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험, 서울 이야기]⑲ 통일로 근처 두 마을, 문화촌과 기자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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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탐험, 서울 이야기]⑲ 통일로 근처 두 마을, 문화촌과 기자촌
  • 강대호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5.0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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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강대호 칼럼니스트]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일대가 ‘문화촌’으로 불린 시절이 있습니다. 인왕산 자락의 개미마을로 올라가는 이면도로 초입에 ‘문화촌’ 안내판이 있지요. 

안내판 설명에 따르면 문화촌은 1950년대 말에 홍제천 변 자갈밭을 바둑판처럼 정리해 반듯한 골목과 집터를 조성한 동네를 말합니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두 집의 지붕을 나란히 붙여서 지은 맞배지붕 형식의 양옥집 30여 채에 문화예술인들이 살면서 붙여진 지명이었지요.

‘문화촌’의 문화에는 어떤 의미가 담겼을까요? 문화예술인들이 모여 사는 동네라서 그렇게 이름 붙여지기도 했겠지만, 아직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던 50년대 말에 한옥이나 판잣집이 아닌 양옥이라는 (당시로서는) 혁신적 주거 공간이 들어선 동네라 문화적으로 보였던 건 아닐까요.

개화기나 식민지 시절 많은 조선인에게 ‘문화’는 서구 문화를 의미했고, 서구는 근대를 벗어나 현대로 발전해 가는 세상을 의미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양의 건축 양식으로 지은 집을 문화주택으로 부르기도 했지요. 

일제강점기의 주거 공간을 연구한 문헌들을 보면 당시 특권층들이 주로 살던 ‘문화주택’을 소개하며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의 신문과 잡지 기사들을 인용합니다. 이에 따르면 울창한 송림이 우거진 교외나 시외에 문화주택이 세워졌고, 그 안에서는 피아노나 레코드를 들으며 홍차나 포도주를 마시는 '만찬회'가 열렸다고 하네요.

홍제동 개미마을 입구의 ‘문화촌’ 안내판. 사진=강대호

물론 식민지 시절 호화스러운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조선인은 극히 일부였겠지요. 그런 특권층들의 호사를 비꼰 기록도 있습니다. 위와 비슷한 시기 혜화동과 명륜동에 주로 조선인 지식인들이 거주하는 (오늘날 개량한옥으로 부르는) 한옥촌이 형성되었는데 그 동네를 ‘문화촌’이라 칭하면서요.

1929년 잡지 <별건곤>의 한 기사는 '한간 초옥에 살고 팥밭에 된장을 쪄서 먹더라도 재미있고 화목하게 사는 것'을 문화생활이라 정의했습니다. 서양식 주택을 지어놓고 피아노나 레코드판 소리가 흘러나오는 곳이 아닌 조선의 문화를 최소한으로라도 지키며 사는 동네를 문화촌이라 부른 거죠.

그러니까 서양에서 건너온 양식만이 ‘문화’가 아니라 조선 고유의 양식도 ‘문화’라고 계몽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후세에는 한옥 대신 양옥이 ‘문화주택’의 위치를 차지한 걸로 보이네요. 

서구식 주거를 상징하던 '문화주택'

1950년대 말 신문 기사들을 보면 홍제동 문화촌의 집들을 입식 부엌과 수세식 화장실을 갖춘 서구 스타일의 문화주택이라 소개합니다. 아궁이로 취사와 난방을 동시에 하고 집 바깥에 재래식 화장실 둔 전통 가옥이나 개량한옥과는 집 구조가 달라 주거 환경까지 바꿨지요. 

1958년 경향신문의 한 기사를 보면 홍제동 문화촌이 “북쪽으로는 나지막한 산에 둘러싸이고 서편에 강이 흘러내린 곳에 자리해 외국 잡지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라고 묘사합니다. 이로 미뤄보면 문화촌의 최신식 주택들은 당시 홍제동과 홍은동에 몰려든 서민들의 주거 공간과 외양은 물론 동네 분위기부터 달랐을 것으로 보입니다. 

문화촌 안내판에 나온 옛 지번과 설명을 종합해 보면 문화촌의 위치는 서울여자간호대학 정문 건너편 주택가로 짐작됩니다. 설명에 나온 대로 홍제천 변이고 바둑판처럼 반듯한 구획의 골목들이 있지요. 경사진 골목과 반듯하지 않은 구획에 들어선 홍제동의 여느 주택가와는 다른 분위기입니다.

