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 털던 돌덩어리에 신라 금석문이!…단양 적성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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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 털던 돌덩어리에 신라 금석문이!…단양 적성비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3.14 11: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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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0년 진흥왕때 이사부 장군의 남한강 유역 확보 공덕비

 

충북 단양의 신라 적성비(赤城碑)를 보려면 55번 중앙고속도로 상행선을 타야 한다. 경북 영주에서 충북 제천 방향으로 가다가 소백산맥 죽령을 지나면 단양휴계소에 나온다. 휴게소에서 내려 건물 뒤편으로 돌아가면 국보급 비각이 있다.

비각 앞에서 눈을 들면 야트마한 산(성재산)이 보이고, 정상에서 비탈을 내려오면서 산성이 눈에 들어온다. 「적성」(赤城)이다. 오늘날 「적성비」와 「적성」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비문에 이 곳을 의미하는 ‘적성’이라는 표현이 세 번이나 나오므로, 비명과 성의 이름을 지을 때 신라시대의 지명을 그대로 따왔다고 한다.

비석을 뒤로 하고 산을 타고 적성에 올라보면 그 아래 남한강이 시원하게 흐르고, 훌륭한 경관이 나타난다. 신라 이사부(異斯夫) 장군이 고구려 땅이었던 이 적성을 빼앗고, 강(남한강)을 해자로 삼아 북쪽의 고구려 군을 저지하기 위해 이 성을 쌓았을 것이다.

적성비가 위치한 곳은 경북 풍기에서 죽령을 넘어 충북 단양으로 가는 길목이다. 남으로는 소백산맥이 병풍처럼 펼쳐 있고, 남한강이 그 앞을 가로막고 있다. 천혜의 요새다.

적성을 중심으로 남한강을 거슬러 북동쪽으로 온달산성이 있고, 남한강을 따라 내려가 북서쪽엔 중원 고구려비가 자리잡고 있다. 온달산성은 고구려 온달장군이 전사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고구려 성이고, 중원고구려비는 고구려의 남쪽 경계를 알리는 비석이다.

적성 지방은 고구려측에서 보거나 신라측에서 보더라도 전략적 요충이다.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소백산맥의 관문인 죽령을 넘어 신라를 공격하는 루트이며, 신라 입장에서는 한강을 진출하는 전초기지로 역할을 했다.

 

▲ 적성비 /사진=김인영

 

이 비석은 우연히 발견되었다.

1978년 1월6일, 정영호 교수가 이끄는 단국대 조사단이 충북 단양을 찾았다. 온달의 유적을 찾고, 죽령을 중심으로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를 밝히는 학술조사를 벌이기 위해서였다. 조사단은 단양 읍내 성재산(해발 323m 적성산성)을 올랐다. 진흙밭을 지나 산성터로 이르렀다.

간밤에 내린 눈으로 산에 오르는 길은 진흙탕이었다. 옛날 기와편과 토기편이 흩어져 있었다. 대부분 신라토기였다.

조사단이 신발에 뭍은 흙을 털려고 두리번 거리다 흙묻은 돌부리가 지표면을 뚫고 노출된 것을 발견했다. 그 돌부리에 신발 흙을 털어내려고 고개를 숙이는 순간 무슨 글자가 보였다. ‘대(大)’자였고, 흙을 닦아내니 ‘아(阿)’자, ‘간(干)’자도 보였다. 그들은 허겁지겁 야전삽으로 흙을 걷어내고 보니, 30cm정도 비스듬히 누워있는 신라시대 비석을 발견했다. 지나다니던 등산객들에 무참히 밟히던 그저 그런 돌덩이는 고대 신라시대의 역사가 기록된 문서였다.

