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오늘] 소련군 탱크에 짓밟힌 헝가리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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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오늘] 소련군 탱크에 짓밟힌 헝가리 혁명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11.03 16: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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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화 10년만에 민주화 요구…진압후 33년 후에 민주화 달성

 

1959년 11월 소련군에 의해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시민봉기가 진압된 후 시인 김춘수는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썼다.

 

다뉴브강(江)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東歐)의 첫겨울

가로수(街路樹)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黃昏) 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수발(數發)의 쏘련제(製) 탄환(彈丸)은

땅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순간(瞬間), 바숴진 네 두부(頭部)는 소스라쳐 삼십보(三十步) 상공(上空)으로 튀었다.

두부(頭部)를 잃은 목통에서는 피가

네 낯익은 거리의 포도(鋪道)를 적시며 흘렀다.

너는 열 세 살이라고 그랬다.

네 죽음에서는 한 송이 꽃도

흰 깃의 한 마리 비둘기도 날지 않았다.

네 죽음을 보듬고 부다페스트의 밤은 목놓아 울 수도 없었다. ……

 

1956년 11월 4일 새벽 3시 소련군 탱크 1,000여대가 굉음을 울리며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 시내로 진입했다. 동원된 소련군 병력만 3만여명이 넘었다.

소련군 탱크는 곧이어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 이날부터 진압이 완료된 10일까지 2,500~3,000명의 사망자, 1만3,00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피로 얼국진 부다페스트의 소식을 들은 시인 김춘수는 13살 소녀의 죽음을 시로 남겼다.

 

▲ 파괴된 소련제 탱크 위에 올라가 있는 부다페스트 시민들 /위키피디아

 

헝가리는 2차 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원으로 독일과 함께 주축국의 편에 섰다. 패전후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1946년 공산국가가 수립되고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다.

하지만 공산화 10년간 헝가리 국민들은 독재와 가난에 시달렸다. 공산정부의 수뇌 라코시 마차시(Rákosi Mátyás)는 ‘작은 스탈린’이라 불리며 반대파 수천명을 숙청하고, 산업시설을 국유화하고 집단농장을 실시했다.

1953년 소련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이 죽고 니키타 후르시초프 정권이 들어서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이자 라코시는 당서기장만 맡고, 총리 자리를 임레 너지(Imre Nagy)에게 넘겨주게 된다.

 

▲ 1956년 10월 25일 부다페스트 시민들의 시위 행렬 /위키피디아

 

1956년 10월 23일 오후, 2만여명의 시위대가 부다페스트 시내에 모여 국가를 부르며 민주화를 요구했다. 시위대는 스탈린 동상을 철거하고 머리를 부수어 거리에 끌고 다녔다. 그날 저녁 당 제1서기장 게뢰 에르뇌는 시위대의 민주화 요구를 거부하는 방송을 내보냈다. 그러자 시민들은 그 방송을 내보낸 방송국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보안군이 시위대를 향해 최루 가스와 기관총을 쏘아대면서 첫 사망자가 발생했다. 시민들이 분노하면서 본격적인 혁명운동이 시작된다. 시민들은 보안군 대원들을 죽였고, 라디오 방송국을 점거했다.

10월 24일, 헝가리에 주둔하던 소련군이 부다페스트에 진입해 시민군과 총격전이 벌어지는데 이 과정에서 헝가리군 일부가 시민군에 가담하면서 봉기가 격화했다.

저널리스트 오베르소프스키는 ‘이가샤그(진실)’라는 일간지를 발행해 봉기를 고무시켰다. (그는 혁명 실패후 사형이 언도되어 형장으로 끌려갔다가 밤이 깊어 처형이 연기됐는데, 그날 소련의 흐루시쵸프 서기장이 봉기 관련자의 사형에 항의하는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의 서한을 읽고 적당히 처리하도록 지시함으로써 살아났다.)

10월 25일, 봉기는 부다페스트뿐만 아니라 헝가리 주요 도시로 번졌다.

10월 26일, 의사당이 시민군에 의해 점거되고, 라코시, 게뢰를 비롯한 강경파들이 소련으로 도망가고, 개혁주의자 너지 임레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다.

10월 28일부터 11월 4일까지 전투가 일시 중지되었다.

너지 임레의 신정부는 일당제 폐지, 헝가리의 바르샤바 조약기구 탈퇴, 소련군의 헝가리 철군 요구를 골자로 한 개혁 정책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 무렵 소련 수뇌부는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이탈하고 공산체제를 전복한 헝가리를 진압하기로 결의한다.

11월 4일, 이반 코네프 휘하의 대규모의 소련군을 헝가리에 투입한다. 4일 오전 3시에 부다페스트 방면에 소련군 기갑부대가 투입되었고, 뒤이어 소련군 탱크부대가 부다페스트를 가로질러 시내를 이등분시켰다. 소련군 전차와 대포에서 뿜어져나오는 포성이 부다페스트 전역을 뒤덮었다. 오전 5시 20분에는 너지가 마지막 라디오 방송을 통해 자유 헝가리가 소련군의 공격을 받고 있음을 헝가리와 전 세계에 알렸다.

부다페스트 시민군은 화염병을 투척하며 격렬히 1주일만에 소련군에 의해 완전히 제압된다.

 

▲ 1956년 10월의 임레 너지(가운데) /위키피디아

 

한편 임레 너지는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다가 대사관을 잠시 나오던 중에 소련에 의해 체포되어 루마니아로 압송되고 1958년 6월 16일 비밀리에 처형당했다. 당시 혁명에 참여했다가 처형된 헝가리인이 350명을 넘었다고 한다. 너지의 시신은 비밀리에 매장되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봉기는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의 봄’에 12년 앞서 일어났다. 진정한 ‘부다페스트의 봄’은 혁명후 33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1989년 헝가리에 공산정권이 붕괴되고,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다.

너지도 1989년 복권되어 그해 6월 16일 부다페스트에서 31년만에 정식으로 장례식이 열려 안장되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수만명의 부다페스트 시민들이 운집해 그를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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