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성의 사연…산성도 짓지 말라는 정축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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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의 사연…산성도 짓지 말라는 정축약조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5.06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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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후 국방을 무방비 상태로 강요한 조약…청나라 눈치보며 지어

 

북한산은 서울시민이 즐겨 찾는 등산코스다. 화창한 봄날을 맞아 서울 성북구 정릉골에서 보국문을 지나 한참을 내려가니, 행궁터가 나왔다.

북한산성 행궁지엔 잡초만 무성하다. 저 잡초 속에 깔린 돌과 기와조각에서 수난의 역사가 담겨 있을 것이다.

행궁(行宮)은 전쟁이 났을 때 임금이 도성 궁궐을 떠나 임시로 머무는 별궁(別宮)이다. 북한산성 행궁은 한양 도성 외곽의 전략적인 요지인 북한산성에 위치해 남한산성 행궁, 강화행궁과 더불어 전란을 대비한 임시궁궐로, 도성 방어의 의지를 밝히기 위해 축조되었다.

하지만 조선조는 북한산성을 지어놓고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한번도 쓰지 못할 성을 쌓으면서 조선조는 중국의 눈치를 보았다는 사실이 서글프다.

 

▲ 잡초가 무성한 북한산성 행궁터 /사진=김인영

 

북한산성은 조선 19대 숙종(재위 1674~1720년) 때 지어졌다.

당시 배경을 살펴보자.

1674년 숙종이 즉위하기 한해전 중국에서 ‘삼번(三藩)의 난‘이 발생했다. 청나라 건국에 협조한 오삼계(吳三桂)를 중심으로 3곳의 한인 번왕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청나라는 조선에 조총을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조정에서는 청의 요구를 받아들일지, 거부할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일부에서는 반란을 일으킨 오삼계가 반청복명(反淸復明)의 뜻을 내건 만큼 명(明)에 대한 의리를 지켜 조총을 보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조총을 지원하는 댓가로 축성 허가를 얻어내자고 했다. 그러면서 한양 외곽에 북한산성을 수축하자는 논의가 제기되었다.

삼번의 난은 조선에도 파장을 미쳤다. 오삼계는 복건성과 대만을 장악하고 있던 정성공(鄭成功)의 해상세력과 연계되어 있었고, 정성공은 일본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조선 조정은 정성공-일본의 연합 세력이 조선을 침공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다른 일각에선 조총을 청에 제공하지 않으면 다시 조선을 침공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북한산성을 쌓자고 주장했다.

북한산성 수축 주장은 설득력을 얻었다. 만일 남쪽에서 정성공의 무리가 왜와 연합해 침공하거나 북쪽에서 청이 재침할 경우 왕실과 조정이 도피할 마땅한 곳이 없었다. 서북지역에 군비를 방치한지 오래였고, 남한산성과 강화도도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이 병자호란 때 입증되었다. 두 성은 그후 제대로 수리도 못한 상태였다.

만일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 국왕이 도피할 곳으로 북한산성이 대두되었다. 도성과 가까워 신속하게 피신할 수 있으며, 산세가 험해 방어하기 유리하다는 두 가지 장점이 매력적이었다. 숙종은 북한산성 터를 조사한 뒤 성을 쌓으라고 명을 내렸다.

하지만 신료들이 반대했다. 조총 제공을 거부해 청의 의심을 사고 있는 상황에서 정축약조(丁丑約條)를 위반하며 북한산성을 쌓는 것은 청의 의심을 키워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남인과 서인이 모두 이 주장에 동참하는 바람에 숙종도 방침을 철회하지 않을수 없었다.

 

▲ 북한산성 중성문 /사진=김인영

 

그러면 정축약조가 무엇이길래, 임금이 도성방어를 위해 산성 축조를 포기했을까.

정축약조는 병자호란에 패해 인조 임금이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송파 삼전도(三田渡)에서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3번 무릎을 꿇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의 예를 취하며 받아들인 협정이다.

우리는 임금이 오랑캐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한 사실은 생생하기 기억하지만, 그때 만들어진 협약서를 기억하는 사람은 드믈다. 청나라는 이씨 왕조의 명맥은 유지해 주었지만, 조선의 국방을 무방비 상태에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정축약조는 삼전도 항복의식 이틀전에 청이 제시한 항복조건이다. 남한산성에 갇혀 있던 조선왕과 신하들은 이를 받아들였다. 청이 일방적으로 제시한 굴욕적인 조약이었다.

