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명종 태실 및 비, 보물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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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명종 태실 및 비, 보물 지정
  • 김현민
  • 승인 2018.03.27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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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자리에 온전히 남아 있으며 주변 환경도 잘 보존돼

 

태(胎)는 어머니 뱃속에서 생명체를 싸고 있는 태반과 탯줄을 총칭하는 것으로, 예로부터 태아에게 생명력을 불러넣는 신성한 존재로 간주되었다. 특히 왕실의 경우 국운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해서 매우 소중하게 다루었다.

조선 왕실에서 자손이 태어나면 그 태(胎)를 태항아리에 봉안해 태실(胎室)을 조성했다.

 

▲ 서산 명종대왕 태실 및 비 /문화재청 자료

 

문화재청은 충청남도 서산시에 있는 「서산 명종대왕 태실 및 비」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976호로 지정했다.

서산 태실 및 비는 조선 13대 명종(明宗)이 태어나던 1538년(중종 33년)에 의례에 따라 건립되었다. 태를 봉안한 태실과 ‘대군춘령아기씨태실비’ 1기가 먼저 건립되고, 명종이 즉위한 후 1546년 ‘주상전하태실비’ 1기를, 1711년 ‘주상전하태실비’를 재건하면서 비석 1기를 추가로 건립하여 현재 총 태실 1기와 비 3기가 전한다.

태실은 8각형의 난간석 중앙에 배치됐다. 태실의 머릿돌은 8각의 개첨석(盖簷石, 지붕 돌), 받침돌은 사방석(四方石)이고 몸돌은 중동석(中童石)으로 구분된다. 태실에 봉안되었던 태항아리(胎壺)와 지석(誌石)은 일제강점기인 1928년경 일제에 의해 경기도 고양 서삼릉(西三陵)으로 옮겨졌다가, 이후 1996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를 통해 수습해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전‧보관하고 있다.

태실과 함께 만든 ‘대군춘령아기씨태실비(大君椿齡阿只氏胎室)’는 비석 받침인 비좌(碑座)와 비문을 새긴 비신(碑身), 비신 위에 올리는 옥개석인 이수(螭首)로 구성되었으며, 조선 전기에 건립된 태실 표석의 전형적인 양식을 갖추었다.

1546년 명종이 왕위를 이어받은 이후 태실을 가봉(加封, 추가 설치)하면서 건립된 ‘주상전하태실비(主上殿下胎室碑)’는 비좌와 비신·이수를 갖추었는데, 비신이 대리석, 비좌는 귀롱대석(龜籠臺石, 거북과 용 모습의 돌)으로 만들어 위엄을 갖추었다. 이후 비신의 글씨가 훼손되자 1711년에는 1546년 조성되었던 본래의 귀롱대석 위에 비신과 이수를 새로 조각하여 건립하고 훼손된 비는 옆으로 옮겨 설치하였다.

조선 왕실의 많은 태실이 본래의 자리에서 옮겨졌거나, 변형된 경우가 상당한 데 비하여 「서산 명종대왕 태실 및 비」는 『조선왕조실록』등에 관련 기록이 상세히 전해져 있고, 원래의 자리에 온전하게 남아 있으면서 주변 지형 등 환경까지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

특히, 태실과 가봉태실, 가봉개수태실의 변천 과정까지 한눈에 살펴볼 수 있고 조선 왕실의 안태의례(安胎儀禮)의 역사적 자료이자 한국미술사의 태실 연구 자료로서도 그 가치가 뛰어나다. 안태(安胎)는 왕가의 태를 명당에 설치한 태실에 편안하게 봉안하는 격식과 절차를 말한다.

 

▲ 서산 명종대왕 태실 및 비 /문화재청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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