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개의 붉은 혼이 흐르는 진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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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의 붉은 혼이 흐르는 진주성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2.26 12: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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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강과 자연 절벽이 형성하는 천혜의 요새…왜란 3대 대첩지

 

진주성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한번쯤 꼭 가보아야 할 관광지다. 남강과 촉석루, 성벽이 어우러진 모습은 훌륭한 풍경화를 그려낸다. 이 천하의 절경에 우리 역사의 숨결이 묻어 있다. 바로 임진왜란이다. 1차 진주성 전투에선 조선군이 10배나 많은 왜적을 물리쳤다. 왜군이 초기에 호남 곡창을 밟지 못한 것은 진주성 싸움이 전쟁 판세를 갈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번째 침공에서 진주성은 함락되었다. 논개의 일화가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 남강변에서 본 촉석루 /사진=김인영

 

진주성은 영남과 호남을 관통하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삼국시대부터 성이 있었다고 한다. 백제가 이 곳을 장악해 거열성(居列城)이라 했다는 견해가 있는데, 문화재청은 경남 거창군 거창읍 상리의 산성을 거열성으로 비정하고 있다. 거열성이라는 주장은 논란의 소지가 있다. 본디는 백제의 성이었다가 신라가 쟁취한 것임은 분명한 것 같다.

동쪽으로 흐르는 남강이 해자를 형성하고, 강변 절벽은 자연스런 방어벽을 형성하는 천혜의 요새다. 원래는 토성이었는데, 고려 우왕 5년(1379년)에 왜구의 침입을 방어할 목적으로 진주목사 김중광(金仲光)이 돌로 고쳐 쌓았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전(1591년)에 경상감사 김수가 진주성을 수축하고 외성을 쌓았다. 전쟁에 대비한 것은 즉시 효과가 나타났다. 1592년 부산을 공격한 왜군은 그해 10월, 진주성을 공격했지만,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 1554∼1592)이 3,800명의 군사로서 3만 여명의 왜적을 물리쳐 진주성대첩을 이룩하였다. 진주대첩은 한산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꼽힌다.

다음 해인 계사년(1593) 6월에는 왜놈들은 1치 전투의 패배를 설욕코자 10만 여명이 또 침략해 끝내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는 비운을 겪었다. 진주성은 호남으로 가는 길목으로, 이 성이 무너지면서 호남이 적에 의해 뚫리게 되었다. 이때 논개(論介)가 적장을 안고 남강(南江)에 투신, 순국했다.

7년 전쟁이 끝나고 1605년(선조 38)에 내성을 구축하고, 1607년 포루 12개를 증축하고, 1618년(광해군 10) 성 수축 마무리 작업을 하면서 지금의 진주성이 완성되었다.

성(내성)의 둘레는 약 1.7km이고, 외성의 둘레는 약 4km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8호로 지정되었다.

 

▲ 의암에서 바라본 촉석루 /사진=김인영

 

진주성 둘러보기의 첫 관문이 촉석루다(矗石樓)다. 남강 벼랑위에 높이 솟아 있는 촉석루는 영남 제일의 누각임을 자랑한다.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8호.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진주성의 주장(主將)의 지휘소다. 1365년(공민왕 14)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며 남쪽 지휘대로 사용하였으므로 남장대(南將臺)라고도 한다.

6·25전쟁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60년에 재건한 것이 현재의 건물이다. 팔작지붕에 다락루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복원할 때 누각 밑의 돌기둥은 창원의 촉석산에서 채석했고, 재는 강원도 오대산에서 가져왔으며 루에는 4개의 현판과 시인 묵객들의 시판이 걸려있다.

매년 가을 진주성에서는 '진주남강유등축제'가 개최되고 있다.

 

▲ 논개가 순국한 바위들 /사진=김인영

 

촉석루를 지나 남강변에 의암(義巖)이 있다. 너럭 바위가 있고, 사람이 건너 뛸만한 거리에 바위 하나가 또 있다. 지금은 위험 표지가 있지만, 논개가 왜장과 함께 남강물에 순국할 때에는 그런 표지가 없었을 것이다. 선조 26년(1593년)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성이 함락되고 7만여 민·관·군이 순절하자 논개는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장을 이 바위로 유인해 순국했다. 논개의 순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지역 사람들이 이 바위를 의암이라 블렀다고 한다. 의암의 바닥 넓이는 3.5m x 3.3m다.

 

▲ 변영로의 ‘논개’ 시비 /사진=김인영

 

시인 변영로의 시 「논개」(1922)가 큰 바위 위에 새겨져 있다.

<論介>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 논개를 기리는 비 /사진=김인영

 

논개를 모시는 사당이 의기사(義妓祠)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조16년 (1740년)에 경상우병사 남덕하가 창건했으며, 지금의 의기사는 의기창렬회가 시민의 성금을 모아 재건한 것이다.

 

<진주성의 문화재?

 

①서장대

진주성 서문의 지휘소인 서장대(西將臺)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회룡루(回龍樓)로 나오는데 규모는 작았으나 촉석루와 같이 다락집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서장대는 1934년 독지가 서상필씨가 중건한 것이다.

 

② 창렬사

창렬사(彰烈祠)는 계사년(1593년)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순절한 분들의 신위를 모시기 위해 선조 40년(1607년)에 건립된 사액(賜額) 사당이다. 고종5년(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충민사에 모셔져 있던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신위와 삼장사등 39의 신위를 모시고 있으며, 매년 음력 3월 初丁日 제향을 올리고 있다.

 

▲ 호국사 /사진=김인영

 

③ 호국사

호국사(護國寺)는 고려시대 창건되어 내성사로 불리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승병의 근거지 로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순국한 승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호국사란 이름으로 재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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