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효성왕은 왜 假陵에 묻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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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효성왕은 왜 假陵에 묻히지 않았을까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2.09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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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혼란과 애정 갈등, 병환에 시달리며 불교식 화장 선택한듯

 

신라 34대 효성왕(孝成王: 737~742년)은 재위 6년만에 사망했다. 「삼국사기」엔 그의 사망 원인을 설명하지 않았지만, 병사로 추정된다. 그의 시신은 유언에 따라 법류사(法流寺) 남쪽에서 화장되었으며, 유골은 동해에 뿌려졌다. 불교식이다.

그에겐 두명의 왕비와 별도의 첩을 두었지만, 아들이 없었다. 그는 동복동생인 헌영(憲英)이 왕위를 이어 제35대 경덕왕(景德王)으로 즉위했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효성왕은 화장장을 치렀기 때문에 왕릉이 있을수 없다. 하지만 효성왕은 살아 있을 때 자신의 무덤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유적 발굴에 의해 조명됐다. 이를 가릉(假陵)이라고 한다.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성림문화재연구원이 발굴조사 중인 경주 낭산 일원(사적 제163호)에서 신라 왕릉에 사용되는 다량의 석재와 건물지, 담장, 도로 등을 확인하였으며 명문기와 등 300여 점의 중요 유물이 확인됐다.

조사된 유적은 금제여래입상(국보 제79호)과 금제여래좌상(국보 제80호)이 발견된 전(傳) 황복사지(黃福寺址) 삼층석탑에서 남쪽으로 약 135m 떨어진 지점의 논 경작지로서, 이 일대는 오래 전부터 홍수로 인해 파괴된 신라왕릉과 관련 석재유물(면석, 탱석 등)들이 지상에 노출되어 있던 곳이다.

학계에서는 신문왕릉이나 성덕왕비의 소덕왕후릉, 민애왕릉 등과 비슷한 급의 폐왕릉지로 추정되거나, 「삼국유사」 기록에 나온 의상대사의 탑돌이와 관련있는 절인 황복사의 목탑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중요 유적지이다. 경주시는 이러한 유적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훼손을 방지하고 폐왕릉지에 대한 앞으로의 복원‧정비를 위해 이번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경주 낭산 동쪽일원 내 추정 고분지에서 확인된 석재 유물은 탱석, 면석, 지대석, 갑석, 미완성 석재 등으로 신라 왕릉에서 주로 사용되는 유적이며 그 주변으로 8~9세기가 중심연대인 건물지와 담장, 회랑지, 도로(너비 16~17m) 등이 확인됐다.

이와 함께 연화보상화문수막새, 귀면와(鬼面瓦: 도깨비기와), 신라 관청명으로 추정되는 ‘습부정정(習部井井)’, ‘습부정정(習府井井)’과 ‘정원사(鄭元寺, 鄭은 추정명문)’명 명문기와 등 유물 300여 점이 출토되었다.

발견된 갑석과 지대석, 면석과 탱석으로 추정해본 왕릉의 지름은 약 22m로, 전(傳) 경덕왕릉(765년)과 비슷한 규모이다. 조사 결과, 왕릉 관련 석재 다수가 미완성으로 출토된 점, 후대에 조성된 8~9세기 건물지 시설에 재활용된 점, 석실 내부를 만들기 위한 부재가 확인되지 않은 점, 탱석의 십이지신상이 잘려나간 점 등 여러 정황으로 판단할 때, 당시 왕을 위하여 사전에 왕릉을 준비하던 도중 어떠한 사유인지 축조공사를 중단하였던 가릉(假陵) 석물로 추정된다.

성림문화재연구원측은 발굴조사 결과와 십이지신상 형식으로 볼 때, 가릉의 주인공이 성덕왕의 둘째 아들이자 경덕왕의 형인 효성왕으로 추정했다.

▲ 경주 낭산 일원에서 발견된 통일신라 가릉 유적지를 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 수레바퀴 자국이 난 도로터와 담장터, 석물들이 나타난다. /문화재청

 

 

효성왕 때에는 지배세력 내부의 갈등이 확대되고, 정치가 어지러웠다. 「삼국사기」 효성왕조에는 여러 변고의 기록이 많이 나타난다. 즉위한 해에 지진이 일어나고 유성이 나타났으며, 이듬해에는 소부리군 강물이 핏빛으로 변했다. 즉위 3년에는 여우가 월성(경주)에 나타나 울었고, 4년에는 붉은색 옷을 입은 여인이 예교(隸橋) 밑에서 나와 조정을 비방하다가 홀연히 사라졌다. 죽은 해엔 지진이 일어나고 유성이 출현했다.

효성왕은 재위 3년에 동생 헌영을 태자로 책봉했는데, 이미 지병이 깊어갔음을 예측할수 있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효성왕은 스스로 무덤을 만들라고 지시한 것이 아닐까.

그는 동생에게 태자 자리를 물려주면서도 부인을 둘이나 더 두었다. 자식 욕심이 없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효성왕은 외조부 이찬 김순원(金順元)의 권한이 커지면서 부인도 자기 마음대로 두지 못했다. 이에 따른 정치적 불안도 확대됐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재위 2년째에 박씨를 왕비로 봉했지만, 이듬해 이찬 김순원의 딸인 혜명(惠明)을 새로 왕비로 맞이했다. 새 왕비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효성왕은 파진찬 영종의 딸을 후궁으로 들여 총애하고 있었는데, 혜명왕비가 질투해 영종을 모반 죄로 처형시켰다.

이 과정에서 효성왕은 왕위와 삶에 대해 깊은 회의를 느끼고 불교에 귀의한 것이 아닐까. 그는 자신의 죽음에 대비해 준비한 가릉에 묻히지 않고 화장을 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가릉 주변에서 조사된 건물지는 일반적으로 신라왕경에서 확인되는 주택이나 불교 사원 건축과는 차이가 있어서 관청이나 특수한 용도의 건물로 추정된다. 불교 관련 유물이 나오지 않았고, 관청명으로 추정되는 ‘습부정정(習部井井)’, ‘습부정정(習府井井)’이라고 적힌 명문기와 등의 유구로 봐서 신라 왕경의 행정 조직체중 하나로 알려진 습비부(習比部)와 관련된 관청이었을 가능성도 추정해볼 수 있다. 도로유구는 현재까지 신라왕경 내 조사된 다른 도로보다 구조적으로 튼튼하고 잘 만들어졌는데, 왕경의 남북대로와 동서대로의 너비가 약 16~17m 정도인 점으로 볼 때, 왕경의 방리(坊里)구획에 의해 연결된 도로이거나 황복사지 사역(절이 차지하고 있는 구역)이나 왕릉을 조성하기 위해 대형의 미완성 석재를 이동하기 위한 특수 목적으로 가설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이러한 발굴조사 결과는 앞으로 통일신라 시대의 왕릉 축조과정과 능원제도를 비롯한 신라왕경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판단된다.

 

용어풀이

* 탱석(撑石): 면석과 봉토가 붕괴하지 않도록 지탱해 주는 돌

* 면석(面石): 기단면이나 석축면을 형성하는 비교적 편평하고 넓은 돌

* 갑석(甲石): 대석(臺石) 위에 올리는 돌

* 지대석(地臺石): 지면을 단단하게 다진 후 놓는 돌

* 가릉(假陵): 왕의 죽음이 임박하여 사전에 능침을 만들어 두는 무덤

* 능원(陵園): 왕이나 왕비의 무덤인 능(陵)과 왕세자나 왕세자빈 같은 왕족의 무덤인 원(園)을 통틀어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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