 

▲ 적성비와 적성산성 위치 /네이버 지도

 

성 안쪽, 높직하고 평평하게 다져진 대지 위에서 발견된 이 비석의 재질은 화강암이다. 높이가 1m 채 안되고 윗너비 1m 가량, 아랫너비 0.5m 남짓한 역사다리꼴이다. 지붕돌이나 받침돌 없이 비석만 땅에 묻혀 일부가 드러나 있었다. 모양으로 보아 지붕돌은 원래 없었던 듯하고 받침돌은 비의 아랫부분을 꽂아 세우는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석은 윗부분이 크게 깨졌고 군데군데 튀듯이 깨져나간 곳이 있다. 그러나 땅 속에 묻혀 있었던 덕분에 남은 비문의 자획이 깨끗하고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 적성비각 /사진=김인영

 

그 첫줄에 신라의 장군 이사부(異斯夫)의 이름이 나왔다. 1천5백년 전에 죽은 이사부의 이름이 돌에 새겨져 나타난 것이다.

내로라는 고고학자, 금석학자들이 모여 신라인들이 쓴 암호를 해독했다. 향찰식도, 한문도 아니었고, 지금까지 발견된 비문중 가장 난해한 문장이었다는 평이었다. 일부에 상충되는 의견이 있었지만, 그 윤곽이 잡혔다.

적성비는 1,500년전 고대 신라인들이 타임캡슐에 묻어둔 재료였다. 「적성비」는 이렇게 시작한다.

 

“□□년 □월중에 임금(진흥왕)이 대중등(大衆等)에 교사를 내리시니 훼부의 이사부지(伊史夫智) 이간지(伊干支)와 □□□서부질지(西夫叱智) 대아간지(大阿干支), □□夫智 대아간지(大阿干支), 비차부지(比次夫智) 아간지(阿干支)와 사탁부의 무력지(武力智) 아간지(阿干支) 등이 교사를 받들어 관장했다.”

 

「적성비」에서 이사부의 한자 표기는 이사부지(伊史夫智)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이사부(異斯夫)와 한자가 다르다. 지(智)는 이름 뒤에 붙이는 존칭어미로 오늘날 ‘씨’ 또는 ‘님’쯤으로 해석하면 된다. 한자의 차이는 있지만, 음으로는 ‘이사부’가 그대로 살아나온 것이다.

내용인즉, “진흥왕이 이사부와 비차부, 무력 등 10명의 고관에게 교시를 내려 신라의 국경개척을 돕고 충성을 바치다 숨진 야이차와 그 가족을 비롯해 적성사람(고구려인)의 공을 표창하고, 나중에도 야이차처럼 충성을 바치면 포상을 내리겠다”는 것이다.

소백산맥(죽령)을 넘어 고구려 땅을 뺏은 뒤 점령지 민심을 다독이는 차원에서 신라에 협조한 현지인에게 포상을 내리는 국가정책을 돌에 새긴 일종의 헌장인 셈이다.

「적성비」가 세워진 연대는 대략 진흥왕 11년(550년)으로 파악된다.

『삼국사기』에는 550년에 이사부가 진흥왕의 명을 받아 고구려와 백제가 싸우는 틈을 타서 도살성과 금현성을 빼앗고, 이듬해(551년)에 거칠부가 고구려를 침공해 죽령(竹嶺) 이북 고현(高峴) 이내의 10개 군을 취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사부가 점령한 도살성과 금현성이 적성 주변에 위치하고, 거칠부가 고구려를 치며 한강 유역의 대규모 땅을 확보하는 전진기지가 바로 죽령을 넘어 남한강 변에 위치한 바로 이 적성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적성비」에는 죽령을 넘어 단양을 점령하는데 공을 세운 고관 9명의 이름과 소속, 관직명이 나오고, 고관 10명중 가장 먼저 이사부가 등장한다. 이사부가 이들 고관중 우두머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 적성산성에서 본 남한강 /사진=김인영

 

적성비는 국보 198호, 적성산성은 사적 제265호로 지정되어 있다. 행정소재지는 충북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다.

 

▲ 적성산성 /사진=김인영
▲ 적성산성 /사진=김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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