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회담의 역사…처칠이 처음 언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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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회담의 역사…처칠이 처음 언급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4.27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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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수단 발달한 20세기의 외교혁명…정상에겐 도박

 

정상회담이란 용어는 영국의 윈스턴 처칠(inston Churchill) 총리가 사용한 말이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동서냉전이 시작되는 1950년 2월 14일, 처칠은 소련 최고위층과의 회담을 제의했다. 그러면서 그는 “정상(summit)에서의 회담으로 인해 사태가 더 악화될수 있다는 말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 1953년 에베레스트 정복을 대서특필한 영국 언론

정상(頂上, summit)이란 말은 산의 최고 높은 곳, 즉 산꼭대기를 의미하는 등산 용어다.

처칠이 정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후 영국언론들이 양국 또는 다국의 정치수반이 회담할 때 정상회담이란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즈음, 1953년 5월 29일 영국 등반대 소속 에드먼드 힐러리와 셰르파 텐징이 인류역사상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정복했다. 영국 등반대는 그동안 티벳 쪽에서 6번, 네팔쪽에서 2번의 에베레스트 공격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시도한지 30여년만에 이룬 에베레스트 정복을 영국인들을 흥분시켰고, 정상(summit)이란 단어는 대중의 의식 속에 뿌리내리는 배경이 되었다.

1955년 7월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지도자들이 제네바에서 개최한 회담에 대해 미국 타임지는 “정상에서의 회담”이라고 표현했다 그 이후 ‘정상’이라는 용어는 미국 국무부에서 정식 외교용어로 채택되었다.

1958년 뉴욕타임스는 연간 인덱스와 표제어에 ‘정상’이란 용어를 정식으로 등재했다. 영어로는 summit 또는 summit meeting이다.

 

▲ 1955년 제네바 회의를 그린 영국 데일리메일 삽화 /데이비드 레이놀즈 저 「정상회담」

 

처칠이 언급한 ‘정상’은 유대교와 기독교가 신성시하는 시나이산을 연상시켰다. 유대인의 지도자 모세는 시나이산에 올라가 하느님으로부터 유대 율법인 10계명을 받아왔다. 따라서 정상은 하느님과 만나는 곳, 신성한 곳으로 비유된다. 정상회담은 지상의 왕국에서 벌어지는 경제적 충돌, 전쟁 등의 갈등 요소를 신성한 곳에 올라가 신의 심판대에서 논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산(山)의 정상은 마법의 장소이기도 하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인간세상은 지엽말단의 문제로 다툼하는 초라한 곳이다.

정상은 또한 승리감에 도취하는 곳이며, 쾌감과 경이감을 느끼는 곳이다. 산 정상에선 마음의 비움이 생기고, 영혼의 자유로움을 느낀다.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11년간의 막힌 길을 뚫자는 말을 할때는 이런 마음의 비움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정상은 위험한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정상회담은 이해당사국들에게 평화를 가져오기도 하지만, 또다른 전쟁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정상회담은 산꼭대기에서 하므로, 아래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는 회담이다. 또한 물러나면 내리막길인 곳에서 하는 건곤일척(乾坤一擲)의 회담이기도 하다.

지도자에겐 도박의 회담이기도 하다. 합의에 이르면 정치적 지위를 굳히고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만, 실패하면 가파른 내리막 길을 걸어 역사의 패자로 인식될 경우도 있다.

 

▲ 카놋사의 굴욕을 그린 회화 /위키피디아

 

문헌에 따르면 정상회담의 역사는 기원전 18세기, 유프라테스의 왕국에서 있었고, 그보다 4세기 후에 이집트에서도 있었다고 한다. 역사 이전에는 부족간에 갈등이 생기면 부족장들이 만나 협상하는 신화적 근거도 있었다.

동양에서는 약소국의 왕이 강대국 왕을 찾아가는 제도가 있었다. 중국의 황제들은 번국(藩國)의 왕으로 하여금 수도로 와서 알현하도록 했다. 거리가 멀어 사신으로 하여 조공하는 제도로 일반화되었지만, 고대 동양에서 내조(來朝) 또는 입조(入朝)는 강대국과 약소국의 불평등한 지배구조를 유지하는 절차에 불과했다.

유럽에서도 1077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가 이탈라아 카놋사에 머무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를 찾아가 무릎 꿇고 용서를 빌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남아있다.

근대 이전의 최고지도자의 회담은 현대의 정상회담이라고 할수 없다. 지배와 피지배를 확인하는 자리였을 뿐이다.

 

▲ 1878년 비스마르크가 주재한 베를린 회담 /위키피디아

 

정상회담이 일반화된 것은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근세 이후의 일이다. 각국의 지도자들이 전신 또는 전화로 연락을 취해 철도, 선박, 항공기등의 빠른 교통수단으로 한 곳에 만나 갈등의 요소를 치유하는 회담을 열게 되었다.

1878년 6월 베를린회의는 현대판 정상회담의 시초라 할수 있다. 독일의 비스마르크가 주최한 이 회담에는 러시아 총리, 오스트리아-헝가리 총리가 참석했고, 영국에서도 디즈레일리가 대표단으로 갔다. 이 회담에서 발칸반도 문제가 논의되었는데, 루마니아, 몬테네그로, 세르비아가 독립하게 되었다. 베를린회의가 가능했던 것은 철도 덕분이었다. 디즈레일리는 런던에서 배를 타고 프랑스로 건너가 나흘간 기차를 타고 베를린으로 갔다.

20세기 들어 항공 시대가 열리면서 정상회담은 일반화되었다. 일종의 외교 혁명이다. 1938년 뮌헨 회담, 1945년 얄타회담, 1961년 빈 회담, 1972년 모스크바 회담,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회담, 1965년 제네바 회담 등…. 20세기엔 정상회담을 통해 국제분쟁이 해결되었다. 이후 정상회담은 최고의 외교 행위로 일상화되었다.

 

▲ 27일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에서의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 /청와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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