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의 경제사적 관점④] 조선의 銀 제련 기술 훔쳐간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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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경제사적 관점④] 조선의 銀 제련 기술 훔쳐간 일본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6.11.12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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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세계 2위 은 생산대국으로 성장

14세기초(1308~1310년)에 일본 혼슈의 시마네(島根)현에 은이 발견됐다는 기록이 있다. 이 일대의 은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16세기초다. 1526년 하카다(博多:후쿠오카)의 상인 가미야 히사사다가 이 일대를 지나다가 바다에서 산이 빨갛게 빛나는 것을 보고 뱃사람들에게 물어보았더니, “그것은 긴뿌산(銀峰山)인데, 옛날에 은이 나왔던 곳“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이 상인은 광부들을 데리고 와 산허리에서 은을 채굴했다.

이렇게 시작된 이와미(石見) 은광은 수십년후 동아시아를 뒤흔들었다. 이와미 은광에서 생산된 은은 중국에 건너가 대량으로 유통됐고, 조선에서도 거래됐다. 이 은광을 놓고 일본 군웅들이 각축전을 벌였고, 이 곳을 장악한 세력이 일본을 통일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와미 은광

처음에 은광이 발견됐을 때 은광석에 다량의 납이 함유돼 있었다. 은 광석은 풍부했지만, 제련하는 기술이 후진적이어서 생산량이 늘지 않았다. 이때 조선에서 개발된 은 제련법이 일본에 건너왔다.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1503년)에 이런 기사가 나온다.

「양인 김감불(金甘佛)과 장례원 노비 김검동(金儉同)이 납으로 은을 불려 바치며 아뢰기를, “납 한근으로 은 두 돈을 불릴수 있는데, 납은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니, 은을 넉넉히 쓸수 있게 되었습니다. 불리는 법은 무쇠 화로나 남비 안에서 매운 재를 조각조각 끊어서 그 안에 채운 다음 깨진 질그릇으로 사방을 덮고 숯을 위애래로 피워 녹입니다”라고 아뢰니, “시험해 보라”고 하였다.」 (연산 9년 5월 18일)

당시로선 첨단 은제련술인 연은분리법(鉛銀分離法)이 조선에서 개발돼 활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이 기술은 회취법(灰吹法)이라고 불렸다. 조선에서 개발된 기술은 정작 일본에서 빛을 발하게 된다. 당시 조선을 드나들었던 왜상(倭商)들이 이 기술을 절도한 것이다. 현대로 치면 기술 유출인 셈이다.

조선의 은 제련술이 건너가기 이전에 일본의 제련기술은 원시적인 수준이었다. 채굴한 은광석을 쌓아놓고 닷새 이상 나무를 때서 가열시킨후 남은 재에서 은을 추출하는 수준이었다. 제련에 들어가는 비용과 노동력에 비해 경제성이 신통치 않았다.

16세기 전반에만 해도 일본에서 은광석을 배에 싣고 조선에 가져와서 제련했다. 그러다가 조선에서 개발된 세계최초 첨단기법이 전해져 일본을 경제대국의 길로 접어들게 한 것이다.

여기에 조선인도 한몫했다. 「조선왕조실록」 중종실록(1539년)에 이런 기록이 나온다.

「(전라도 전주판관) 유서종이 왜놈(倭奴)과 사사로이 통해서 연철(鉛鐵)을 많이 사다가 자기 집에서 불려 은(銀)으로 만드는가 하면, 왜놈에게 그 방법을 전습하였으니, 그 죄가 막중합니다. 철저히 조사하여 법대로 죄를 정하소서.」 (중종 34년 8월 10일)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일본인들이 조선의 은제련술을 훔쳐간 것은 1530년대초로 추정된다. 일본인들이 조선에 은광석을 가져와 제련하면서 조선의 제련법을 훔쳐갔고, 유서종이 이를 방치한 것이다.

조선에서 개발된 회취법은 당대 유럽의 은제련법보다 획기적이었다. 스페인이 볼리비아 포토시에서 사용했던 은정제법은 수은아말감 공법이었다. 이 방법으로 대량의 은을 제련하면서 수은가스 중독으로 인디오 800만명이 희생됐다. 하지만 일본은 조선의 기술을 훔쳐감으로써 인명 피해도 줄이고, 세계적인 은 생산국으로 부상했다.

