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핵 포기하고 경제 매진한 박정희 모델 따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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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핵 포기하고 경제 매진한 박정희 모델 따를까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5.12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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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오 美 국무 “북한 핵폐기하면 한국과 같은 평화와 번영 약속”

 

마이크 폼페이오(Mike Pompeo) 미국 국무부 장관은 11일 국무부 청사에서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회담을 가진 후 기자회견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올바른 길을 선택한다면, 북한에 평화와 번영으로 가득한 미래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북한이 빠르게 비핵화를 하는 과감한 조치를 한다면, 미국은 북한이 우방인 한국과 같은 수준의 번영을 달성하도록 협력할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

(“If Chairman Kim chooses the right path, there is a future brimming with peace and prosperity for the North Korean people. If North Korea takes bold action to quickly denuclearize, the United States is prepared to work with North Korea to achieve prosperity on the par with our South Korean friends.”)

 

트럼프 대통령의 복심으로 알려진 폼페이오 장관의 말인즉, 철저하게 핵 무기를 폐기하면 북한도 한국처럼 잘 살게 해 주겠다는 것이다.

그가 왜 한국을 걸고 넘어졌을까. 외교적인 수사이긴 하지만,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이 핵개발을 포기한 덕분에 한국이 경제발전을 이룩했다는 점을 강조한 게 아닐까, 추측해 본다.

지금 미국은 북한에 경제적 당근을 제시하며 핵 폐기를 압박하지만, 40년전 한국에도 그런 압박을 한 역사가 있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월남 패망과 미군 철수의 안보 위기를 극복하고자 핵 개발을 추진했고, 미국은 핵 포기의 조건으로 한국에 핵 우산과 안전보장 조치를 약속했다. 결국, 한국은 미국의 핵 개발 포기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경제를 선택했다.

 

▲ 1971년 3월 19일 박정희 대통령이 고리원자력 발전소 기공식에 참석해 기념사를 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한국도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2~1977년에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다가 미국의 강한 압력으로 포기한 바 있다. 그 당시에는 쉬쉬하던 문제였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 윤곽이 드러났다. 이미 공개된 각종 자료와 증언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핵무기 개발 추진과 포기의 과정을 돌이켜 보자.

 

박정희 정부에서 청와대 중화학기획단 부단장을 맡았던 김광모씨가 「경제풍월」(2017년 1월호)에 쓴 글을 요약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핵개발 정책은 손수 추진해온 ‘친정사업’의 하나로 처음부터 끝까지 청와대 경제 2비서실에서 담당했다. 당시 오원철 수석비서관은 8년 6개월간 박 대통령의 야전 사령관으로 지휘 감독했다.

1972년 9월에 보고서가 작성되어 오원철 수석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2급 비밀 문서였다.

보고서의 요지는 1973년부터 과학기술처(원자력 연구소)로 하여금 상공부(한국전력)와 합동으로 핵연료 기본기술 개발에 착수해 철저한 기초작업을 수행하며, 1974년 부터 건설계획을 추진해 1980년대 초에 고순도 플루토늄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원자력연구소는 해외거주 한국인 기술자를 채용해 인원을 보강하고, 기술자를 해외에서 훈련시키되 반드시 전문훈련을 받도록 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면 왜 박정희 대통령이 핵개발 추진을 지시했는가. 이에 대해 김광모씨는 이렇게 증언했다. (「경제풍월」 2017년 2월호)

 

60년대 말을 거쳐 70년에 들어와서 국제정세가 한국으로서는 불리하게 냉혹하리 만큼 돌변했다. 1969년에 미국에는 닉슨 행정부가 들어서고 그 해 6월에 “아시아 각국의 방어는 당사국의 책임 하에 있다”라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월남전에서의 패전과 철수로 미국인의 전쟁 혐오 심리를 반영한 것인데 실제로 이 정책의 적용을 받은 것은 한국 밖에 없었다. 북한이 침범해 오면 한국의 방어는 한국이 책임져야 된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한국의 “선 보장 후 감군” 요청을 무시하고 71년 2월 한국주둔 2개 사단 중 1개 사단인 7사단(2만 명)을 철수시켰다. 후속으로 1970년 7월내에 나머지 주둔군도 모두 철수시킨다고 협박했다.

60년대 비교적 조용하던 북한의 준동이 심해갔다. 그 대표적인 것이 1968년 1월의 청와대 습격사건(1.21사태), 1월23일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 그리고 1개 중대의 울진, 삼척지구 침투사건 등이 일어났다. 박 대통령은 적화통일을 노리고 있는 김일성의 야욕에 대하여 미국의 확고한 안보 보장을 기대할 수 없게 되어 국가의 존립을 위해서는 자주 국방구축을 고려치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72년 9월 초 박 대통령 주재 하에 국방장관, 합참의장, 대통령비서실장이 참석한 국가안보회의에서 최고 실세였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김일성의 핵개발 시도 첩보를 보고하면서 국제정세도 설명했다. 중동에서 이스라엘과 이집트와 리비아 등이 핵개발에 착수했고, 적대국인 인도와 파키스탄 그리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추가하여 남미의 브라질과 칠레 그리고 일본이 핵개발에 합류했다는 정보 보고를 했다. (현재 이중 핵을 보유한 국가는 이스라엘 인도와 파키스탄 3개국이며 이들 국가는 국제적으로 인정하지 않은 핵보유 자체 선언국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대한민국이 처한 국제적 정세 하에서 장기적 안목에서 국가의 안보를 위해서는 핵개발을 추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검토지시를 내린 것으로 판단된다. 이리하여, 오원철 수석비서관은 “81년까지 플루토늄 탄을 생산한다.”는 내용의 건의서를 보고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원자력연구소(KAERI)는 비교적 접촉이 쉬웠던 미국의 재처리 기술보유회사 중 Nuclear Service와 Getty Oil사와 교섭했다. 73년 말에 게티사와는 계약단계까지 들어갔는데 73년 말 미국 의회를 통과한 원자력 협정에 따라 미국에서의 재처리 기술을 얻을 수 없게 되었고, 게티오일과의 협의는 무산되었다.

