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 110주년에 되새기는 독립의병장 이강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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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110주년에 되새기는 독립의병장 이강년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6.02 18: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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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의병의 날’ 기념식, 1일 경북 문경 이강년 기념관에서 열려

 

“한평생 이 목숨 아껴본 바 없었거늘 죽음 앞둔 지금에서야 삶을 어찌 구하려 하나만 오랑캐 쳐부술 길 다시 찾기 어렵구나 이 몸 비록 간다고 해서 넋마저 사라지랴.”

구한말 독립의병장 운강(雲崗) 이강년(李康䄵, 1858. 12. 30~1908. 10. 13)이 옥중에서 남긴 글이다.

 

▲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이 1일 경북 문경 이강년 기념관에서 열린 '제8회 의병의 날’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김부겸 장관 페이스북

 

'제8회 의병의 날’ 기념식이 지난 1일 경북 문경시 운강 이강년 기념관에서 전국 의병단체 대표와 후손, 지역주민, 학생 등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이 기념식에 참석했다. 김 장관은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 위에 뿌려진 선조들의 의혈(義血)과, 한반도를 에워싼 주변 열강들에 분연히 맞서온 한민족의 의기(義氣)를 다시 생각한다”면서 “민족과 조국을 위해 목숨 바쳐 싸웠던 의병들의 희생을 기리며, 그 정신을 한시도 잊지 않을 것을 맹서했다”며 선생의 뜻을 기렸다.

올해는 이강년 선생 순국 110주년이 되는 해로, 이강년 기념관과 생가가 있는 문경에서 행사가 열렸다.

 

▲ 경북 문경의 이강년 생가 /문화재청

 

운강 이강년 선생 일대기

 

이강년 선생의 본은 전주이며 철종 9년 1858년 12월 30일 경상북도 문경군 가은면 도태리에서 아버지 이기태와 어머니 의령 남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호는 운강(雲崗)이다.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백부의 집에서 자랐으며, 장성하면서 기골이 점차 장대하고 키가 여덟 자가 넘었고 눈빛은 불이 넘치는 것 같아 위엄이 넘쳐 흘렀다고 한다.

1880년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어 벼슬길에 올랐으나 1884년 갑신정변 후 물러나 고향에 내려가 학문에만 열중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동학군에 투신했다. 이때 휘하에서 농민군으로 활약하며 심산유곡을 누볐던 많은 농민들이 후에 의병항쟁에 가담하게 되었고 보급조달, 지형탐색, 현지 정보망 구축과 같은 의병항쟁에 있어 긴요한 전략자원을 구축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894년에 청일전쟁, 갑오개혁에 이어 1895년 8월 명성황후시해, 단발령등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을미의병으로 알려진 의병전쟁이 시작되었다. 특히, 단발령은 전국의 재야 유생들을 분개시켜 전쟁의 직접적 불씨가 되었다.

 

▲ 경북 문경의 이강년 기념관/운강 이강년 기념관 블로그

 

이때 선생은 다시 군사를 일으켜 일인들을 소탕하고자 결심했다. 제천에 유인석 의병대가 형성되었다는 말을 듣고 1896년 2월 23일 자신의 가산을 흩어 군사들을 모집하고, 문경에서 왜적의 앞잡로 양민을 토색질하던 안동관찰사 김석중 등 3명을 생포해 농암시장에서 효수(梟首)했다.

선생은 의병을 거느리고 안동의 창의대장 권세연을 만나 군사상의 문제를 의논하고, 제천으로 가서 유인석 선생을 찾아 합류했다. 유인석 의병진의 유격장이 된 선생은 1896년 3월 17일 전군장 홍대석과 함께 군사 6초(哨)를 거느리고 수안보의 병참을 공격했고, 이후 9초(哨)를 거느리고 중군 윤기영과 함께 문경 평천으로 진군하였다. 그러나 그해 4월 제천 의진이 장기렴이 거느린 관군에게 패하자 유인석은 중국 요동으로 건너갔다.

이때 선생은 유인석의 뒤를 좇아 압록강을 거쳐 만주로 들어가고자 했지만, 영월에서 진로가 막혀 소백산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백산으로 들어간 선생은 보급이 어렵고 이탈자가 늘어나 의진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지자 일단 의병을 해산하고 단양 금채동에 은신했다.

선생은 1897년 4월 요동으로 들어가 유인석을 비롯한 여러 의병장을 만나 장백, 무송, 즙안, 임강 등에서 이주민 자치단체를 결성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선생은 고국으로 돌아가서 백성들에게 항일의식을 불어넣고 이를 기반으로 직접 적과 부딪혀 싸우면서 국가의 안녕과 왕실의 권위를 되찾아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서 그 해 7월 다시 단양으로 돌아왔다.

