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 성산산성 목간에서 드러난 신라의 생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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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성산산성 목간에서 드러난 신라의 생활상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3.22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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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등명, 지명, 곡물명 등 기재…가야문화재연구소, 책자로 발간

 

종이가 없던 고대인들은 나무 조각에 글자를 새겼다. 이를 목간(木簡)이라고 한다. 목간은 종이가 등장하면서 사라진다.

우리나라에서도 목간이 많이 출토된다. 그 중 절반인 245점이 경남 함안의 성산산성(城山山城)에서 출토되었다. 목간의 보고가 된 성산산성은 사적 67호로 지정되어 있다.

 

▲ 함안 성산산성 /문화재청

 

경남 함안군 가야읍 광정리의 조그마한 산성에서 왜 많은 목간이 출토되었을까.

종이는 물에 약해 손상이 쉽지만, 목간은 수분만 잘 조절되면 오래 보존되는 특성이 있다. 함안의 성산산성은 부엽공법(浮葉工法)이라는 독특한 성벽축조 방식이 채택되었기 때문에 목간이 건조한 상태에서 많이 보존된 것으로 파악된다. 부엽공법은 성벽을 쌓을 때 나뭇잎이나 풀 등을 흙과 함께 쌓아 물을 흡수하고 연약한 지반을 강화하는 고대 토목기술이다. 이 공법을 사용한 곳에서 목간 등 많은 목제품이 출토되었다.

게다가 성 축조시 모래, 자갈 등을 땅속에 매설해 맹암거(盲暗渠)로 불리는 배수로를 만들어 지하수위를 조절한 것이 많은 목간이 보존된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가야문화재연구소가 발간한 목간관련 책자 /문화재청

 

문화재청 산하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1991년부터 2016년까지 17차례에 걸쳐 실시한 함안 성산산성 발굴조사에서 나온 목간을 정리해 『한국의 고대목간Ⅱ』와 2014년부터 2016년까지의 발굴조사 성과를 담은 『함안 성산산성Ⅵ』를 발간했다.

이 책자에는 함안 성산산성에서 목간이 처음 나오기 시작한 1992년 이후부터 지금까지 출토된 목서목간(글씨가 새겨진 목간) 245점의 정보를 모두 담았다. 책자에는 목간의 사진과 실측도면, 적외선 촬영사진과 프로타주 도면도 모두 실제 크기로 수록했다. 프로타주(frottage)란 목간을 종이로 덮어 문질러 모양을 그려내는 기법으로, 건탁(乾拓)이라고도 한다.

성산산성 목간의 제작시기는 6세기로 판단된다. 성산산성에서는 제작시기를 파악할수 있는 간지명(干支名) 목간이 출토되었데, 그 목간에는 ‘임자년(壬子年)’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임자년(壬子年)은 산성의 축조기술과 출토유물을 고려할 때, 532년 또는 592년으로 파악되고 있다.

평균 크기는 길이 16.3㎝, 너비 2.3㎝, 두께 0.6㎝이며, 목간의 나무는 소나무가 주류이고 버드나무, 밤나무도 있다.

함안읍지에 따르면 이 산성은 가야국의 옛터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산성의 형식이 삼국시대 유형을 따르기 때문에 목간은 이 곳을 정복한 신라의 것으로 추정된다.

목간의 기록에는 신라의 세금징수와 관등(官等)명, 지명, 곡물명, 산성 축조방식 등 다양한 정보들이 기록되어 있다. ‘어떤 지역의 사람이 얼마의 곡물을 가져왔다’는 식의 내용도 있고, 주로 경상북도 지역으로 추정되는 감문성(김천), 급벌성(순흥), 본파(성산), 구벌성(의성), 구리벌 등의 지명도 나온다. ‘노인(奴人)’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는데, 울진 봉평비에서 확인되는 ‘노인’과 같은 의미인지 여부는 논란거리다. 신라의 관등명인 ‘일벌(一伐)’, ‘일척(一尺)’ 등 지방관등명(外位)도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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