홍제천 변 어느 골목에 남아 있는 문화촌 주택의 흔적. 사진=강대호

한편 홍제역 앞 큰길, (한때 의주로라고 불렸던) 통일로를 따라 구파발 방향으로 가다가 연신내에서 진관동 쪽으로 빠지면 ‘기자촌’이 나옵니다. 말 그대로 기자들이 살았던 동네이지요. 정확한 위치는 지금의 ‘은평뉴타운 기자촌 11단지’ 인근으로 북한산 자락 바로 아래입니다.

기자촌은 기자들의 경제 상황을 배려한 정책으로 알려졌습니다. 관련 자료를 보면 1960년대 기자 월급으로는 최저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부와 한국기자협회와 협의해 당시 경기도였던 이곳에 택지를 조성하고 저렴한 가격에 분양했다고 하네요.

기록에 따르면 한국기자협회 소속 무주택 기자들 335명이 주택조합을 결성했고, 1969년 11월에 첫 입주를 시작해 1974년 3월에 분양이 완료되었다고 합니다. 이때 420여 세대가 입주했다고 하는데 당시 서울에 상주한 많은 기자가 한 마을에 모여 살게 된 것이었죠.

기자촌이 들어선 곳이 현재는 서울이지만 택지가 조성될 당시에는 경기도 고양군 신도읍 진관외리였습니다. 구파발로 불렸던 이 지역은 1973년에 서울시 서대문구로 편입되었고, 1979년에 은평구로 분구했지요.

지금의 구파발 일대는 지하철이 연결되고 서울 시내버스 노선도 많지만, 마을 조성 당시 기자촌은 서울 중심부에서 매우 멀었습니다. 통일로가 지나는 구파발에서도 멀리 떨어진 곳에 마을이 있었지요. 그래서 ‘기자촌’이라는 이름 외에 ‘외딴섬’이라는 별칭도 있었다고 합니다.

수돗물이 나오지 않았던 기자촌

당시 입주자의 회고에 따르면 입주 초기에는 수돗물이 나오지 않아 우물을 파야 했고, 출근하기 위해서는 구파발까지 논길 사이를 걸어가야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기자들은 점차 기자촌을 떠났고 1990년대 후반에는 일부 퇴직 언론인들만 남았고, 2000년대 들어서는 44가구 정도만 남게 되었다네요. 

지금은 마을이 있던 곳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습니다. 사실 기자촌 일대는 북한산과 바로 붙어 있는 그린벨트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2000년대 은평뉴타운 사업이 시작됐을 때 기자촌은 제외될 것으로 보였고 정비구역에도 포함되지 않았었지요. 

하지만 이해 당사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기자촌은 결국 뉴타운 지역에 포함되었고 주택들은 싹 철거돼 아파트가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은평뉴타운 기자촌 11단지 인근 공원의 ‘기자촌 옛터’ 표석. 사진=강대호

다만 북한산 자락과 아파트 단지 사이의 공원에 ‘기자촌 옛터’ 표석만 남아서 그 일대가 기자촌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표석 뒷면에는 이곳에 살았던 언론인들 이름이 빼곡히 박혀있지요. 아파트 단지 이름에도 기자촌이 들어가 있기도 합니다.

문화촌에 있었던 문화주택들도 싹 헐렸고, 그 자리에는 빌라들이 들어섰습니다. 홍제천 변에 반듯한 구획의 골목만이 흔적으로 남았지요. 그런데 그중 한 채, 제 눈에 띈 한 채만이 오래전 문화촌 시절에 지은 집으로 보였습니다. 만약 이웃한 두 채가 남아 있었다면 두 집의 지붕이 맞붙은 맞배지붕을 확인할 수 있었을 텐데요.

마을 이름에도 나와 있듯 문화촌에는 문화예술인들이, 기자촌에는 언론인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마을 형성 과정에 정부의 정책적 지원이 있었지요. 당시 정부는 왜 이들을 한마을에 모여 살게 했을까요? 

경제적으로 어려운 문화예술인과 언론인들을 위한 배려였다는 평가를 받긴 하지만 정권에 비판적일 수도 있는 직종의 인물들을 한곳에 모아놓았다는 시각도 분명 존재합니다. 한데 모아 놓으면 관리 혹은 감시하기 편한 장점이 있기 때문이었겠지요.

그런데 오늘날 특정 직종의 사람들에게 택지를 우선 분양해주고 건축 과정에 정부가 나서 행정적 편의까지 제공해준다면 특혜 논란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에서 발생하는 논란이나 의혹이 가장 많은 분야가 부동산인 것 같네요.

혹시, 한옥마을 하면 어디가 떠오르나요? 종로의 북촌이나 익선동이 떠오르지 않나요. 그런데 구파발 인근, 기자촌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도 한옥마을이 있습니다. 다음 주에 계속 이야기하겠습니다. <매주 일요일 연재>

은평뉴타운 기자촌 11단지 입구. 사진=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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