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봉균의 역사여행⑰…원교근공책ⓐ (범저의 계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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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봉균의 역사여행⑰…원교근공책ⓐ (범저의 계책)
  • 손봉균
  • 승인 2018.02.24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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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손봉균의 역사여행, 원교근공책’은 2회로 나눠 게재합니다. /편집자주

 

<진(秦)나라는 전국시대 말기에 원교근공책(遠交近攻策)을 기본적인 외교정책으로 채택하여 중국을 통일하였다. 이번 글에서는 원교근공책의 내용과 진 소양왕(秦昭襄王)이 범저의 건의에 따라 원교근공책을 채택하게 되는 과정에 관하여 소개하겠다. 진나라가 상앙의 개쳑으로 가장 강한 국가가 된 후, 소진과 장의가 주장한 외교정책인 합종책과 연형책이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실패한 후, 범저가 등장하여 원교근공책을 주장하였다.>

 

▲ 손봉균씨

 

전국시대 말기, 기원전 270년경, 진소양왕(秦昭襄王),

 

<원교근공의 의미>

원교근공(遠交近攻)의 한자는 遠:멀 원, 交:사귈 교, 近:가까울 근, 攻:칠 공 이다.

그 뜻은 ‘먼 나라와 화친하고 가까운 나라를 공격하는 수법’을 말한다. 즉 먼 곳에 위치한 나라와 친하게 지내어 가까운 나라를 칠 때에 먼 나라가 지원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외교정책이 원교근공책이다. 진나라에서 상앙이 만들어 놓은 강력한 군대의 힘을 배경으로 진소양왕 이후 이 원교근공책을 기본적인 외교정책으로 채택하여 중국을 통일함으로서 유명해 진 정책이다.

 

(1) 범저가 위나라에서 처벌을 받고 죽을 뻔한 내용

 

범저는 위(魏)나라 사람으로 자기 나라에서 벼슬을 살고자 했다. 그는 능히 천지이치를 아는 능력 있는 인재였으며, 국가를 일으키고 천하는 바로 잡겠다는 장한 뜻이 있었다. 그러나 워낙 가난하고 미천해서 출세할 연줄이 없었다. 범저는 우선 중대부(中大夫) 벼슬에 있는 수가(須賈)의 몸을 의탁하고 그 집안일을 봐 주는 사인 노릇을 했다.

위나라는 제나라와 외교적으로 어려운 일이 생겨, 이를 해명하기 위하여 중대부(中大夫) 수가(須賈)를 친선사절로 제나라로 보냈다.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역사여행⑧, 황금대 이야기 참조) 연소왕이 악의를 대장으로 삼아 제나라를 칠 때 위나라가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연나라를 도와 제나라를 같이 쳤다.

거의 망하다 시피한 제나라는 그 후 전단이 연나라 군사를 물리치고 태자 법장을 왕으로 모시고 제 양왕(齊襄王)이라 하고 나라를 다시 정비하였다. 이에 위나라는 연나라를 도와 제나라를 친 것에 대하여 사과하고 앞으로 제나라와 친선을 강화하기 위하여 친선사절을 보냈다. 수가는 자기 집 일을 보는 범저를 데리고 제나라로 갔다.

 

제나라에 간 수가는 제 양왕을 뵙고 지난 일을 사과했다. 그러나 제 양왕은 언성을 높혀 위나라를 질책하였으며, 위나라가 우리 제나라와 친선을 하려거든 믿을 수 있는 증거를 보이라고 다그쳤다. 무능한 수가는 아무 말도 못하고 연신 머리만 조아렸다. 곁에서 이 꼴을 보다 못해 범저가 수가를 대신하여 변명했다. 제 양왕은 범저의 변명을 듣고는 합리적이고 일리가 있는 변명에 충격을 받고는 즉시 일어나 자신이 위나라에 과한 말을 한 것에 대하여 사과하였다.

제 양왕은 수가를 따라온 범저가 인재임을 알아보았다. 더구나 그러한 인재가 사신인 수가의 집안일을 봐주는 사인(舍人:마름 같은 것)으로 있다는 것을 알고는 더욱 탐이 났다. 제 양왕은 그날 밤에 공관으로 신하를 보내 범저를 만나게 하고 자신의 뜻을 전했다.

범저를 만난 신하는 범저에게 살짝 말한다.