조선에서 회취법이 도입되면서 이와미 은광은 급속도로 발전했다. 일본 전역에서 은광 개발 붐이 일어났다. 전국의 다이묘들은 은광산 개발에 열중했다. 16세기 중반 일본은 남미 은광을 소유하고 있는 스페인에 이어 세계 2위 은생산국으로 등장했다. 임진왜란 직전인 16세기말, 이와미 광산을 비롯, 일본산 은은 전세계에서 생산된 은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당시 은은 국제통화였고, 중국에선 은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무역도시 하카다의 상인이 개발에 적극 참여했기 때문에 이와미 은광은 동아시아 교역의 중심에 섰다. 이익이 발생하는 곳엔 분쟁이 발생한다. 때는 강한자가 약한자를 잡아먹던 전국(戰國)시대였다. 처음엔 영주였던 오우치 가문이 이 광산의 운영권을 가졌지만, 곧이어 소영주 오가사와라 가문이 은광을 탈취했다. 다시 오우치 가문이 뺐는데 3년이 걸렸다. 오우치 가문은 은광 주변에 성을 요새화했다. 1537년엔 이즈모의 아마고 가문이 이와미를 공격해 은광을 빼앗았다. 2년후 오우치 가문이 탈환했지만, 다시 아마고 가문에게 빼앗겼다. 은광을 둘러싸고 두 가문의 쟁탈전을 계속됐다.

최종 승리자는 오우치 가문을 계승한 모리가문. 1584년 모리 가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복속한다. 이와미 은광은 모리가문과 도요토미 가문이 공동으로 관리하게 되고, 임진왜란의 군자금은 이 곳에서 충당되었다.

은광을 소유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모리 가문과 손잡고 중국, 조선등 해외 여러나라와 무역을 했고, 수입품에는 조총도 포함됐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일본이 중국에 은을 팔아 이문을 남긴다는 기록이 있다. 중종실록(1541년)에는 “지금 왜인들이 중국의 남쪽 지방에 은을 팔면 이윤이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은을 사간다고 합니다”라는 기사가 있다.(중종 36년 11월 24일) 일본 상인들은 일본에서 생산된 은은 물론 조선의 은도 가져가 중국에 비싼 값으로 팔았던 것이다. 중국사에서 이들은 왜구로 불렸다. 도요토미가 일본을 통일하기 직전, 지방에서 독자적으로 운영되던 왜구들은 중국 님부 절강·복건성 등지의 호족들과 손잡고 은을 거래했고, 때로는 폭력적인 방법(왜란)으로 밀무역을 감행했다. 왜구들도 중국과 일본 사이의 환차익을 알았다. 중국에서의 금·은의 교화비율(1대6)과 국제적 환율(1대12) 사이에 차이가 발생했고, 일본상인들은 조선의 은도 가져가 환차익을 챙겼던 것이다.

이와미 은광

도요토미는 부유한 상인을 부하로 두었다. 전쟁에는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도요토미는 당시 긴키(近畿) 지방 최대무역항인 사카이(오사카)를 차지한데 이어 대륙의 출입구인 하카다를 점령했다. 그리고 내린 조치가 해적행위 금지령이었다.
임진왜란 4년전인 158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열도 통일을 눈앞에 두고 해상 사무라이집단에 대해 해적정지령(海賊停止令)을 내렸다. 당시 해적(왜구)은 해안지역에서 호족 성격을 띠었다. 다이묘들이 해적들에게 해상영지를 주었고, 이들은 밀무역에 종사하거나, 조선과 중국의 해안지역과 상선을 약탈하기도 했다. 막부의 권위가 실추되고 권력이 분산될 때 해적집단은 정치적으로 독립하기도 했다.

도요토미의 해적행위 금지령으로 전국의 해적들은 도요토미 정권에 복속되거나 무장을 해제하고 일반 백성으로 전환되거나 둘중 하나의 선택을 강요받았다. 이 조치로 왜구는 사라진다. 도요토미가 중국과 조선을 괴롭히던 왜구의 침략행위를 중단시키기 위해 자애를 베푼 것은 아니었다. 그는 독립적이었던 왜구의 무역권을 장악하고, 그 전력을 정규 수군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도요토미는 조선과 중국에 무역을 요구했다. 하지만 중국은 해금정책을 풀지 않았고, 조선도 삼포왜란 이후 일본과의 거래를 중단했다. 이에 도요토미는 망상적 판단을 내린다. 1591년 도요토미는 겐소(玄蘇)등의 사신을 조선에 보내 “명나라를 치는데 길을 빌려달라”는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요구한다. 조선으로선 들어줄수 없는 요구였다.

조선을 침략한 직후 도요토미가 관백(關白)인 히데츠구(秀次)에게 보낸 문서에서 천하 계획을 밝힌다.

“명의 수도 베이징에 천황을 옮겨 수도로 삼고, 수도 근처의 10개국을 직할지로 진상하고, 귀족들에겐 토지세 징수를 열배 증가시킨다. 히데츠구를 명의 관백으로 삼아 수도근처의 100여개 나라를 준다. 나는 닝보(寧波)를 거소(居所)로 하며, 조선의 수도에는 이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나 누구를 이주시키고, 조선 국왕은 체포해 일본에 끌고 온다.”

도요토미는 조선과 명, 류큐, 고산국(대만) 필리핀(스페인령), 인도(포르투갈령)에 외교문서를 보내 “일본은 통일되었고, 천하와 이역(異域)의 통일은 천명이며, 따라서 명나라를 친다”고 적었다.

당시 그의 생각은 과대망상이었다. 하지만 300년후 일본제국주의자들은 그의 망상을 실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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