정축약조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①명과 절교하고 청의 연호를 받아들일 것

②세자와 또다른 왕자(再一子)와 대신의 아들이나 아우를 인질로 보낼 것

③명나라 정벌에 필요한 군사를 징발하도, 특히 가도 정벌에 군량을 보낼 것

④각종 기념일에 사신을 보내고 모든 외교의례는 명의 구례와 같이 할 것

⑤돌아온 포로는 청으로 보낼 것

⑥내외의 대신은 혼인을 맺을 것

⑦신구(新舊) 성의 축성을 불허한다

⑧일본과 관계는 그대로 하고, 올량합(兀良哈)인과의 관계는 끊을 것

 

①~④항은 삼전도 항복 이후 곧바로 시행되었고, ⑥항은 사문화되었으며, ⑧항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항복후에도 오랜 세월 조선에 족쇄를 지운 것은 ⑤항의 돌아온 피로인의 귀환조치와 성을 쌓지 못하게 하는 ⑦항이었다.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 도망쳐 조선으로 돌아올 경우 되돌려줘야 한다는 조항은 인권의 문제이자 국가 자존심의 문제였다. 특히 성을 짓거나 고치지도 말라는 요구는 공성전을 주로 하던 시대에 나라를 무방비로 방치하라는 것이고, 국가존망을 결정짓는 중대한 문제였다.

 

▲ 1904년대 북한산성 행궁사진 /문화재청

 

이 문제가 병자호란 37년후인 숙종 때 불거진 것이다.

하지만 조선은 청의 요구를 받아들여 조총 50자루를 상납함으로써 청의 재침 우려를 일단 덜었고, 삼번의 난도 빠른 속도로 진압되자 북한산성 축조 문제도 일단 수면 아래로 잠복했다.

북한산성 축조 논의가 다시 부상한 것은 숙종 28년(1702년)이었다.

당시 배경은 삼번의 난이 아니라 황당선(荒唐船) 문제였다. 황당선은 중국배를 의미하는데, 이들은 조선 해역에 들어와 불법 어로와 약탈을 자행했다. 요즘의 중국어선의 불법어로와 마찬가지였다. 이 황당선은 중국과 일본의 해역의 해적 무리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황당선이 자주 출몰하자 강화도가 해적 방어에 적합하지 않다고 평가하고 북한산성 수출이 다시 거론되었다. 이 무렵 대기근으로 대규모 유민이 발생하고 도적이 들끓었는데 도성도 예외가 아니었다. 극도의 불안한 치안상황에서 대신들은 다시금 북한산성의 축성을 제기했다.

이때도 정축약조에 막혀 논의가 중단되었다. 조선 국왕과 신료들은 자발적으로 기었다. 청을 거스르는 일을 하다가 어떤 수모를 당할지 모르는 일이라고 판단해 북한산성 축성 문제는 없던 일로 되돌렸다.

그러던 중에 북한산성 축성문제는 1710년에 저절로 해결되었다. 요동지방에서 해적이 출몰하자, 청나라가 황제 명의(皇旨)로 해적 출몰 사실을 조선에 알려주고 “대비하라”고 했다. 해적들은 주로 요동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조선 서북지역은 물론 도성의 안전을 위협했다.

조선 조정은 청 황제의 지시를 축성 허가로 받아들였다. 이에 그토록 반대하던 대신들은 이구동성, 북한산성을 쌓자고 주장했다. 특히 북한산성 쌓기를 강력하게 반대하던 신료들이 앞장서서 축성을 건의했다. 심지어 반대에 앞장섰던 민진후는 북한산성 수축의 총책임을 맡기도 했다. 곧바로 1711년(숙종 37)에 대대적인 공사를 시작해 북한산성이 완성되었다.

조선의 성벽 축성은 이때부터 재개되었으니, 정축약조는 정묘호란이 끝난후 80년 동안 조선을 옭아 매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북한산성과 행궁은 한번도 사용된 적이 없다. 숙종과 영조가 이곳을 한번 다녀왔다는 기록만이 전해지고 있다.

북한산성 행궁은 남한산성 행궁의 두 배쯤 되는 크기다. 내전 정전 28칸, 외전 정전 28칸, 부속건물 68칸 등 총 124칸에 이른다. 행궁에 북한산 서고를 마련하여 고문헌을 비밀리에 보관했다. 구한말에는 외국 선교사들의 별장으로 허용하기도 했다.

이렇게 웅장한 북한산 행궁은 1915년 홍수와 산사태로 매몰되어 사라졌다.

정부는 행궁터에 대해 1999년 지표조사를 거쳐 2014년 발굴작업을 마무리하고, 우리의 문화유산으로 보존할 계획이라고 한다.

 

▲ 북한지에 수록된 행궁지 위치도 /문화재청
▲ 내정전지 전경 /문화재청
▲ 내정전 상방지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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