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의 아들은 누구일까?…부루와 주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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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의 아들은 누구일까?…부루와 주몽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5.30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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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흐름을 통해 “우리가 단군의 자손”이란 사실을 이해해 보자

 

우리는 단군신화를 잘 알고 있다.

고려 시대에 승려 일연이 쓴 「삼국유사」 기이(紀異)편을 토대로 단군(檀君)은 우리 민족의 시조로, 고조선을 연 임금이라고 배워왔고, 우리 민족은 “단군의 자손”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면 단군의 아들은 누구인가. 「삼국유사」엔 부여의 부루와 고구려의 시조 주몽을 꼽고 있다. 하지만 족보가 헷갈린다.

 

「삼국유사」 기이편 고구려조에 이런 기록이 나온다.

“「단군기(壇君記)」에서 “단군이 서하(西河) 하백의 딸과 친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부루’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또 해모수가 하백의 딸과 정을 통한 후 주몽을 낳았다고 했으니 부루와 주몽은 배다른 형제인 것이다.“(夫婁與朱蒙 異母兄弟也)

어찌 배다른(異母) 형제라는 말인가. 하백의 딸 유화(柳花)를 어머니로 하고, 단군을 아버지로 한 아들이 부루이고, 해모수를 아버지로 한 아들이 주몽이라면, 한 어머니에 아버지가 다른 형제(異父兄弟)인 것이다. 이 이해되지 않는 관계를 소개하면서 일연은 부루와 주몽이 ‘배다른 형제’라고 해석하는 모순을 저질렀 것이다.

「삼국유사」의 스토리는 갈수록 심각해 진다. 기이편 북부여조에 “천제(天帝)가 자기 이름을 해모수(解慕漱)라 하고,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扶婁)라 하고 해(解)를 성으로 삼았다”고 했다. 한자는 夫婁 또는 扶婁라고 달리 표현되었지만, 한 사람일 것이다.

그렇다면 부루의 아버지는 해모수이고, 주몽의 아버지도 해모수다. 부루와 주몽은 이모(異母), 이부(異父) 형제가 아닌, 같은 부모를 둔 형제가 된다. 그리고 단군은 부여조에서 성이 해씨인 모수로 이름을 바꾸었단 말인가.

삼국유사 왕력(王歷)편에는 노골적으로 주몽의 아버지가 단군이라고 기록한다.

“제1대 동명왕(東明王): 갑신년(기원전 37)에 즉위하여 18년 동안 다스렸다. 성은 고씨(高氏)이고 이름은 주몽(朱蒙)인데 추몽(鄒蒙)이라고도 한다. 단군(壇君)의 아들이다.” (第一東明王 甲申立 理十八 姓高 名朱蒙 一作鄒蒙 壇君之子)

 

유화부인이 주몽을 임신해 낳는 과정도 복잡하다.

유화는 강의 지배자 하백(河伯)의 딸이다. 해모수라는 자가 사통을 하고 돌아오지 않자 부모들이 유화를 귀양살이를 시켰다. 부여의 금와왕이 그녀를 방안에 가두었다. 그런데 햇빛이 비추면서 유화는 임신이 되고 알 하나를 낳았다.

해모수와의 사통과는 별도로 다른 남자를 상징하는 햇빛이라는 존재에 의해 임신을 했다는 얘기인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관점에서 보면 「삼국유사」의 스토리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2,000년 이전엔 모계의 전통이 강했다. 아버지가 누구이든 어머니로 내려가는 모계로 혈통이 구분되던 시절이다.

유화 부인의 입장에서 보면, 단군과의 사이에서 부루를 낳고, 해모수와 사통을 하고, 햇빛에 의해 주몽을 임신한다.

후대의 사학자들은 가부장적 사회의 입장에서 신화를 서술하다가 모순 덩어리의 소재를 뒤죽박죽 정리했다. 승려인 일연도 그런 관점을 피하지 못했다. 유학자인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단군과 해모수와 같은 부계가 불분명한 스토리는 아예 적지도 않았다. 김부식의 관점에서 보면, 말도 되지 않는 얘기였을 것이다.

 

신화는 그 스토리가 생상될 때의 시대상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단군 신화와 부루, 주몽의 신화가 생성될 때엔 모계 사회였다. 가부장 사회의 관점이 아니라 모계 중심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그러면 유화라는 여인을 중심으로 일연이 전하는 모순을 풀어보자.

고대 국가는 강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강을 지배하는 강력한 부족집단에 유화라는 족장이 있었고, 유화가 낳은 아들 중 하나인 부루가 부여를 건설하고, 또다른 아들인 주몽이 고구려를 건설한 것이다. 그 아버지가 단군이든, 해모수이든, 단군과 해모수가 동일인물이든 중요하지 않다. 그 가계의 중심엔 유화부인이 있다.

주몽의 큰 아들 유리가 고구려의 2대 임금이 되고 또다른 부인 소생인 비류와 온조가 백제를 건국했다. 크게 보면 유화를 중심으로 부여, 고구려, 백제가 건국한 것이다. 달리 보면, 단군의 후손이 고구려와 백제로 계승한 것이기도 하다.

 

▲ 태백산 입구 단군성전에 걸린 단군 초상화/사진=김인영

 

성리학이 지배한 조선시대엔 단군의 아들 부루가 중국에 가서 중요한 모임에 참석한다고 서술한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단군의 아들 해부루의 스토리가 나온다. 신화적 요소는 말끔히 사라졌다.

 

“「단군고기(檀君古記)」에 이르기를, 상제(上帝) 환인(桓因)이 서자(庶子)가 있으니, 이름이 웅(雄)인데, 세상에 내려가서 사람이 되고자 하여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아 가지고 태백산(太白山)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강림하였으니, 이가 곧 단웅천왕(檀雄天王)이 되었다. 손녀(孫女)로 하여금 약(藥)을 마시고 인신(人身)이 되게 하여, 단수(檀樹)의 신(神)과 더불어 혼인해서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단군(檀君)이다.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하니, 조선(朝鮮),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 옥저(南北沃沮), 동·북 부여(東北扶餘), 예(濊)와 맥(貊)이 모두 단군의 다스림이 되었다.

단군이 비서갑(非西岬) 하백(河伯)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니, 부루(夫婁)이다. 이를 곧 동부여(東扶餘) 왕(王)이라고 이른다.

단군이 당요(唐堯)와 더불어 같은 날에 임금이 되고, 우(禹)가 도산(塗山)의 모임을 당하여, 태자(太子) 부루(夫婁)를 보내어 조회하게 하였다.“

 

도산(塗山) 조회는 중국 하(夏)나라의 우(禹)임금이 홍수를 다스린 것을 기념해 제후들을 불러들인 모임으로, 단군이 아들 부루를 머나먼 중국 땅에 보냈다고 기록한 것은 조선조의 사대주의적 표현이다. 나라 이름을 명나라의 지침을 받아 짓고 중국에 조공을 바쳤던 조선이었으니, 고대사의 신화도 중국 중심으로 변형시킨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세종실록」은 고구려, 백제는 물론이고 신라와 옥저, 예, 맥도 단군의 다스림이 되었다고 서술함으로써 한반도에 세워졌던 고대국가들이 모두 단군의 아들이라고 정리했다. 우리가 단군의 아들이라고 받아들이는 것도 이런 시대적 흐름에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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