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년에 되새기는 정유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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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년에 되새기는 정유재란
  • 김송현 기자
  • 승인 2017.01.03 11: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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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명량해전…“아직도 제게 전선 12척이 남아있습니다”

420년전, 丁酉재란을 극복한 인물은 忠武公 李舜臣이다.

李舜臣은 1597년(丁酉年)에 선조 임금에게 장계를 보냈다.

 

今臣戰船尙有十二 (금신전선상유십이)

出死力拒戰 則猶可爲也… (출사력거전 칙유가위야… )

戰船雖寡 微 臣不死 (전선수과 미 신부사 )

則賊不敢侮矣. (칙적부감모의.)

 

이제 제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있으니

죽을 힘을 내어 항거해 싸우면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비록 전선은 적지만 제가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丁酉再亂은 420년전 정유년에 일본이 재침략한 가장 참혹했던 전란이다.

1597년 7월 16일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패하였다. 8월 3일 충무공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12일 후 선조는 선전관 박천봉이를 시켜서 밀지를 가지고 왔는데 "수군을 해산하고 육군과 합세하여 육전하라"는 말에 국가의 존망이 걸려있는 수군을 없앨 수는 없다며 올린 장계다

 

李舜臣 장군 어록 중에

 

兵法云...(병법운) 必死則生 必生則死 (필사즉생 필생즉사)

又曰 (우왈) 一夫當逕 足懼千夫 (일부당경 족구천부)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하였고,

또한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한다.”

 

명량해전이 벌어지기 하루 전인 1597년 9월 15일. 긴박했던 날 일기에서 이 말은 '오기병법'의 '치병편' 제3장에서 연유된 말이다. 무릇 전쟁터란 한 번의 실수로 시체가 되는 죽음의 땅이다. 필사적으로 싸우면 살아날 수 있고 요행히 살려고만 하면 죽게된다.

一夫當逕 足懼千夫 (일부당경 족구천부)는 진나라 左思가 지은 촉도부(蜀都賦)에서 유래하는 말이다.

▲ 서울의 기점인 세종로 이순신동상. /사진=김인영

정유재란 중 대표적인 전투가 이순신 장군의 명랑해전이다. 조선 선조 30년(1597년)에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 명량에서 12척의 전선로 적 함대 133척을 맞아 싸워 31척의 적선 을 격파하여 크게 이긴 전투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칠천량해전 왜적선에 대패하고 겨우 12척만 도망해 남았다. 이 때 조정에서는 수군이 너무도 미약하므로, 이순신에게 육군에 종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순신은 수군의 작전이야 말로 승리의 요체임을 단호하게 주장했다.

「이충무공전서」에 이순신의 주장이 잘 나타나 있다. “저 임진년(壬辰年)부터 지금까지 5~6년 동안 적이 감히 충청, 전라도를 곧장 돌진해 오지 못했던 것은 실상 우리 수군이 길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제게 전선이 아직도 12척이나 남아 있습니다. 죽을 힘을 내어 항거해 싸우면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제 만일 수군을 모두 폐하여 버린다면 적은 천 번 만 번 다행한 일로 여길 뿐더러, 충청도를 거쳐 한강에까지 갈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제가 걱정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또 전선은 비록 적지만, 제가 죽지 않는 이상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 /영화 명량 사이트

마침내 왜적선 8척이 8월 28일 새벽 6시쯤 어란진 앞바다에 출현하였다. 이순신 함대는 장도)로 이동해 밤을 지내고, 8월 29일 진도의 벽파진에 도착해 보름 동안 머물렀다 9월 15일 조수를 타고 해남군 문내면 우수영으로 진을 옮기어 울돌목을 지켰다.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김억추에게 수중철색을 쓸 수 있도록 명령을 내리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왜적선은 200여 척 가운데 55척이 9월 14일 어란진에 도착하였고, 9월 16일 오전 11시쯤 전투가 시작됐다. 일차로 수중철색에 왜적선이 걸려 전진하지 못하자, 곧바로 뒤를 따라오던 왜적선이 그들의 앞 배에 충돌하게 함으로써 왜적선 133척 가운데 무려 31척을 깨뜨리는 전과를 올렸다.

「선조실록」(선조 30년 11월 10일)은 이렇게 기록했다.

『삼도 수군 통제사 이순신의 치계에 의하면 ‘한산도가 무너진 이후 병선과 병기가 거의 다 유실되었다. 신이 전라우도 수군 절도사 김억추 등과 전선 13척, 초탐선 32척을 수습하여 해남현 해로의 요구(要口)를 차단하고 있었는데, 적의 전선 1백30여 척이 이진포 앞바다로 들어오기에 신이 수사 김억추, 조방장 배흥립, 거제 현령 안위 등과 함께 각기 병선을 정돈하여 진도 벽파정 앞바다에서 적을 맞아 죽음을 무릅쓰고 힘껏 싸운바, 대포로 적선 20여 척을 깨뜨리니 사살이 매우 많아 적들이 모두 바다속으로 가라 앉았으며, 머리를 벤 것도 8급이나 되었다. (중략)’ 하였다. (중략)

한산도가 무너진 이후부터 남쪽의 수로에 적선이 종횡하여 충돌이 우려되었으나 현재 소방의 수군이 다행히 작은 승리를 거두어서 적봉이 조금 좌절되었으니, 이로 인하여 적선이 서해에는 진입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해전은 세계 해전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완전무결한 승리의 사례다.

▲ 영화 명랑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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