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3 오늘] 악마의 만행…난징 대학살
상태바
[12/13 오늘] 악마의 만행…난징 대학살
  • 김인영 에디터
  • 승인 2018.12.12 17: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본군 난징 점령후 최대 30만명 중국인 살해…아시아판 홀로코스트

 

끔찍했다. 인류역사에 이처럼 무자비하게 인간이 인간을 살육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1937년 12월 13일 일본군은 마침내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南京)을 점령했다. 이날부터 6주간 일본군은 중국인을 학살했다. 워낙 많이 죽어서 정확한 피해자 숫자도 파악되지 않는다. 많게는 30만명이 살해되었다고 추정된다. 학살은 이듬해 초까지 진행되었다. 생체실험도 진행되었다.

난징 대학살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서양에서는 이를 아시아 홀로코스트라고 부르기도 한다.

 

▲ 1937년 12월 13일 일본군의 난징 진입 /위키피디아

 

그해 7월 일본은 루거우차오(蘆溝橋) 사건을 일으켜 중일전쟁을 도발하고, 곧이어 상하이를 점령했다. 하지만 국민당 군대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상하이 전투에서 장제스(蔣介石)의 정예군대가 격렬히 저항하는 바람에 일본군도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악에 바친 일본군은 상하이 점령후 곧바로 국민당의 본거지 난징으로 쳐들어갔다.

장제스는 충칭(重慶)으로 퇴각했지만, 중국군 사령관 탕셩즈(唐生智)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수도를 지키겠다"며 결사항전을 주장했다. 하지만 막강한 화력의 뒷받침을 받은 일본군이 밀려들면서 110만명에 이르던 난징 시민들이 도시를 떠났다. 피난에 나선 사람은 그나마 악마의 만행을 피할수 있었다.

탕셩즈 휘하 15만 명의 중국군은 시민들과 함게 난징 성을 방어하겠다는 전략을 채택했다.

12월 10일, 일본군은 중국군에 "항복하지 않으면 양쯔강을 피로 물들이겠다“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중국군은 끝까지 투항을 거부했고, 일본군은 전면적인 공격에 들어갔다.

12월 13일, 일본군은 난징성 안으로 진격했다. 그 직전에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탕셩즈는 휘하 부대와 고립된 시민들을 버리고 양쯔강을 건너 도망쳤다. 피난가지도 못하고 남아있던 50만~60만의 난징 시민들과 군인들은 피에 굶주린 악마의 희생물이 되었다.

 

▲ 난징 대학살 /위키피디아

 

난징학살의 처참한 장면은 여러사람들의 증언에 의해 드러났다.

일본 군인들은 백기를 들고 항복한 중국군 포로 뿐만 아니라 젊은 남자들을 색출해 닥치는 대로 성 외곽과 양쯔강으로 끌고가 기관총으로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만여 명을 한꺼번에 살해했다. 중국군 포로와 민간인 남자들은 총검술 훈련용으로 되거나 목 베기 시합 희생물이 되었다. 총알을 아끼려는 일본군에 의해 산 채로 파묻혀서 생매장 당하거나 칼로 난도질당했다.

난징의 한 광장에서는 천여 명의 사람들이 몇 개의 단위로 열로 구분되어 세워졌는데, 이들 가운데는 여자들과 어린아이 등 수많은 민간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군은 이들에게 석유를 쏟자마자 곧바로 기관총을 난사했다. 시체더미는 산처럼 이루었다.

난징대학살에 참가한 어느 일본군의 일기에는 "심심하던 중 중국인을 죽이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랜다. 산 채로 묻어버리거나 장작불로 태워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 죽이기도 했다"고 적혀 있었다. 인간에 의한 인간 사냥이었다.

전쟁에서 여자들의 피해는 말할수 없이 끔찍하다. 난징학살에서는 더 했다. 일본군은 여성을 성노리개로 삼았다. 강간 후 참혹하게 살해했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