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공녀」, 미소하지만 미천하지 않은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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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녀」, 미소하지만 미천하지 않은 그녀
  • 김이나 에디터
  • 승인 2018.03.28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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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유했던 그 많은 공간들…“집이 없는게 아니라 여행 중인 거야”

 

제목이 끌렸다. 어릴 때 읽었던 “소공녀”의 21세기 한국 버전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영화가 시작되고 제목이 뜨는데 “소공녀” 아래 “microhabitat”이라고 영어제목이 씌여 있다. 소공녀, 억지로 해석하면 ‘작은(小) 일하는 여자(工女)’ 일수도 있고 소설에서 소공녀가 기숙학교에서 쫓겨나 다락방에 살게 되듯 영화 주인공도 그런 삶을 살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microhabitat은 미소서식지(=small home)란 뜻이다.

 

▲ 영화의 한 장면 /네이버 영화

 

미소는 가사도우미다. 하루 일당을 받으면 약값, 방값에 쓸 돈을 남겨두고 위스키 한 잔과 담배를 산다. 만 이천원 짜리 위스키 한 잔과 이천오백원 짜리 담배 한 갑은 미소가 누리는 최고의 행복이다. 위스키, 담배 그리고 그의 연인 한솔이로 인해 그녀는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런데 어느 날 주인은 방세를 올리겠다고 엄포를 놓고 담뱃값마저 오른다. 미소는 담배를 포기할 수 없어 자신이 살 곳을 포기한다. 그리고 대학 때 함께 밴드 활동을 했던 멤버들을 찾아간다. 단지 그녀가 잠시 머물 곳을 찾아간 것 뿐인데 의도치 않게 그들이 사는 모습을 가까이서 목도하게 되고, 집도 없이 매일 떠돌며 살지만 오히려 미소는 그들에게 맛난 밥을 지어주고 위로를 하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찬란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해준다.

물론 그들은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일당을 벌어 그 돈의 반을 위스키와 담배 값으로 써버리는, 말하자면 분수에 맞지 않는 소비를 하는 그녀가 한심한 것이다. 열심히 일하고 그 돈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즐길 뿐인데 말이다. 오로지 미소를 이해하는 한솔이조차도 그녀와의 미래를 위해 사우디 아라비아로 떠난다.

사랑을 나눌 방도 없고 다른 커플들처럼 맛집 투어도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던 한솔이는 떨어져 지내더라도 상상을 하면 된다고 말한다. (”우리 상상력을 발휘해보자.함께 있다고.”)

그러나 미소는 지금 한솔이와의 시간이 더 소중할 뿐이다. (“난 너만 있으면 충분해.”)

그들에겐 없는 집을 가지고 사는 그녀의 주변인들은 그러나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직장에 치이고,성급했던 결혼을 후회하며, 캥거루족으로 노부모에 얹혀살고, 이혼을 하고, 풍요로운 생활 속에서도 불안한 삶을 살고 있다.

▲ 영화 포스터 /네이버 영화

집=행복이라는 공식이 의심스러워지는 대목이다. 드러머 대용의 말처럼 20년 동안매 달 백만원 가까운 돈을 갚아나가야 내 집이 되는 현실.이혼 후 방 하나만을 점유하며 사는 그에게 그 집의 가치는 무엇일까.

그녀가 소비하는 위스키와 담배를 비웃지만 어쩌면 그들은 진정한 소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진정 자신이 원하는게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삶. 지속가능한 서식지를 약속받는 대신 그들은 꿈을 잃고 현재를 살지 못하는 것이다.

위스키 가격이 2,000원 올랐다. 담뱃값이 올랐을 때 방을 포기한 그녀는 이제 흰머리가 되지 않으려고 먹던 약을 포기한다. 백발이 된 미소가 한강변의 텐트에서 밤을 보낸다. 그녀는 위스키와 담배를 포기하지 않았다.

미소하지만 미천하지 않은 그녀의 텐트, 그녀의 서식지. 그리고 위스키와 담배를 즐기는, 미소하지만 미천하지 않은 그의 소비.

반면 서식지를 위해 실현이 지연된 꿈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마지막 장면에서 좀더 밝아진 모습으로 미소를 떠올린다. 그들을 찾아와준 미소 덕분에 삶의 무게를 털어내 버렸기에 가벼워 진걸까.

사는 동안에 점유했던, 점유하고 있는 그 많은 공간들을 돌아본다. 작다고 불평하고 있었음을 고백한다. 그런데 그저 잠시 머물러 가는 거라고 생각하니 맘이 편해진다. 미소 말대로 “집이 없는게 아니라 여행 중인 거야.”

 

김이나 ▲서울대학교 대학원졸(불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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