“우리 대왕께서 선생의 높은 재주를 사모하고 계시오. 그래서 선생을 객경으로 모실 작정이시오. 선생은 위나라로 돌아가지 말고 우리 제나라에 머물러 주오”

범저가 사양한다. “나는 위나라 사신과 함께 왔으니 다시 사신과 함께 돌아가야 할 몸이오. 이만 신의도 지키지 못한다면 어찌 사람이라 하겠소”

범저를 만난 신하가 궁으로 돌아와서 사실대로 보고 하였다. 제 양왕은 더욱 범저를 존경하게 되었다. 제 양왕은 황금 10돈과 술을 범저에게 보내 좋은 말로 다시 권했다. 역시 범저는 받지 않았다(보낸 물건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제의를 거절한다는 뜻이다). 이에 제 양왕은 4번이나 범저에게 신하를 보내 권했다. 범저는 나중에는 다른 나라 왕의 호의를 너무 거절할 수 없어 술만 받고 황금은 끝까지 사양하였다.

범저와 같이 공관에서 머물고 있던 수행원 중 한 사람이 수가에게 가서 이러한 사실을 고해 바쳤다. 수가가 범저를 불러 물으니 범저는 사실대로 수가에게 말했다. 그러나 수가는 속으로 범저가 적국과 내통하고 있는 것으로 의심했다. 결국 수가는 별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범저와 함께 제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돌아 왔다.

 

위나라로 돌아 온 수가는 위 소왕에 다녀 온 경과를 보고하다가, 제왕이 범저에게 황금과 술을 보낸 사실을 말하고, 범저가 제나라와 내통한 것으로 의심이 간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위 소왕과 정승 위제가 대로했다. 정승 위제가 범저를 잡아 들여 추궁했다. 범저는 사실대로 말하고 자신은 잘 못이 없다고 변명하였으나, 위제는 믿지 않고 죽도록 치라고 명령하였다.

옥졸한테 곤장을 맞은 범저는 갈빗대와 이빨이 부러지고 한 군데도 성한 데가 없이 되고 나서 기절하였다. 옥졸로부터 범저가 죽었다고 보고를 받은 승상 위제는 교외에 갔다 버려 까마귀 밥이 되게 하라고 명령하였다. 교외에서 정신이 돌아온 범저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범저가 집에 와서 자기 부인한테 말한다. “정승 위제가 나를 몹시 미워하고 있다. 그 자는 내가 죽은 줄로 알지만 그래도 혹 의심할지 모른다. 내 시체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면 위제는 반드시 우리 집을 수색할 것이다. 그대는 이 밤이 새기 전에 내 친구인 정안평에게 나를 보내다오. 시간이 지나면 상처가 다 아물겠지. 연후에 우리는 위나라를 떠나 어디론지 달아나야 한다. 내가 정안평의 집으로 간 후에 오늘 밤에 발상하고 곡을 하여라. 즉, 그대는 내가 죽은 것처럼 슬피 울어 다른 사람의 의심을 사지 않아야 한다”

이튿날 정승 위제는 옥졸을 불러 어제 내다버린 위제의 시체를 확인해 보라고 하였다. 확인을 하고 돌아온 옥졸이 보고했다. “거적만 있고 시체는 없습디다. 워낙 사람이 없는 들판에 버렸기 때문에 밤새 여우와 늑대들이 와서 다 물어갔나 봅니다“

위제는 그래도 의심쩍어서 사람을 범저의 집으로 보내 봤다. 이윽고 그 사람이 돌아와서 ‘범저의 계집은 자기 남편이 죽었다는 걸 이미 알고, 발상하고 울고 있더이다‘하고 보고 했다. 그제서야 위제는 더 의심하지 않았다.

한편 범저는 정안평의 집에 숨어 있으면서 치료를 하여 점점 상처도 아물고 기동할 수 있게 되었다. 장안평은 범저를 데리고 구자산으로 가서 숨었다. 그리고 범저의 이름을 장록이라고 변성명했다. 그래서 구자산 사람들은 아무도 장록이 범저인 줄 몰랐다. 그럭저럭 반년이 지났다.

 

▲ 범저 동상 /바이두 백과

 

(2) 범저가 진나라에 등용되고, 진나라가 원교근공책을 채택하는 과정

 

진(秦)나라에서 왕계란 사람이 진 소양왕의 분부를 받고 사신이 되어 위나라에 왔다. 왕계는 위소왕을 뵙고 나서 공관에 머물렀다. 이 때 정안평은 구자산에서 내려와 역졸로 가장하고 진나라 사신 왕계의 시중을 들었다. 정안평은 어찌나 곰살궂게 시중을 잘 들었던지 진나라 사신 왕계의 눈에 들었다. 왕계는 특히 정안평을 귀여워 했다.

