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5 오늘] 마오쩌둥 맏아들, 한국전에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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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오늘] 마오쩌둥 맏아들, 한국전에서 사망
  • 김인영 에디터
  • 승인 2018.11.25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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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안잉, 중공군 참전 1개월만에 연합군 공습에 피격…무덤은 북한에

 

1950년 11월 25일 정오 무렵, 북한 평안북도 동창군(지금의 삭주군) 대유동.

▲ 마오안잉 /위키피디아

연합군으로 참전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공군 폭격기가 폭탄을 투하했다. 전날 두 대의 P-61 정찰기가 중공군의 위치를 탐지했고, 다음날 정오에 남아공 공군 A-26 폭격기가 4개의 네이팜탄을 투하했다.

이 폭탄이 중국 국가주석 마오쩌둥(毛澤東)의 맏아들 마오안잉(毛岸英)이 숨어있던 동굴 근처에 떨어졌다. 마오안잉은 그 폭탄이 폭발하면서 숨졌다.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그해 10월 25일 중국공산군이 6·25 전쟁에 참전한 이래 꼭 한 달 만의 일이다.

 

마오안잉은 1922년 10월 24일 중국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마오쩌둥은 1927년 9월 추수폭동으로 도주하면서 가족과 헤어졌다. 어머니 양카이후이(楊開慧)는 마오쩌둥의 두 번째 부인으로, 1930년 창사 폭동 이후 후난성에서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마오안잉과 그의 동생은 국민당의 추적을 피해 상하이로 도주했으며 작은 아버지인 마오쩌민(毛澤民)의 손에서 자랐다. 국민당의 대대적인 공산당 탄압을 피해 1936년 파리로 건너갔다가 다시 모스크바로 갔고 거기서 가명으로 공부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소련군에 들어가 동부전선에 참전했다. 전쟁이 끝나고 중국으로 돌아와 1949년 10월 류쑹린(劉松林)과 결혼했다.

마오안잉은 결혼후 1년만에 전사했다. 그의 부인 류쑹린은 시아버지 마오쩌둥의 권유로 재혼해 아직도 살아있다.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마오안잉은 중국 인민지원군에 지원해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의 러시아어 통역관으로 참전해 압록강을 건넜다.

 

▲ 마오안잉과 류쑹린이 결혼 직후 사진 /위키피디아(중국판)

 

마오안잉이 한국전에 참전하려고 했을 때, 펑더화이 등 군 수뇌부가 그가 죽거나 포로가 될 것을 우려해서 참전하지 말게 해달라고 마오쩌둥에게 부탁했다. 그랬더니 마오쩌둥은 "내 아들을 참전시키지 않으면 누가 전쟁터에 간단 말인가"라며 아들의 참전을 말리지 않았다고 한다.

아들이 전사한 이후, 마오쩌둥은 다른 인민들도 자식을 전쟁에서 잃었을 것임을 생각해 시신을 가져오지 않았고, 그래서 마오안잉의 유해는 북한 평안북도 회창군에 소재한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부 열사릉원에 묻혀 있다. 김정은을 포함해 북한의 역대 지도자가 그의 무덤을 찾아 참배했다.

 

▲ 1949년 4월 마오쩌둥과 맏아들 마오안잉, 며느리 류쑹린, 네 번째 부인 장청 /중국 浙江圖書館

 

마오안잉이 한국전쟁에서 죽지 않고 살아있었으면 중국 정치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 일각에서는 그가 죽지 않았으면 중국에도 북한처럼 권력세습이 이뤄졌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적장자를 잃었기 때문에 마오쩌둥은 자신이 죽은 후에 권력을 혈통으로 내려 잇지 않고, 후계자들에 의한 집단지도체제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일리 있는 얘기다.

마오안잉의 죽음은 중국과 북한관계를 혈맹으로 만든 계기가 된다. 북한 핵 실험 과정에서 보듯, 냉랭하던 북한-중국 관계가 어느 사이에 다시 막역한 관계로 돌변하는 것은 건국자가 아들을 보내 희생시킬 정도로 북한을 도왔다는 사실이 그 밑바닥에 흐른다.

 

▲ 북한 회창군에 조성된 마오안잉 묘 /바이두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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