말고 어떤 국가가 있는지 의문이다.많은 사람들이 新자유주의(이것도 전체주의적 표현이다)의 폐해를 말하며 영미식 경제 모델의 한계점을 열심히도 설파했다. 그러나 비판의 시작도 과정도 전부 잘못되었다. 영미식 모델은 복지의 부재가 아닌 재산권의 보호이다. 그러므로 대처리즘과 레이거 노믹스로 대변되는 경제개혁과 냉전의 종식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었음을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이다.

 

결 론 2. 입법기관에 의해 무너진 민주주의 헌법과 탄핵정국

최초의 자유주의 사상가라고 평가받는 존 로크의 『통치론』은 지금 까지 살펴본 명예 혁명의 쟁점들, 곧 종교적 관용과 시민적 자유, 인민주권, 법치의 이념과 노동가치설 및 그것을 근거로 한 사적 소유의 관념이 어우러지면서 빚어내는 근대 국민국가의 비 전을 잘 드러내 준다. 로크는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는 근거를 이성에서 찾았고, 이 점에서 자유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방종의 상태가 아니라 자신의 이성에 복종하고 그것에 의해 질서 잡힌 상태를 주장하였다.

 

존 로크에 따르면 “ 입법(국회)권 또는 최고의 권위는 즉흥적이고 자의적인 명령을 통 해서 통치권을 행사할 수 없다. 그것은 공포된 영속적인 법 그리고 널리 알려진, 권한을 위임받은 재판관에 의해서 정의를 시행하고 신민들의 권리를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에 따르면 입법부가 제정한 “공동체의 법률은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기준이자 사람들 사이에서 모든 분쟁을 해결하는 공통된 척도”이며, 그러한 법률을 집 행하는 권력은 모든 다툼을 해결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진, 널리 알려진 무사 공평한 재판관이라고 판단했다.

 

로크의 이론으로 지금의 탄핵정국을 평가한다면 이성의 부재와 민중독재의 도그마로 요약할 수 있다. 국회의 권한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명분으로 자기애적 도그마가 헌 법기관과 행정기관을 넘어 민간기업에 대한 출처불명의 분노표현 및 인신공격을 가능 하게 하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다. 본인들이 국민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그토록 설 파하는 탄핵의 대상인 대통령 역시도 국민들에 의한 직접선거의 결과물이라는 전통적 가치를 보란 듯이 붕괴시키며 자기애적 쾌감에 감성적 자위를 보란 듯이 하며 무아지 경에 빠져있는 것이다.

 

결 론 3. 국민을 핑계로 명예혁명을 더럽히지 말 것

권력기관들 끼리의 견제와 균형을 목적으로 하는 근대 헌법의 삼권분립이 권력의 집 중으로 인한 문제점에 주목하는데 비해, 존 로크는 특정 인물이나 집단이 입법권과 집행권을 모두 갖고 있는 경우보다, 공동체를 위해 법을 만드는 권한이 일정한 사람 들에게 고정적으로 주어지거나 입법부가 상시적으로 개회중인 상태를 더 우려했다.

 

작금의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입법기관의 독재를 17세기 말 영국의 명예혁명을 주도했던 인물들은 정확히 간파하고 있다는 것에 다시금 찬탄을 금할 수가 없다. 한 가지 간과하면 안 되는 사실은 존 로크는 당시의 3권 분립을 금과옥조로 평가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당연히 그럴 것이 그 당시는 17세기 말과 18세기 초의 전제군주제가 퇴 보하는 유럽의 상황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로크는 권력기관의 견제를 입법부 자체가 사익집단으로 고정되는 것을 막아야 가능하 다고 평가했던 것이다. 누구나 입법자로 소집될 수 있고 또 해당 입법부의 임기가 끝 나면 언제든 일반 신민으로 돌아가 다음 입법의 구성을 기다리는 체제하에서라면 입 법권을 위임받은 사람들이 공공선을 위해 법을 만들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 로크의 생각이었다. 얼핏 들으면 오늘날 대한민국의 안하무인격의 의회권력이 정당하 다고도 들릴 수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영국과 서유럽의 유수국가들은 입헌군 주제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입법기관의 안하무인 태도가 지나칠 시에 군 주권한은 말 그대로 깨어있는 시민들의 요구가 있다면 언제든 재가동 될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있는 것이다.

 

긴박하고 급진적인 혁명의 쟁점들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명예혁명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헌법적으로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는 시대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혁명을 통해 현실화된 변화는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영국사회를 팽창시키는 제도적 결과들을 속속들이 만들어 냈다. 명예혁명에 참여하고 지지를 보낸 많은 이들의 관심 은 왕을 정점으로 하는 국가 자체를 붕괴하는 데 있지 않았다. 그들이 의도한 바는 왕권이 상징하는 국가 최고 권력의 성격을 바꾸는 것이었다.

 

2017년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은 17세기 영국의 명예혁명의 역순으로 바라봐야 한다. 입법기관인 국회에 의해 완벽히 붕괴된 헌법질서와 행정부의 권한, 민간기업의 규제 활동을 다시금 시장의 질서와 성장에 필요한 건전한 시스템으로 바꾸는 것은 올바른 역사관과 사명이 분명한 시민들에 의한 책임추궁 밖에 없다. 영국의 상황이 오늘날의 대한민국과 같다면 분명 버킹검의 권한은 궁 밖으로 나와 시민들과 함께 의회를 가차 없이 응징 및 통제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사명은 의식 있는 시민의 힘과 타인의 재능 과 능력을 인정하는 성숙된 방향의 자유주의 운동이 절실한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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