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9 오늘] 터키 공화국 수립…술탄제 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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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9 오늘] 터키 공화국 수립…술탄제 폐지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10.28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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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대전 패전후 케말 파샤 중심으로 젊은 장교들이 독립운동 벌여

 

1923년 10월 29일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 파샤는 수도 앙카라에서 터키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겉으로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술탄제에서 공화정으로 넘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독립운동이었다.

16~17세기에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그리스, 발칸반도, 중동과 아라비아 반도, 이집트, 북아프라카까지 영유하며 대제국을 건설한 오스만 투르크는 1차 대전에서 패한 후 해체될 위기에 처했다. 그 때 무스타파 케말을 중심으로 한 투르크 군부가 독립운동을 전개해 술탄제를 폐지하고 공화국을 세운 것이다. 오늘 터키 공화국은 여기서 출발한다.

 

▲ 1566년 오스만 투르크 지배영역 /위키피디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1571년 레판토 해전, 1683년 2차 빈 전투에서 패하면서 제국 확장에 한계를 드러냈다. 서구 열강은 무기를 선진화하는데 비해, 오스만은 재래식 무기를 그대로 쓰고 있었고, 군부는 부패했다. 이슬람 배타주의에 젖어 사회는 후진성을 면치 못했다. 그러는 가운데 유럽 제국들이 늙어가는 제국을 곳곳에서 침공하고 피지배민족이 독립해 나갔다. 17세기말 헝가리를 잃고, 18세기에는 흑해 연안을 러시아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위로부터의 개혁도 있었다. 셀림 3세, 마흐무드 2세, 압둘 메지드 등 술탄들이 서구식 부국강병을 추진했다. 서구 과학기술을 도입하고, 정치를 이슬람교에서 독립시키고, 종교 차별을 철폐하고, 술탄의 권한을 제한해 입헌군주제를 수립하려 했다. 1876년 12월, 오스만 투르크는 이슬람국가 최초로 헌법을 제정해 다당제를 통한 의회 구성을 인정하게 된다.

술탄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패전으로 오스만 제국은 유럽의 영토를 대부분 잃고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군인들에게 봉급도 제대로 줄 형편이 못되었다.

 

▲ 무스타파 케말 /위키피디아

이때 젊은 청년장교들이 비밀결사조직을 만들었다. 청년투르크당(Young Turks)이다.

1908년 7월에 청년투르크당은 술탄에 대항해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청년투르크당 소속 장교들은 술탄에게 헌법의 부활을 요구했다. 술탄이 굴복하고 실시된 총선거에서 청년투르크당이 조직한 연합진보위원회가 정권을 장악했다. 무스타파 케말도 군인으로서 청년투르크당에 가입해 활약하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터키의 젊은 징치 세력은 의회주의를 도입하고 서구적 근대화 작업을 추진했다. 하지만 그들이 개혁을 추진한지 얼마 되지 않아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청년 투르크 지도부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독일 편에 설 것인가,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 편에 설 것인가.

오스만투르크의 정권을 쥔 젊은 정치인들은 결국 잘못된 판단을 했다. 독일에 줄을 대기로 결론을 내린 것이다. 당시 지도자 엔베르 파샤(Enver Paşa)는 베를린 무관출신으로 친독일주의자였다. 무스타파 케말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와 손을 잡는 것을 반대했다. 그는 불만이 있었지만 엔베르가 결정한 방향에 따랐다.

결국 터키는 1차 대전에서 패전국이 되었다. 1918년 10월, 오스만 투르크는 항복을 선언했다. 엔베르 등 정부 수뇌는 외국으로 달아났다. 1919년 5월, 동쪽에서는 아르메니아, 서쪽에서는 그리스가 침공해왔다.

패전의 댓가는 가혹했다. 1920년 8월 10일 연합국의 요구로 수용된 세브르 협정(Treaty of Sèvres)은 사실상 오스만 투르크를 완전해체하는 것이었다.

