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7 오늘] 88 서울올림픽 개막…도약의 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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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7 오늘] 88 서울올림픽 개막…도약의 계기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9.16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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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바덴바덴서 압도적 표차로 선정…공산권 수교 기회

 

30년전, 1988년 9월 17일 제24회 하계올림픽이 서울에서 개막했다. 10월 2일까지 16일 간 열린 서울올림픽은 올림픽 경기라는 측면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고, 대한민국을 도약시키는 큰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

전세계에서 159개국에서 1만3,304명의 선수단, 8,391명의 선수가 참가한 올림픽 사상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12년 만에 동·서 두 진영 선수단이 모두 참가해 이념분쟁, 인종차별로 인한 갈등과 불화를 해소시킨 대회였다.

 

▲ 88 서울올림픽 모습 /IOC

 

서울올림픽은 1979년 4월,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 결승전을 관람하러 온 박정희 대통령이 박종규 대한체육회장, 김택수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 정상천 서울시장과 저녁식사를 하던중 올림픽 개최를 천명한다. 최초 구상은 박종규 대한체육회장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곧이어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올림픽 이야기는 사라졌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서울올림픽이 다시 추진된다. 이규호 문교부 장관이 올림픽의 불씨를 살려내 “한국이 도약하려면 올림픽을 유치해야 한다”고 전두환에게 건의했다. 자신의 체험을 쓴 소설 「불모지대」(不毛地帶)의 저자로 유명한 일본의 소설가 세지마 류조(瀬島龍三)가 서울올림픽 개최를 건의했고, 전두환이 이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1980년 3월 7일 문교부 체육국 주재 관계기관 회의에서 올림픽 유치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그해 12월 2일 서울특별시가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올림픽 유치 후보도시로 신청했다.

일본을 나고야를 후보지로 신청했다. 양국의 유치활동은 치열했다. 특히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뚝심 있게 밀고 나간 일화가 유명하다.

1981년 9월, 독일 바덴바덴에서는 역사적인 발표가 있었다.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서울을 올림픽 개최지로 발표했다. 서울과 나고야의 득표율은 52대27. 압도적 표차로 서울이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었다.

그후 안보 상황은 악화했다. 북한에 의한 대한항공기 폭파사건, 아웅산 테러사건등으로 서울올림픽 개최에 테러 위협이 제기되었다. 북한은 소련과 함께 일본을 지지했다가, 올림픽 개최 직전인 1987년 느닷없이 남북공동개최를 들고 나왔다.

 

▲ 88 서울올림픽 모습 /IOC

 

서울올림픽 개최는 한국 정치판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영화 ‘1987’에서도 나오듯 전두환 정권은 민주화 요구를 받아들여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였고, 그 이후 대선에서 노태우 정권이 들어 선다.

우여곡절 끝에 서울올림픽은 성공적으로 개최되었다. 냉전 시대에 동서 양대진영의 선수단이 모두 참가해 세계평화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했다. 또 한국의 문화와 전통, 한국인의 저력을 전세계에 알리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이나 유럽에서 한국(Korea) 또는 서울(Seoul)을 아는 사람이 드믈었다. 서울올림픽이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또 서울올림픽은 동서냉전의 최전선에 서 있던 대한민국에게 동구권에 접근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서울올림픽이 열리기 전에 외교부와 국가안전기획부 비선라인은 공산권과 접촉해 올림픽 참가를 유도했다. 그때 만들어진 라인을 통해 박철언씨가 후에 북방외교를 펼치게 된다. 한·소, 한·중수교, 북한과의 경제교류등도 서울올림픽이 가져다준 결과다.

 

▲ 서울올림픽 30주년 로고 /국민체육진흥공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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