한편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1905년 11월 17일 고종황제를 겁박해 을사조약을 체결했고, 이를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다시 의병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1907년 군대의 해산은 당시 의병항쟁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다. 해산한 군인들이 대부분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의병으로 전환했다.

선생은 1907년 3월 유인석과 상의한 후, 강원도 원주, 횡성 등지에서 군사를 모집했다. 이어 6월에 원주읍의 무기고를 열어 병장기를 거두고 군세를 확충했다. 7월 제천읍으로 진군, 군대해산에 반대하여 원주 진위대를 이끌고 봉기한 민긍호 의진, 조동교, 오경묵, 정대무 의진 등과 연합하여 제천전투에서 500여 명의 적을 토벌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고종황제는 선생을 도체찰사(都體察使)에 제수하며 밀조를 내렸다.

“선전관 이강년으로 도체찰사를 삼아 지방 4도에 보내니 양가(良家)의 재주 있는 자제들로 각각 의병을 일으키게 하며 소모장(召募將)을 임명하되 인장과 병부(兵符)를 새겨서 쓰도록 하라. 만일 명을 좇지 않는 자가 있으면 관찰사와 수령들을 먼저 베이고 파직하여 내쫓을 것이며, 오직 경기(京畿) 진영의 군사는 나와 함께 사직에 순절할 것이다.”

제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구름같이 모여든 40여진이 제천에서 선생을 도창의대장으로 추대했다. 선생은 제천 백묘에서 진을 치고 원주 민긍호, 청풍진 조동교와 연합해 충주의 일본군을 공격하기로 약속했다. 충주는 군사상 요충지로 이곳의 공략은 의병활동의 거점 마련이라는 의미가 있었다. 7월 15일 행군을 시작해 충주를 치고자 작전을 벌였으나, 각 의진이 시기를 놓쳐 충주 진격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한편, 선생은 일제 앞잡이 김기찬과 일진회 회원 김상호를 총살하여 친일매족행위를 징계하였다. 원주에서 탄환을 보충하여 전력을 보강한후 8월 3일 주흘산 혜국사 승려들의 지원을 받아 갈평으로 적을 쳐부수고 총과 탄환, 투구 등을 노획해 다음날 다시 갈평에 나아가 순검 1명을 총살하고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여 괴성에서 일본군 장교와 병사를 잡아 효수하고 무기를 노획했다.

8월 중순에서 9월 중순까지 단양 유치, 영월, 병두, 연풍 등지에서 적과 대치했으나, 전세는 불리했다. 9월에 들어 김상한, 윤기영, 주광식이 군사를 거느리고 합세하자 전세를 회복했다. 9월 16일 제천 추치에서 대전하여 적 200명을 사로잡았고, 9월 27일 죽령에서 다시 적 200명을 사로잡았으며, 10월 5일 단양 고리평에서 적 80명을 사로잡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후 10월 23일 풍기 백자동 전투에서 적 100명을 사로잡아 승전했지만, 11월 12일 풍기 복상동에서는 대패하고 말았다. 선생은 거병한지 12년에 이때처럼 패배한 때는 없었다고 탄식하며 부하들의 죽음을 슬퍼했다.

이 무렵 각지에서 분산해 전개되어온 의병들이 이인영과 허위등의 의병장을 중심으로 대일연합전선의 형성을 도모했다. 전국의 의병부대들이 하나의 통합된 지휘부 밑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 경기지방으로 모여 서울을 포위하고 일제 통감부와 담판하고 일제를 한국에서 몰아내는 연합의병운동을 전개할 계획이었다. 그해 11월 각 의병진에 통문을 띄워 전국의 의병들이 경기도 양주에 모일 것을 호소하고 13도 창의대진소를 결성하였는데, 선생은 호서창의대장에 선임되었다.

선생은 대규모 항쟁계획에 호응해 즉각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약속한 기일 내에 양주로 집결하기 위해 북상을 서둘렀다. 박장호 의진과 연계하여 경기도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11월 21일 전동, 12월 3일 낭천, 12월 5일에는 경기도 건천에서 일제의 저지선을 뚫어야 했다. 그러나 혹독한 폭설과 추위로 교통이 마비되고 식량과 탄약의 조달이 어려워 더 이상의 진군이 어려웠다. 결국 선생은 서울진공을 미루고 후일을 도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1908년 6월 4일 청풍 까치성 전투에서 장마비로 인해 화승총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퇴로가 막혀 고전하던 끝에 선생은 복사뼈에 탄환을 맞아 적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선생은 충주로 압송되었다. 선생은 결국 교수형을 선고 받고 1908년 10월 13일 51세 일생을 마쳤다. 저서로는 「운강문집」이 있고 그 제자와 의병시절의 부하들에 의하여 엮어진 「운강선생 창의일록」이 있다.

정부는 선생의 공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 이강년 초상화 /운강 이강년 기념관 블로그
▲ 이강년 상/운강 이강년 기념관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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