왕계가 정안평에게 묻는다.

“너희 나라에 어진 사람이 있냐뇨? 그런 어진 사람이 아직 벼슬을 못하고 초야에 묻혀 있는 인재가 혹시 있는지?”

정안평이 대답한다.

“지난날에 범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참으로 지모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 정승께서 어찌나 가혹한 형벌을 다스렸는지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왕계가 길이 탄식하면서 말한다.

“나도 들어서 잘 안다. 애석하고 애석한 일이다. 범저가 우리 진나라에만 왔을지라도 맘껏 그 큰 재주를 펼쳤을 텐데....”

정안평이 슬며시 고한다.

“그런데 소인이 사는 마을에 장록 선생이란 분이 계십니다. 소인이 본 바로는 장록 선생의 재주가 결코 범저만 못하지 않습니다. 대감은 한번 그 장록 선생을 만나보지 않으시렵니까?”

왕계가 반가이 대답한다.

“그런 훌륭한 분이 계신다면야 반드시 만나보고 싶소”

그래서 장록은 그 날 밤중에 왕계를 찾아왔다. 왕계가 장록에게 천하정세에 대하여 물어보니 장록은 손바닥을 들여다보듯이 천하의 앞날에 대하여 대답했다. 왕계가 진나라에 갈 의사가 있는지를 물으니 장록은 자기가 바라던 바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사신의 임무를 마치는 5일후에 만나서 같이 진나라로 가기로 하였다.

 

사신의 임무를 마치고 진나라로 돌아 온 왕계는 궁으로 들어가서 진 소양왕을 뵙고, 위나라에 갔다 온 경과를 보고 했다.

연후에 진 소양왕에게 건의했다. “위나라에서 지모가 출중한 천하의 기재를 만났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계란을 쌓아놓은 것 같은 위기(누란지위(累卵之危)의 고사성어)의 진나라를 구할 비책이 있으나 이는 글로써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신이 데리고 왔으니 대왕이 한 번 불러보십시오.”

진 소양왕은 여가가 있을 때 한 번 만나보겠으니, 우선 객관(손님에게 제공하는 집)에 있게 하라고 하였다. 장록(범저)이 공관에 있은지도 1년이란 지났다.

어느 날 장록(범저)이 큰 거리를 걷고 있는데, 승상 위염이 대군을 거느리고 어디론가 전쟁하러 가고 있었다. 장록(범저)이 노인에게 물으니 노인은 ‘승상 위염이 제나라 강수 땅을 치러간다’고 하면서 ‘중간에 한나라와 위나라가 있으니 제나라는 아주 먼 곳에 있습니다. 이렇게 먼 곳에 있는 제나라를 치러 가는 이유는 제나라의 강수 땅 가까이 있는 위염의 땅을 넓히기 위하여 제나라와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진왕은 제나라를 칠 생각이 없는데 자신의 땅을 넓히기 위해서 승상 위염이 하는 일입니다’고 말하였다.

 

장록(범저)은 이 말을 듣고 자기 객사로 돌아와서 진 소양왕에게 바치는 글을 썼다. 그 글에서 ‘... 신은 객사에서 대왕의 부르심을 기다린 지 1년이 지났습니다. 만일 신이 필요하시다면 잠시 시간을 내어 직접 신의 말을 들어보시고, 그렇치 않으시다면 이 진나라에서 신을 붙들어 둔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대저 신하는 의견을 말하는 것이니 임금은 그 말을 듣고만 계시면 됩니다. 그러나 신이 아뢰는 말이 옳치 못할 경우엔 그 때에 임금께서 신을 죽여도 늦지 않습니다. ....’

 

그간 진소양왕은 장록(범저)을 잊고 있었다. 진소양왕은 그 글을 읽고서야 장록이 생각났다. 그래서 이궁에서 만나기로 하고 연락을 보냈다.

장록(범저, 이후 범저로 통일하겠다)이 이궁에 도착해보니 아직 진소양왕이 도착하지 않았다. 짐짓 모르는 척하며 비빈과 궁녀들이 왕래하는 곳으로 갔다. 마침 진소양왕이 비빈의 처소를 거쳐 이궁으로 오다가 범저를 만나게 되었다.

환관들이 말했다. “대왕이 오신다. 어서 썩 나가지 못할까!”

범저가 짐짓 큰소리로 대꾸했다.“진나라에 무슨 군왕이 있는가? 진나라에는 오직 선태후와 양후만 있을 뿐이다.”

