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2 오늘] 국치일…이 치욕을 어찌 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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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2 오늘] 국치일…이 치욕을 어찌 잊겠는가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8.21 19: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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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국강병에 힘쓰지 않으면 나라 잃을수 있다는 교훈, 새겨야

 

1910년 8월 22일 서울 거리 곳곳에 일본 헌병들이 감시의 눈초리를 번득였다.

창덕궁 흥복헌(興福軒). 이름대로라면 복을 일으키는 곳인데, 이 곳에서 조선 왕실의 숨통을 끊는, 비극적인 어전회의가 열렸다. 이름을 기억해 두자. 내각대신 이완용(李完用)과 조선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가 형식적인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에 참석했다.

창덕궁에는 순종황제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회의는 한 시간도 채 못되어 폐회했다. 토론은 없었다. 이미 일본과 친일파에 의해 정해져 있는 일이었다.

이완용은 전권위원으로 임명되어 한일합병 조약에 서명했다.

 

제1조. 대한제국 황제 폐하는 대한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도 영구히 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

제2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이 양여를 수락하고 대한제국 전부를 일본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허락한다.

(……)

 

▲ 창덕궁 흥복헌 /위키피디아

 

우리는 이날을 국치일(國恥日)이라 부른다. 어찌 이 치욕을 잊을수 있겠는가.

테라우치는 조약 체결을 비밀에 부쳐두고 각종 사회단체의 집회를 철저히 봉쇄하고, 원로대신들을 가택연금시킨다. 언론탄압으로 백성의 귀를 막고 사회 지도층의 움직임까지 원천 봉쇄한 후 병합사실을 발표하겠다는 의도였다. 이 엄청난 사실은 일주일이나 감추졌다.

1910년 8월 29일, 일제는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이 합의하에 합병되었다고 공포했다.

조약이 불법적이고 강제적이고 공포적 분위기에서 열린 회의 결과였지만, 매국노가 도장을 찍으면서 대한제국은 국권을 탈취당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나라는 36년간 일제강점기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러면 조선은 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는가. 한마디로 답을 할수 없는 주제다.

조선의 패망에 관한 원인 분석은 다양하다. 그 첫째는 이완용의 매국론이다. 둘째, 유교 망국론이다. 셋째, 그 연장선상에서 당쟁 망국론이다.

이런 주장은 일견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근본적 원인은 아니다.

조선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에서 고종의 친정, 갑신정변, 임오군란, 동학혁명, 청일전쟁, 갑오개혁, 을미사변, 아관파천, 러일전쟁, 을사조약, 한일합방에 이르기까지 40여년에 걸친 격동기를 거치면서 쇠약해 있었다. 이완용이 매국노임은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한사람에게 모든 것을 책임지울 문제는 아니다. 조선 후기의 성리학이 배타주의, 족벌주의, 권위주의, 전례주의를 태동시켰다는 유교 망국론도 이유가 될수 있다. 훈구, 사림, 서인, 동인, 남인, 북인, 노론, 소론, 대북, 소북, 시파, 벽파 등 헤아릴 수 없는 파벌들과 잦은 환국(換局) 그리고 사화(士禍). 물론 당쟁이 나라를 좀 먹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접근법은 문제의 일부를 짚는 것에 그치고, 근본적인 원인 분석이라 할수 없다.

500년 왕조가 무너지고 수천만 조선인들이 일제의 핍박을 당하도록 한 망국의 근본적 이유는 나라의 힘이 약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나라의 힘을 약하게 만든 원인은 무엇인가.

언론인 이덕주는 「조선은 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는가」(2001년 11월, ‘에디터’ 刊)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그러나 만약에 조선이 건전한 체제를 유지했다고 하더라도, 침략해 들어오는 열강의 무력을 막아낼 자위력이 있었겠느냐 하는 점이다. 쉽게 말해서 전쟁에서 일본에 패배한 청국과 러시아보다 더 강한 군사력을 유지했어야 일본의 침공을 막아낼수 있었지 않은가 하는 가정이다.

당시 조선의 체제로서는 이러한 자위력을 갖추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조선은 망했고 궁극적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조선은 부국강병의 기회를 놓쳤고, 그 사이에 일본은 나라의 부와 군사력을 키웠다. 그 국력의 차이가 조선 망국의 결과를 초래했다.

성리학 이념에 묻혀 안주했던 누습적인 사고와 고식적인 생활태도가 이미 조선을 폐쇄적이고 배타적으로 만들었다. 오랫동안의 안일한 생활태도 자체가 이미 조선인의 문제의식을 무디게 만들었고, 따라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고 소화할 수 있는 힘을 길러놓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 결과 조선은 재빠르게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이루어 강국의 체제를 갖추지 못했고, 그럴 힘이 없었다.

이에 비해 조선을 집어삼킨 일본은 도쿠카와의 에도 300년 시대 동안 돈벌고 총 쏘는 공부를 했고,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서양문물을 성공적으로 수용했다. 그 시기에 조선은 유교 이념에 매몰되어 있었다. 따라서 부국강병을 소홀히 했으며 자주적 근대화의 기회를 놓쳤다. 그리하여 36년간 일본에 의해 강제로 근대화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에 저항해 자결한 중국 혁명사상가 진천화(陳天華)는 유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강하고 잘났는데 누가 감히 나를 넘볼 것이며, 내가 약하고 못났는데 누가 덮치지 않겠는가.”

이탈리아 역사학자 베네데토 크로체가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다“라고 말했다. 경술국치는 잊지 말아야 할 불행한 과거이면서, 오늘의 역사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교훈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언젠가 또 국치의 상황을 맞을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새겨야 한다.

 

▲ 1910년 8월 29일 조선총독부 관보에 게재된 한일병합조약 한국어 원문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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