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험, 서울이야기]⑱ 닮은 듯 다른 두 동네, 홍은동과 홍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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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탐험, 서울이야기]⑱ 닮은 듯 다른 두 동네, 홍은동과 홍제동
  • 강대호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4.30 10:00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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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강대호 칼럼니스트] 지난주에 이야기한 홍제동 개미마을에 가면 맞은편 산자락에 펼쳐진 홍은동이 보입니다. 홍제천을 기준으로 마주한 이웃 동네이지요. 이름까지 비슷한 두 동네의 지명은 모두 홍제원(弘濟院)에서 따왔습니다.

원(院)은 조선시대에 관원들이 지방으로 갈 때 묶는 국영 숙박시설에 붙인 명칭입니다. 서울 청계산 인근의 원지동(院趾洞) 등 지명에 원이 들어간 곳은 대개 숙박시설이 자리했던 곳이었지요.

홍제원은 조선시대에 돈의문, 즉 서대문을 나와 북쪽으로 향하면 맨 처음에 나오는 원이었습니다. 돈의문 밖은 의주까지 연결하는 의주로의 시작 지점이었는데 독립문 자리에 있었던 영은문(迎恩門)을 지나 무악재를 넘으면 홍제원에 닿았습니다. 

중국 사신들이 묵던 홍제원

중국 사신 관점에서 보면 홍제원은 한양 방면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숙박시설이었지요. 그래서 중국에서 오는 사신들은 홍제원에서 묵곤 했습니다. 홍제원에는 중국 사신들을 위한 공관이 따로 있었는데 중국에서 온 사신들이 휴식을 취하고 예복으로 갈아입는 등 도성으로 들어가기 위해 준비하던 시설로 이용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홍제역 인근 통일로 도로변에 ‘홍제원 터’ 표석이 있습니다. 그 안쪽 골목에 홍제원이 있었다고 하지만 옛 흔적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표석만이 그 근처에 홍제원이 있었다는 걸 알려주는 흔적이지요. 

1977년 홍은사거리 일대. 왼편 상단에 인왕산이, 중앙에 유진상가가 보인다. 사진제공=서울역사아카이브

지금의 홍제동 일대는 조선시대에 한성부 북부의 연은방에 속했습니다. 도성 밖이지만 성저십리(城底十里)라는 한양에 속한 지역이었지요. 하지만 이 지역은 1914년에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경기도가 되었고, 고양군 은평면 홍제내리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홍제내리는 홍제원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홍제내리는 1936년에 다시 경성부로 편입되며 일본식 지명인 홍제정(弘濟町)이 되었고, 해방 후인 1946년에 우리식 지명인 홍제동으로 바뀌었습니다.

지금의 홍은동도 조선시대에 한성부 북부 연은방에 속했었는데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고양군 은평면 홍제외리가 되었습니다. 홍제원 바깥의 마을이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1936년에 홍제내리가 경성부로 편입될 때 홍제외리 일부 지역이 홍제내리에 포함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홍제외리는 경기도에 남았다가 해방 후인 1949년에야 서울 서대문구 홍제외리로 편입되었습니다. 그리고 1950년, 홍제외리의 홍과 은평면의 은을 따 ‘홍은동’이 되었습니다.

홍제내리와 홍제외리는 홍제원을 기준으로 나눈 행정구역이었지만 지형적으로 나눈 모습이기도 합니다. 홍제천이 그 기준이지요. 지도를 보면 홍제천의 남쪽이 홍제동이고 북쪽이 홍은동인 걸 알 수 있습니다. 

유진상가 전경. 내부순환도로 건설 때 건물 4층과 5층을 철거했다. 사진=강대호

홍제역을 지나 홍은동과 홍제역을 나누는 홍제천 변에는 다양한 목적을 가진 건물이 하나 있습니다. 유진상가이지요. 

이 건물의 이름이 원래 유진상가아파트인 것에서 보듯 주상복합 건물이었습니다. 건축 시 5층으로 지어진 이 건물의 1층과 2층 일부에는 상가가, 그 외의 층에는 아파트가 있었지요. 하지만 건물 위로 내부순환도로가 지나는 바람에 4층과 5층이 뜯겨 나갔습니다.