 

※ 당시 진소양왕은 보위에 오른 지 36년이 지났다. 그러나 당시 진나라는 위염을 포함해 동복동생인 경양군 등 인척들이 왕권을 크게 잠식하고 있었다. 범저는 이런 내용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지적한 것이다.

 

진소양왕은 이를 듣고 크게 놀랐다. 곧 앞뜰까지 내려와 영접하고, 국빈에 대한 예의를 갖추어 가르침을 청했다.

범저가 고개를 끄덕이며 연신 대답했다.“아, 예, 예.”

진소양왕이 모두 3차례에 걸쳐 거듭 가르침을 청했으나 범저는 계속 같은 말만 했다. 진왕이 정중히 무을 꿇고 물었다.

“선생은 과인을 가르쳐줄 수 없다는 뜻으로 그러는 것이오?”

범저가 그제야 이같이 대답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제가 듣건대 태공망 여상은 주 문왕과 처음 만났을 때 위수의 북쪽 강가에서 낚시를 드리우고 있는 어부의 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주 문왕이 한두 마디 말을 나누어보고는 곧바로 그를 태사(太師)로 삼아 함께 궁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는 여상의 말이 주 문왕을 감동시켰기 때문입니다. 주 문왕은 여상의 계책에 힘입어 마침내 제왕(주나라를 건설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뜻임)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만일 주 문왕이 여상을 소홀히 여겼거나 깊은 말을 나누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주 문왕과 주 무왕이 뛰어났을지라도 결코 왕업을 성취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손님 입장으로 와 있는 신하입니다. 게다가 대왕과 가까운 사이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제가 진언하고자 하는 것은 모두 대왕의 정사를 바로 잡기 위한 것으로 대왕의 육친과 관계된 일도 있습니다. 아직 대왕의 진심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대왕이 3번이나 물을 때까지 대답하지 못한 것입니다. 저는 오늘 대왕 앞에서 잘 못 말하면 내일 주살당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대왕이 실로 저의 진언을 실행에 옮겨주시기만 하면 저로서는 죽음도 근심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대왕은 지금 위로는 선태후(진소양왕의 어머니)의 위엄을 두려워하고 아래로는 간신의 태도에 미혹되어 궁중 깊숙한 곳에 머문 채 태자의 교육을 담당한 시녀와 시종의 손길을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어느 것이 간사한 것인지조차 분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같이 하다가는 크게는 종묘가 뒤집어지고, 작게는 대왕의 일신이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제가 염려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제가 죽어 진나라가 바로잡힐 수만 있다면 죽는 것이 살아 있는 것보다 더 나을 것입니다.”

진소양왕이 부탁했다.

“선생은 무슨 말씀을 그리하시는 것이오? 과인이 선생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은 하늘이 선왕을 좋게 여겨 과인을 버리지 않은 것이오. 일의 대소를 막론하고 위로는 태후에 관한 일로부터 아래로는 대신에 관한 일에 이르기까지 원컨대 선생은 과인에게 모두 가르쳐주고 과인을 추호도 의심치 마십시오.”

범저가 말했다.

“진나라 군사의 용맹과 많은 군사장비를 가지고 제후를 대적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마치 한나라의 명견인 한로(韓盧)를 풀어 절뚝거리는 토끼를 사냥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진나라는 관문을 닫은 지 15년 동안 감히 산동으로 출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왕은 패왕의 대업을 쉽게 실현할 수 있는 여건을 구비하고 있는데도 지금 정반대로 함곡관을 굳게 닫은 채 감히 산동의 제후국들에게 무위(武威)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소양왕이 묻는다.

“과인의 계책에 어떤 실책이 있는지 말해주시오.”

이때 좌우에 숨어서 몰래 엿듣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범저가 진소양왕 앞으로 몸을 당겨 앉으면서 말했다.

