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9 오늘] 캘리포니아 골드러시…일확천금의 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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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9 오늘] 캘리포니아 골드러시…일확천금의 군상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8.18 17: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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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헤럴드 보도에 전세계 이민자 쇄도…캘리포니아, 2년만에 주로 승격

 

1848년 1월 24일 미국 캘리포니아 콜로마(Coloma)라는 마을의 제재소에서 일하던 제임스 마셜(James W. Marshall)이라는 현장 감독이 아메리칸 강(American River)에서 반짝이는 물질을 발견했다. 그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것을 제재소 주인인 존 서터(John Sutter)에게 가져갔다. 금(金)이었다.

서터는 그 근처에서 대규모 농장을 차리려던 계획에 차질이 빚어질까 걱정해서 그 사실을 비밀에 부쳤다. 하지만 소문은 금새 퍼지기 시작했다.

금이 발견되던 그 시점의 콜로마는 멕시코 영토인 알타 캘리포니아주에 속해 있었고, 며칠후인 2월 2일 캘리포니아는 미국-멕시코 전쟁 결과로 맺어진 조약에 의해 미국에 할양되었다. 당시 캘리포니아는 공식적으로 미국의 주(stat)가 아니라 준주(territory)의 상태였다.

소문은 미국 동부로 스며들었다.

그해 8월 19일 뉴욕헤럴드가 이 사실을 보도했다. 당시 뉴욕헤럴드는 발행부수 8만4,000부로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이었다. 뉴욕헤럴드의 보도는 미국 동부지역은 물론 전세계로 전파되었다.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야심있는 많은 사람, 특히 헐벗고 가난한 사람들을 환장하게 했다. 게다가 그곳은 이제 막 미국령이 된 무주공산의 땅, 먼저 가서 발견하면 그 금은 내것이 되었다. 일확천금(一攫千金)은 바로 그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미국 동부의 시중잡배는 물론이고 유럽, 남아메리카에서도 이민의 물결이 캘리포니아로 쇄도했다. 역사상 최초의 세계적인 골드러시(Gold Rush)였다.

 

▲ 캘리포니아 골드러시 때 금 캐는 모습 /위키피디아

 

샌프란시스코는 골드러시 이전에 조그마한 개척지에 불과했다. 하지만 금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선주나 사업가들이 모든 걸 내핑개치고 공짜 금을 주으러 덤벼들었다. 귀신이 나올법했던 캘리포니아 마을들에 새로운 사람들이 밀려들면서 갑자기 인구가 불어났다. 샌프란시스코의 인구는 1848년 약 1,000명에서 1850년에는 2만5,000명으로 늘어났다.

주권이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넘어가던 시기였으니, 치안은 부재했고 무법천지의 상황이 연출되었다. 갑작스런 인구 유입으로 샌프란시스코나 금광 가까운 마을에 기초시설이 모자라게 되었다. 사람들은 텐트나 목재로 지은 가건물, 혹은 버려진 선박에서 살기도 했다. 금이 발견된 곳은 어디라도, 수백 명의 광부가 공동으로 캠프를 만들고 채굴권을 주장했다. 막 생겨난 판자촌에는 술집이나 도박장이 생겨났다.

1849년에 많은 이주자들이 캘리포니아에 몰렸다고 해서 그들을 일컬어 포티나이너(Forty-niner)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1849년초엔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의 소문은 전세계에 퍼졌고, 수많은 채굴자와 상인들이 모였다. 포티나이너의 대부분은 미국인이며,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사람들도 이 소식을 접하고 캘리포니아로 가는 배를 탔다. 라틴 아메리카로부터 온 사람들, 중국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유럽에서 온 이민자는 대부분은 혁명 과정을 피해온 프랑스 사람들이었고, 독일인과 이탈리아인, 영국인도 있었다.

 

하지만 캘리포니아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당시 철도나 도로가 없었다. 미국 동부에서 금을 찾아 떼를 지어 마차로 타고 이동하는 모습은 영화에 흔히 나온다. 중도에 죽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 금 매장지역 /위키피디아

당시엔 파나마 운하가 뚫리지 않은 시기였으므로, 미국 동부 사람들은 남미 최남단을 돌아 5~6개월 동안 3만km를 배로 여행한 사람들도 있었다. 또 파나마 지협의 대서양 측에 도달해, 정글을 카누나 로바를 이용해 빠져 나가 태평양 쪽에서 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사람도 있었다.

갑자기 인구가 불어나면서 전세계에서 생활필수품이 캘리포니아로 수송되었다. 중국 도자기와 비단, 스코틀랜드의 물품이 샌프란시스코에 몰렸다. 배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면, 선원들이 탈출해 금광으로 가버리는 바람에 선장들이 골머리를 앓았다. 샌프란시스코 부두와 도크는 수백 척의 배가 버려진 채로 남아, 마스트의 숲이 되었다. 샌프란시스코의 기업가는 버려진 선박을 창고, 술집, 호텔, 심지어 감옥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캘리포니아의 금은 그 많은 사람들의 야망을 충족시키기엔 부족했다. 금새 금이 고갈되면서 사람들은 접근하기 힘든 곳으로 금을 찾아 나서게 되고, 금광 개발에 실패한 사업주와 노동자들이 남미계와 중국계 광부에게 공격을 하고, 인근 인디언들에게 무차벌 총격을 가하기도 했다. 백인들의 학살에 사라진 인디언 부족도 있었다.

극히 일부는 부자가 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실망했고,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 1850–51년 샌프란시스코 항 주변 /위키피디아

 

다만 이 사건은 막 새로운 영토로 편입된 캘리포니아에 단기간에 인구가 늘어나게 촉진시킨 긍정적 효과는 있었다.

1849년에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이들은 대략 9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그 절반은 육로를 통해서, 나머지는 해로를 통해서 왔다. 이 가운데 5만 명에서 6만 명 정도는 미국인이었고, 나머지가 다른 나라에서 온 이들로 구성되었다. 1855년까지 적어도 30만 명의 금 탐색자들과 상인, 이민자들이 전 세계로부터 캘리포니아에 도착했다.

급격한 인구팽창으로 캘리포니아는 영토편입 2년만인 1850년 9월에 정식으로 미국 31번째 주(州)로 편입되었다. 이처럼 단기간에 주로 승격된 예는 미국 역사상 드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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