그런데 유진상가 건물은 평시에는 민간인이 사용하도록, 유사시에는 군사 방어 시설이 되도록 지었습니다. 유진상가 1층 가로변에는 필로티 구조의 주차장이 있는데 전시에 탱크 진지로 사용될 수 있도록 설계했습니다. 

물론 유사시에 건물을 폭파해 길을 막는 효과도 가졌지요. 홍제천은 동쪽으로 가면 청와대가 나오는 중요한 방어선이었으니 홍제천 변에 들어선 유진상가에 군사 방어 목적을 부여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처사였는지도 모릅니다. 

유진상가-포방터시장의 유래

홍제천 인근에 군부대의 영향이 남아 있는 곳이 또 있습니다. 홍은동 포방터 시장입니다. 시장에 걸린 포방터의 유래에 따르면 임진왜란 이후 도성을 지키기 위해 설치한 오군영(五軍營) 중 포 훈련을 했던 곳이고, 6·25전쟁 때는 포를 설치해 서울을 방어했던 장소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쟁 후 포대가 철수하니 빈 땅으로 남았을 것이고 사람들이 모여들어 집을 지었을 것이겠지요. 사람들이 많이 살게 되니 자연스럽게 시장도 열렸을 것이고요. 시장 측에 따르면 포방터시장의 역사는 1960년부터 시작됐다고 합니다. 홍제천 쪽 시장 입구에는 대포 모형이 있는데 포방터시장의 정체성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네요. 

홍은동 포방터 시장. 입구에 대포 형상의 구조물이 있다. 사진=강대호

평일에 방문한 포방터 시장은 썰렁했습니다. 몇 년 전에는 TV에 나와 떠들썩했다던데 지금은 조용했지요. 그때 유명해진 돈가스 가게가 있던 자리는 지금도 돈가스를 파는 가게가 있습니다. 제가 방문했을 때가 점심시간이었는데 작은 식당에는 빈 테이블이 있었지요.

홍은동은 북한산 자락에 주택가가 형성돼 있습니다. 경사진 주택가 도로를 따라 마을버스가 다니지요. 도로 끝과 등산로 입구가 만나는 마을버스 종점 인근에 ‘홍은동 국민주택’이 있는데 마을버스 정류장 이름이기도 합니다.

‘홍은동 국민주택’은 1950년대 말에 대한주택영단(대한주택공사를 거쳐 지금의 한국토지주택공사)이 조성한 주택 단지를 일컫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 전쟁 후 서울은 심각한 주택 부족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1957년부터 대한주택영단에서 국민주택을 건설하기 시작했지요. 국민주택은 단독주택이나 연립주택으로 지었는데 관련 자료를 보면 ‘단독주택은 대지 40평에 건평 15평 규모, 연립주택은 한 개 동에 4세대가 입주하는 2층 규모의 집합주택’이었습니다.

홍은동 국민주택 단지. 옛 주택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지만, 구획의 모습은 그대로 남아 있다. 사진=강대호

마을버스 종점에서 한 주민에게 물어보니 이 동네 집들이 거의 국민주택이었다고 합니다. 새로 지은 건물들도 있지만 산 쪽으로 올라가는 골목 양편에 지은 지 오래돼 보이는 집들이 모두 국민주택이었다고 하네요.

계단을 오르며 동네를 내려다보니 집들이 같은 규격으로 보였습니다. 마당 크기도 주택 크기도 비슷해 보이고 나란히 줄지어 선 듯한 모습 또한 질서정연해 보였지요. 통일된 계획과 설계로 들어선 주택 단지의 특성을 보여주는 동네였습니다. 

홍은동 국민주택 단지 꼭대기쯤에 오르니 인왕산 자락의 홍제동이 보입니다. 지난주에 소개한 개미마을도 보이고 건물에 가리긴 했지만, 홍제천도 살포시 보이고요.

한편, 1950년대 말에 홍제천 변에 서구식 주택 단지인 ‘문화촌’이 들어서게 됩니다. 통일로를 따라 구파발 쪽으로 가면 ‘기자촌’도 들어서고요. 두 곳 모두 마을 이름과 관련한 인물들이 모여 살았다고 합니다. 다음 주에 계속 이야기하겠습니다. <매주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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