세브르 조약으로 오스만 투르크는 유럽의 이스탄불과 아시아의 아나톨리아만을 소유한 작은 나라로 전락했다.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게 되었고, 시리아와 레바논은 프랑스의 위임통치국이 되었다. 에게해의 섬들도 그리스령이 되었다. 동쪽의 아르메니아는 독립했고, 쿠르디스탄은 자치권을 획득했다. 게다가 소아시아의 이즈미르와 그 주변 지역은 5년간 그리스의 통치를 받되 그 후에는 주민 투표를 해서 그리스 혹은 오스만제국 어느 나라에 편입하기로 되었다.

세브르조약을 받아들일 경우 오스만 투르크는 소아시아의 일부를 제외하고 모든 영토를 잃고, 그리스 영토는 소아시아까지 확장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숨만 남아있던 술탄 메흐메드 6세의 정부는 세브르조약을 비준했다.

 

▲ 1920년 세브르 조약 내용 /위키피디아

 

드디어 무스타파 케말이 이끄는 장교단이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이들이 주장한 독립은 술탄으로부터의 독립, 서방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이었다.

세브르 조약을 믿고 그리스의 콘스탄틴 국왕 정부는 아나톨리아 반도 서부로 진격해 왔다. 이때 영국은 그리스를 지원했다. 그리스군은 1921년 1월에서 4월까지 소아시아 서부 대부분을 점령했다.

 

▲ 그리스의 영토확장 /위키피디아

 

케말 장군이 이끄는 터키 독립군은 세브르 조약을 거부했다. 이에 술탄은 케말을 해임하고 의회도 해산시켰다. 하지만 케말은 앙카라에서 다시 의회를 구성했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독립운동이 벌어진다.

터키 의회는 무스타파 케말을 사령관으로 임명했고, 그는 사카리아강에서 최후의 참호전을 준비했다. 케말이 지휘한 오스만군은 1922년 8월에 그리스군을 물리쳤다. 뒤이어 이즈미르를 되찾았다.

그리스군이 패배하자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3국이 이스탄불 주변과 보스포러스 해협을 점령했다. 터키 민족주의자들은 총궐기를 단행해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너 유럽군을 위협했다.

1922년 10월 영국과 프랑스 등 연합국은 터키 문제 해결을 위해 이해 당사국을 스위스 로잔에 초청했다. 연합국은 앙카라의 케말 파샤 정부는 물론 이스탄불의 오스만 제국 정부도 초청했다. 아직까지 터키에는 두 개의 정부가 있었다.

케말은 이스탄불의 술탄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술탄 메흐메드 6세가 로잔 회의에 초청받자 케말은 의회에 술탄제 폐지를 요청했다. 하지만 앙카라 의회는 술탄제 폐지와 술탄을 축출하는 것을 망설였다. 의원들 상당수가 입헌군주제를 선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케말은 무장 군인을 동원회 의회를 위협했다. 결국, 앙카라 의회는 영국군이 이스탄불을 점령한 때로부터 술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술탄제를 폐지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그해 11월 17일 메흐메드 6세는 궁궐을 탈출해 영국 군함을 타고 몰타로 망명했다. 이로써 오스만 투르크는 36대 메흐메드 6세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캐말은 술탄제를 폐지했지만, 터키인들의 정서를 고려해 메흐메드 6세의 조카 압둘‒메지드 2세를 칼리프로 계승해 이슬람의 정신적 수장으로 남게 했다.

 

▲ 1923년 로잔 협정 내용

 

곧이어 앙카라 정부는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회담에 참가했다. 1923년 7월 24일 체결된 로잔 협약에 의해 연합국은 현재의 터키 영토를 인정했다.

그리고 케말 파사의 앙카라 정부는 그해 10월 29일 터키공화국 수립을 만방에 선포했다. 이듬해 4월 23일 앙카라 정부는 칼리프제마저 폐지하고,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고위직 간부 150명에 대해 추방령을 내렸다.

캐말은 그후 15년간 대통령직을 수행하며 공화국 터키에 많은 개혁을 이뤄냈다. 터키에선 그를 아타튀르크(Atatürk: 터키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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