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8 오늘] 브렉시트의 원조 英 대처 총리 사임
상태바
[11/28 오늘] 브렉시트의 원조 英 대처 총리 사임
  • 김인영 에디터
  • 승인 2018.11.27 20: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포클랜드 전쟁 승리 계기로 영국병 치유한 ‘철(鐵)의 여인’

 

1990년 11월 28일 영국의 마가릿 대처(Margaret Thatcher) 총리가 사임했다. 그는 1979년 5월 4일부터 11년 이상 총리직을 수행했다.

그가 1990년에 총리직을 사임한 이유는 EU 가입 문제였다. 대처는 영국의 EU가입을 반대했고, 그가 소속한 보수당 지도부의 반발을 샀다. 그해 11월 보수당 당수 경선에 나섰다가 실패하자 총리직을 사임했다. 지금 영국의 EU 탈퇴론자들은 대처 총리의 후예라고 할만하다.

대처 총리는 또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함께 신자유주의에 기반을 둔 경제개혁을 단행한 인물이다.

 

▲ 1988년 백악관에서 영국 마가릿 대처 총리와 미국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위키피디아

 

대처가 총리에 취임하기 직전인 1979년 1월말, 런던에는 거리마다 쓰레기 더미가 넘쳤다. 20년만에 닥친 혹한이었지만, 얼어붙은 쓰레기에서 악취가 진동하고 쥐가 들끓었다. 병원에서는 시신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영국 사회는 마비되었다.

이른바 1978~1979년 겨울에 영국 런던에서 벌어진 '불만의 겨울'(winter of discontent)의 풍경이었다. 임금 인상을 위해 공공부분 노동조합에서 시작된 총파업은 운수 노조로 이어졌고, 쓰레기 청소부와 장의사마저 파업에 참가했다.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노동당 정부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임금 상승률을 5%로 제한하는 바람에 노동자의 삶이 악화되었기 때문이었다.

한 때 산업혁명이 가장 먼저 발생하고,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웠던 대영제국은 회복 불능의 병을 앓고 있었다. 이른바 영국병(British disease)이 만연하면서 생산력은 떨어졌다. 1975년 영국의 노동생산성은 미국보다 50%, 독일보다 25% 뒤쳐졌다.

이런 파국을 겪은후 영국인들은 그해 봄 총선에서 보수당에 표를 몰아주었고, 마가릿 대처가 총리로 선출되었다. 영국병을 치유하고, 이른바 시장경제로 환원하는 내용의 대처리즘(Thatcherism)이 여기에서 나온다.

 

▲ 1977년 대처 총리 /위키피디아

 

대처 총리는 초기에 인기가 없었다. 남성 정치인들이 여성 총리를 우습게 여겼고, 막강한 석탄 노조는 탄광 민영화에 반대해 장기파업에 돌입했다. 여론조사에서 대처 총리의 인기는 바닥으로 떨어져 있었다. 2차 대전후 영국은 식민지들이 떨어져 나가면서 세계 주도권을 미국에게 넘겨주었다. 경제는 높은 실업률과 물가 상승, 정치색을 띤 노조의 파업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그러던중 포클랜드 전쟁이 벌어졌다.

1982년 4월 2일 아르헨티나의 군부 집권세력인 레오폴드 칼티에리 대통령은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2,000명의 군인을 투입해 영국령 포클랜드를 침공했다. 아르헨티나군의 기습 공격에 영국군 79명은 3시간만에 투항했다.

영국에서는 극심한 혼란이 벌어졌다. 대처 전 총리는 협상파와 싸웠다. 포클랜드 전쟁이 터지자 당시 프랜시스 핌 외무장관은 전쟁을 평화롭게 끝내자고 주장했다. 핌 장관이 미국과 페루가 중재한 평화안을 들고 워싱턴에서 돌아와 각료회의에 그 안을 제출하려 하자, 대처 총리는 배신행위라며 화를 냈다.

대처 총리는 두달여후인 그해 6월에 핵잠수함을 동원하고 해군 특공대를 투입해 전쟁에서 이기고 영토를 되찾았다.

 

▲ 1990년 영국 왕립 버뮤다연대를 사열하는 대처 총리 /위키피디아

 

포클랜드 전쟁의 승리는 영국병을 고치기로 마음먹은 대처 총리에게 힘을 실어줬다. 포클랜드에서의 승전은 영국 국민으로 아여금 과거의 영광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했다.

대처 총리는 이런 분위기를 활용, 탄광노조에 한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마침내 탄광노조는 1년에 가까운 파업을 풀고, 대처에게 무릎을 꿇었다. 영국병의 근원으로 파악됐던 노동조합의 힘이 약화됐다. 대처는 시장경제 원리에 따라 영국 경제에 대대적인 수술을 단행했다.

그는 ‘철(鐵)의 여인’으로 불리웠다. 하지만 1982년 아들 마크가 파리-다카르 랠리에서 실종된 뒤 구조되었을 때 눈물을 보여 어머니로서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대처의 보수당은 1990년대말에 40대의 노동당 당수 토니 블레어에게 정권을 넘겼지만, 블레어 총리는 대처의 개혁주의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