74년 인도와 파키스탄이 경쟁적으로 핵실험을 단행하자 미국은 원자력의 핵확산을 우려해 강경 자세로 돌변했다.

이에 박정희 정부는 프랑스를 접촉했다. 첩촉 대상은 상고방(SGN: Saint Gobin Techniques Nouvelles)이라는 회사였다.

원자력연구소(KAERI는 1975년 1월에 프랑스의 CERCA사와 핵연료시설공급계약을, SGN사와는 핵연료재처리 건설 용역계약을 체결했다. 이 교섭에서 한국이 건설하는 원전에 프랑스의 프라마톰사를 특별 고려한다는 밀약이 있었다는 설도 있었다.

이 교섭은 극비로 진행되었지만, 국제간 계약이어서 프랑스 측은 IAEA에 보고하고 IAEA가 미국에 이 사실을 알려줬다.

미국 정부는 리처드 스나이더 주한 미국 대사를 통해 한국의 핵 개발을 반대했고, 프랑스 정부에 공문을 보내 공식 항의했다. 미국은 한국이 당장 핵 개발을 취소하지 않으면 약 2달러 상당의 고리 2호기 건설 차관을 중단할 뿐 아니라 각종 경제개발 사업도 재검토하겠다고 위협했다.

 

▲ 1978년 6월 20일 박정희 대통령이 이임하는 리처드 스나이더 미국 대사를 접견하고 악수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당시 미국의 분위기에 대해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미국 대사는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1970년대 미 중앙정보국(CIA) 한국지부 총책임자로 있으면서 박정희 정권을 깊숙이 지켜보았으며, 후에 주한미국 대사(1989~1993년)을 역임했다.

 

“한국은 10년간 미국의 요청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한국은 베트남전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얻은 외화로 새마을운동을 벌이는 등 경제발전을 위한 ‘시드머니’로 활용했다. 그러나 또하나 베트남이 무너지면, 도미노처럼 공산화가 번져 한국도 위험하다고 봤던 것도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의 한 이유였다. 그런데 내가 1973년 한국에 왔을 그때, 미군은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박정희는 이걸 보면서 미국과의 동맹에 대한 믿음을 잃기 시작했다. 그가 핵개발에 나선 이유다.”

“박정희는 ‘나는 베트남에 30만명을 보냈다. 그런데 미국을 믿을 수 없다. 우리 스스로 우리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걸(핵무기 개발을) 멈추게 했다. 나는 본국에 (한국의 핵무기 개발 추진을) 보고했고, 미 정부는 매우 조심스럽게 이를 멈추도록 한국 정부에 요구했다. 2011년 북한에 대해 미국이 핵개발 억제를 위해 애쓰는 것과 똑같았다.”

“우리가 북한으로부터의 어떠한 공격에도 남한을 보호할 것이며, 따라서 남한이 핵무기를 지닐 필요가 없다는 것을 강하게 재확인시켰다.”

 

▲ 사이공 함락 하루 전인 1975년 4월 29일, 미군 헬리콥터가 미국인들을 실어나르고 있다. /위키피디아

 

박정희 대통령은 1977년 핵 개발을 중단했다. 그러면 박정희는 왜 핵가발을 그만두었을까. 서균열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2016년 12월 7일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박정희가 핵개발을 그만두었던 요인 중 하나는 한국군에 대한 전시, 평시 작전통제권을 보유한 한미연합사령부가 1978년 창설됐기 때문이었다. 이는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미군이 자동 개입하고 박정희를 위한 인계철선(引繼鐵線) 노릇을 하겠다고 약속했음을 뜻한다. 박정희가 암살된 후 들어선 전두환이 미국으로부터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핵과 미사일 계획을 폐기함으로써 한국의 핵개발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러면 한국은 핵개발을 포기한 대가로 무엇을 얻었을까. 박정희 정부가 핵개발을 시작한 1972년의 경제지표는 1인당 GNP 278 달러, 수출 11억3,000만 달러의 후진국이었다. 미국은 한국에 핵개발 댓가로 경제적 지원을 약속하지 않았다. 다만 박정희 대통령은 핵을 포기한 다음 경제에 매진했다.

당시 대한민국이 핵 개발을 했으면, 미국의 각종 경제제재을 헤치고 오늘과 같은 경제발전을 이룩할수 있었을까.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외교장관이 북한에 시사한 말은 그런 의미일 것이다.

 

(참고자료)

“[박정희의 핵개발 정책] 극비 친정사업 강력도전” (월간 경제풍월 제209호, 2017년 1월호)

“[박정희의 핵개발 정책(2)] 국가안위 절박상황 결단” (월간 경제풍월 제210호, 2017년 2월호)

“박정희 1972년 핵개발 착수…1977년 포기했다” (한겨레신문, 2011년 5월 12일)

“자주국방과 핵개발 시도...박정희는 왜 핵을 개발하려 했나?” (조선pub, 2016년 12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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