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홍어장수 문순득, 오키나와 필리핀 다녀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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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홍어장수 문순득, 오키나와 필리핀 다녀오다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6.05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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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마르코폴로…정약전, 정약용에도 영향

 

로드리고 두테르테(Rodrigo Duterte) 필리핀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방문해 문재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5일에도 방한 일정을 보냈다.

필리핀은 한국 전쟁 당시에 미국,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참전했으며, 내년이면 수교 70주년을 맞는 오랜 우방국이다. 인구 1억명, 면적 한반도의 1.3배, 7,000개의 섬으로 구성된 필리핀은 우리나라와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나라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필리핀과 우리나라의 교류는 대단히 드물다.

 

▲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4일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청와대

 

필리핀은 동양권에서 여송국(呂宋國)이라고 불렀다. 필리핀 북쪽 큰 섬인 루손(Luzon)의 중국식 음차로 보인다. 중국 기록엔 마닐라 근처에 수도를 둔 나라였다고 하며, 몽골(元)의 침략에 저항하던 남송의 잔당이 도망쳐 와 나라를 세웠다는 설도 있다.

조선시대 「순조실록」에 여송국의 존재가 확인되는데, 1801년에 제주도에 표착한 여송국 사람을 송환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 과정에서 여송국을 다녀온 문순득((文順得)이란 인물이 등장한다.

필리핀은 스페인 사람들이 도착하기 이전까지는 마땅한 역사 기록이 없다. 명나라 정화(鄭和)가 60여 척의 배를 이끌고 3차례에 걸쳐 정벌하기도 했으며, 14세기에 남부 민다나오에 이슬람 왕국이 건설되었다.

필리핀이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한 것은 스페인 탐험가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1521년 도착하면서부터다. 그후 스페인은 여러차례 탐사대를 보내 필리핀 제도를 조사했으며, 1543년 러이 로페스 데 비야로보스가 이끄는 탐사대가 사마르와 레이테 섬을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의 이름을 따서 라스 이슬라스 필리피나스(Las Islas Filipinas)라고 이름을 지었고, 그후 스페인 점령기에 전 섬을 필리핀(Philippines)이라 불러, 오늘날 나라 이름이 되었다.

1898년 미국이 스페인과의 전쟁(미-서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아 통치했다.

일본은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한 다음날인 1941년 12월 8일, 루손섬의 클라크 공군기지를 공습한 뒤 필리핀을 점령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다시 미국령으로 복귀했다가 1946년 독립했다.

 

▲ 표류 /문화재청

 

그러면 「순조실록」에 나오는 문순득(文淳得)이라는 사람의 필리핀 표류기를 들어보자.

문순득(1777~1847)은 나주 신안 우이도(牛耳島)에 사는 홍어장수였다. 1802년 정초쯤 문순득은 마을 주민과 함께 홍어를 사기 위해 태사도(太砂島)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흑산도 근처에서 풍랑을 만났다.

일행은 1802년 1월 일본 오키나와의 유구국(琉球國)에 표착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류큐국은 독립국이었다. 유구국 사람들은 문순득 등 표류자들을 잘 보살펴 주었고, 일행은 그곳에서 후한 대접을 받았다.

8개월 동안 유구국에서 생활한 문순득 일행은 유구국 언어를 배우고, 현지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조선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알아냈다. 방법은 중국으로 가는 유구국의 조공선을 타고 중국에 간 다음 조선으로 건너가는 것이었다.

▲ 문순득 /문화재청

1802년 10월, 일행은 유구국에서 중국으로 가는 조공선에 몸을 싣는다. 그들은 고향집으로 돌아가는줄 알고 꿈에 부풀었다.

하지만 중국으로 가는 길에 또 풍랑을 만났다. 2차 표류였다. 이번에는 유구국 남쪽으로 떠내려가 여송국에 표착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 일행들은 뿔뿔히 흩어지고, 문순득만 여송에서 9개월을 지내면서 현지 언어를 습득한다.

1803년 8월 문순득은 여송에서 상선을 얻어타고 마카오에 도착해 난징과 베이징을 거쳐 1804년 12월 조선 한양에 도착하고, 마침내 집을 떠난지 3년 2개월만인 1805년 1월 고향인 우이도로 돌아오게 된다.

 

여기까지 끝났으면 그의 기구한 스토리는 영원히 묻혔을 것이다.

고향에 돌아온 문순득은 다시 홍어 장사를 하기 위해 흑산도에 들렀다. 배운 것이 어물장사니, 달리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 그는 흑산도에서 유배온 정약용의 형 정약전을 만나게 된다.

문순득은 정약전에게 풍랑을 만나 표류하며 보고 들은 바를 전해주었고, 정약전은 문순득의 체험담을 날짜별로 기록한 「표해시말」(漂海始末)이라는 책을 썼다.

문순득의 표류기는 정약전의 동생 정약용에게도 전해졌다. 정약용은 여송국에서 사용하는 화폐의 유용함을 전해듣고, 「경세유표」에서 조선의 화폐개혁안을 제안하게 된다. 당시 필리핀은 스페인의 식민지로, 남미 칠레 광산에서 생산한 대량의 은(銀)을 아시아에 유통하고 있었고, 아시아, 특히 중국의 통화는 은본위제였다.

정약용은 전남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제자 이강회(李綱會)를 우이도로 보내 문순득을 만나게 하고, 그를 통해 외국의 선박과 항해에 관해 기록한 「운곡선설」(雲谷船說)을 집필하게 한다.

 

▲ 문순득의 표류 여정 /문화재청

 

한편, 1801년(순조 1년)에 5명의 외국인이 제주도에 표착했는데, 조선 조정에서는 이들과 말이 통하지 않아 어느 나라에서 온 사람들인지 알 길이 없었다. 이 외국인들은 9년째 제주도에 머물고 있었는데, 여송국 언어를 알고 있는 문순득이 이들이 여송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는 여송어로 통역해 그들은 마침내 고향인 여송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순조실록」이 생선장수 문순득의 이름을 기록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순조실록」은,

“나주 흑산도 사람 문순득이 표류되어 여송국(呂宋國)에 들어갔었는데, 그 나라 사람의 형모와 의관을 보고 그들의 방언(方言)을 또한 기록하여 가지고 온 것이 있었다. 그런데 표류되어 머물고 있는 사람들의 용모와 복장이 대략 서로 비슷하였으므로, 여송국의 방언으로 문답하니 절절이 딱 들어맞았다.”고 기록했다.

조선 조정은 문순득의 공적을 헤아려 종2품 가선대부 벼슬을 담은 공명첩을 하사했다.

 

혹자는 문순득을 14세기 베네치아 상인 마르코 폴로라고 비유했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담을 로스티켈로라는 이야기 작가가 정리해 불후의 「동방견문록」을 정리했듯이, 문순득의 표류기는 정약전, 정약용에 의해 정리된 것이다.

문화재청은 2012년말 「홍어장수 문순득, 아시아를 눈에 담다」라는 주제로 전남 목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특별기획전을 열었다. 전남 신안군 우이도 우이도항에는 문순득 동상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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