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4 오늘]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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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4 오늘]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8.23 22:0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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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카톨릭이 신교도 위그노를 학살한 사건…종교전쟁이 빚은 비극

 

1572년 8월 24일 새벽을 알리는 교회 종소리가 울리자, 프랑스 왕실의 스위스 근위병들이 살생부 명단을 들고 시내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스위스 근위병들은 가장 먼저 루브르 성에 머물고 있던 위그노(프랑스 신교도) 귀족들을 성 밖으로 내쫓아 길거리에서 집단 학살극을 벌였다. 카톨릭 교도인 기즈가(家) 무리들은 위그노의 지도자격인 가스파르 드 콜리니 제독을 침대에서 끌어내 죽이고 시체를 창밖으로 내던졌다.

학살을 명한 사람은 프랑스 군왕이었다. 샤를 9세는 위그노들이 반란을 일으켜 파리를 점령할까 두려워 어머니 카타린느와 공모해 위그노를 살해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을 그린 그림 (François Dubois 作) /위키피디아

 

당시 학살 소식을 듣고 그린 화가의 그림을 보면, 콜리니 제독의 시체가 건물 창가에 걸려 있고, 벌거벗은 시체들이 무리 지어 쌓여 있다. 목에 줄을 걸어 끌고 가는 모습, 살려 달라는 사람에게 칼을 겨누는 모습, 수레에 시체 더미를 쌓아 옮기는 모습, 광장에 시체를 걸어 놓은 모습…. 온갖 살인의 모습이 백화점처럼 나열되어 있다.

인간에게는 살인 욕구가 있다. 살인을 명령받은 병사들은 살인욕을 맘껏 채웠다. 그들의 살인이 너무나 잔혹하고 무자비했기에 명령을 내린 샤를 9세마저도 이튿날 살인중지를 명했다. 그래도 광기는 지방으로 번졌다.

죽은 사람도 세지 못했다. 역사 자료에는 이 학살극에서 죽은 사람이 2,000명이라는 주장과 7만명이라는 주장이 엇갈린다. 카톨릭 측에서는 2천명이라고 하고, 위그노측에선 7만명이라고 주장했다.

이날은 예수 12제자 중 하나인 성 바르톨로메오(St. Bartholomew)의 축일이었다. 그래서 이 사건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이라고 부른다.

 

▲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을 그린 그림 (검은색 옷을 입은 이는 샤를 9세의 어머니 카트린느) /위키피디아

 

사건은 궁정의 음모와 정치적 모략에서 시작되었다.

프랑스 국왕 샤를 9세의 어머니 카타린느는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막내 딸 마가렛을 나바르 왕국의 왕자 앙리와 결혼시켰다. 나바르 왕국은 피렌네 산맥 서쪽에 있는 바스크족의 소왕국이었는데, 앙리 왕자는 신교도였다. 카타린느는 신교도와 화해도 할 겸, 나중에 아들쪽 혈통이 끊어지면 딸을 통해 사위를 왕으로 이어가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국내의 카톨릭 세력과 로마의 교황청은 신교도와의 왕실 결혼을 반대했다.

반쪽의 지지를 얻었지만, 결혼식은 8월 18일 예정대로 치러졌다. 왕실에서도 두 종파의 화해를 위해 위그노 귀족들을 결혼식에 초청했다. 왕실의 요청도 있었지만, 신교도를 사위로 받아들이는 결혼식이었기에 전국의 위그노 귀족들이 파리로 집결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위그노의 리더격인 가스파르 드 콜리니 제독이 암살범의 총탄에 부상을 당한다. 콜리니는 한때 왕의 어머니 카트린느의 절친한 친구였으나, 신교로 개종하고 왕실에 반기를 들어 카트린느와의 우정이 깨져 있었다. 그 암살범의 배후에 카톨릭의 중심에 있었던 기즈가(家)가 있다고 위그노들은 파악했다.

콜리니 저격 사건은 위그노들을 격앙시켰다. 카트린느가 저녁을 먹는데 위그노들이 갑자기 쳐들어와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욕설을 퍼붓는 등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콜리니 제독의 사촌형제들은 4천명의 병사들을 끌고와 파리 근교에 주둔했다. 카톨릭들은 그들이 혹시나 파리로 쳐들어와 기즈 가문과 주요 시설을 점거하지나 않을까, 두려움에 떨었다.

8월 23일밤, 카트린느는 아들 샤를 9세를 찾아갔다. 이때 두 모녀는 파리 시내에 들어와 있는 위그노 귀족들을 죽일 것을 결정했다고 한다.

곧이어 파리시 당국이 궁궐로 소집되고 스위스 근위병에 동원령이 내려졌다. 그리고 위그노를 몰살하라는 샤를 9세의 명령이 떨어졌다.

이런 것을 아비규환(阿鼻叫喚)이라고 할 것이다. 대학살 소식은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가톨릭교도였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는 이 소식을 듣고 공포를 금치 못했다고 한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상복을 입고 이들의 죽음을 애도했고, 제네바에서는 이 비통한 소식을 듣고 금식을 선포했다.

하지만 로마의 교황 그레고리 13세는 이 학살을 축하하며 ‘하느님께 찬양’이란 뜻의 ‘떼 데움’(Te Deum)이라는 성가를 부르도록 명했고, 특별히 감사의 미사를 집전했다. 그것도 모자라 기념 메달까지 주조했다.

 

▲ 교황 그레고리 13세가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을 기념해 만든 메달 /위키피디아

 

이때 프랑스 공주와 결혼한 나바르 왕국의 앙리 왕자는 나중에 프랑스왕 앙리 4세가 되어 부르봉 왕조를 연다. 앙리 4세는 신교도 왕을 인정할수 없다는 카톨릭 귀족들을 무마하기 위해 카톨릭으로 개종한다. 신교도들이 이에 불만을 터트리지만, 앙리 4세는 지긋지긋한 종교전쟁을 끝내기 위해 1598년 4월 신교도인 위그노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낭트칙령을 발표했다. 이로써 36년간 진행되었던 위그노 전쟁(1562~1598)이 막을 내린다.

하지만 그는 1610년 오랜 친구인 쉴리 공작을 만나러 가는 길에 카톨릭 광신도의 칼에 맞아 숨졌다. 그의 손자인 루이 14세는 1685년 낭트 칙령을 폐지하고, 신교를 불법화하는 퐁텐블로 칙령을 내렸다. 이 칙령은 카톨릭으로 개종하지 않는 자를 처벌하고 재산을 몰수하며, 개신교 목사를 프랑스에서 추방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때 대규모 위그노들이 프랑스 땅을 떠났다. 20만~100만명에 이르는 위그노들은 영국, 독일, 네덜란드, 스위스 등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는 곳으로 이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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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7 01:27:48
ㅓ어려운 옛말로 대부분 쓰여있어서, 이해가 안 갔는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