“지금 승상이 한, 위 두 나라를 건너뛰어 제나라를 공격하려고 군사를 출병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진나라와 제나라는 멀리 떨어져 있어 군사 작전을 펴기가 쉽지 않습니다. 만일 적은 군대를 보내면 패하기 십상이라 다른 제후들의 웃음을 살 것이고, 많은 군대를 보내면 국내 문제가 어찌 될지 장담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뿐만 아니라 두 나라 사이에는 한(韓)나라와 위(魏)나라가 있습니다. 그들이 순순히 길을 빌려 줄지도 의문이거니와, 설령 통과하여 제나라를 쳐서 이긴다 하더라도 영토에 편입시킬 방법이 없습니다. 옛날 위나라가 조나라를 통과해 중산(中山)을 정벌했지만, 정작 그 땅을 손아귀에 넣은 것은 조나라였지 않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위나라는 중산에서 멀고 조나라가 가깝기 때문에 남 좋은 일만 시켜 주고 만 셈이지요. 그러니 전하께서는 우선 제나라, 초(楚)나라와 좋은 관계를 맺어 놓고 가까운 한나라와 위나라부터 치도록 하십시오. 그래서 영토를 확장하고 국력을 키우면 그 다음에는 제나라, 촉나라가 무슨 수로 당하겠습니까? 이것을 일컬어 ‘원교근공책(遠交近攻策)’이라 합니다. 그리하면 한 치의 작은 땅을 얻어도 대왕의 것이 됩니다. 지금 이런 계책을 버리고 오히려 정반대로 먼 나라를 치고 가까운 나라와 화친하는 외교정책(원공근교(遠攻近交)을 고집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진소양왕이 범저의 계책에 전적으로 동감하면서, 곧바로 범저를 객경으로 삼은 뒤 함께 국가대사를 논의했다. <당시 두 사람이 나눈 대화 내용은 〈범수채택열전〉과 《자치통감》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사마천과 사마광 모두 그만큼 중요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진소양왕은 범저의 계책을 따라 동쪽에 있는 한나라와 위나라를 치기로 작정하고, 바로 명령을 내려 승상 위염과 대장 백기에게 제나라 정벌을 중지시켰다.

당시 범저가 취한 계책은 그 자신이 분명히 밝혔듯이 원교근공의 계책이었다. 실제로 진소양왕은 이 계책을 이용해 주변의 열국들을 차례로 제압해나갔다. 원교근공의 계책은 범저가 은퇴한 뒤에 즉위한 진시황 때도 그대로 받아들여져 중국통일의 기본 방략이 되었다.

 

아울러 범저는 진 소양왕이 원교근공책에 대한 결심이 확고하고, 자신을 믿는다는 것을 알고는 진 소양왕에게 외척에 관한 일을 건의했다.

“지금 진나라는 어머니인 선태후, 승상 위염 등이 국정을 마음대로 농단한다고 하면서 구체적인 사례들을 설명하였다. 즉, 선태후께서는 자신인 국모라는 것만 믿고 40여 년 동안이나 나라 일을 맘대로 처리하였습니다. 위염은 혼자서 진나라 승상 노릇을 해 왔습니다. 화양군, 경양군과 고릉군도 각기 문호를 세우고서 매사에 죽이고 살리는 것을 마음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들 개인의 재산은 국가 공익을 위한 자본보다도 10배나 더 많습니다. 대왕은 용상에 높이 앉아 실속 없는 명칭만 누리고 계시니 또한 위태로운 지경에 있습니다. 옛날에 최저는 제나라 정권을 잡고 맘대로 세도를 부리다가 마침내 임금인 제 장공까지 죽였습니다. 이러한 예에서도 보듯이, 지금 진나라 외척의 세력을 꺽지 않으면 앞으로 이 진나라를 다스릴 분이 대왕의 자손이 아니고 딴 사람이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진 소양왕은 이 말을 듣고 모골이 소연했다. 그 이튿날 위염을 불러 승상의 인을 거두었다. 그 다음날엔 화양군, 고릉군, 경양군 등 외척들을 다 관외로 쫒아내고, 어머니인 선태후도 심궁으로 거처를 옮기게 하고, 일체 정사에 간섭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진나라의 왕권이 정상적으로 되었다.

 

※ ‹“당시 진소양왕은 보위에 오른 지 36년이 지났다. 남쪽으로 초나라를 격파하고, 동쪽으로 제나라를 격파하였다. 또 여러 차례 한·조·위 삼진을 곤경에 빠뜨렸다. 진 소양왕은 잇단 승전으로 인해 커다란 자부심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진 소양왕은 위염을 포함해 동복동생인 경양군 등 인척들이 왕권을 잠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이는 국가의 근본을 갉아 먹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이들을 철저히 다스리지 않는 한 중국통일 행보는 시작부터 삐걱거릴 수밖에 없었다. 범저는 이런 이치를 꿰고 있었다. 진 소양왕이 범저의 왕권강화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진시황의 중국통일은 적잖은 어려움을 겪었을 공산이 컸다.›

 

손봉균씨는
국토교통부에서 30년간 재직했다. 서울대학교 졸업, 행정고시 19회에 합격. 전 국토지리정보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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