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사 두 개 현판 그대로 유지된다…역사성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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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사 두 개 현판 그대로 유지된다…역사성 인정
  • 김현민
  • 승인 2018.02.22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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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숙종과 박정희 현판 모두 의미 있다”

 

역사는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흥할때도 있고, 쇄할 때도 있고, 자랑스런 역사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가 공존한다. 모든 역사 소재와 유물들이 있는 그대로 유지되어야 한다. 후세들이 자신의 이해와 감성에 의해 바꾸거나 부정할 수는 없다.

충무공 이순신을 모신 현충사 현판의 문제도 그렇다.

현충사는 현재 두 개가 있다. 6·25 전쟁 이후 성역화 사업을 통해 만들어진 신 현충사와 일제강점기인 1932년 6월 중건된 구 현충사다. 옛 현충사는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때 헐린 사당을 국민 성금으로 다시 지은 것이며, 이곳에는 충무공 후손이 보관해 온 숙종 현판이 걸렸다. 신 현충사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현판이 걸려 있다.

현충사 현판의 문제가 불거진 것은 지난해 9월 이순신 가문의 15대 종부인 최순선씨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슨 한글 현판을 숙종의 한자 현판으로 바꿔 달라고 요구하면서부터였다.

한편 덕수이씨 충무공파 종회가 1960년대 성역화 사업을 통해 제작된 박 전 대통령의 현판에도 나름의 역사성이 있다는 점을 들어 현판 교체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이에 따라 현충사 현판을 둘러싼 문중 갈등이 첨예화하기도 했다.

 

▲ 위: 숙종 사액 현판, 아래: 박정희 전대통령 현판 /문화재청 제공

 

이에 문화재청이 21일 사적분과 문화재위원회를 열어 현상변경 여부를 검토했다. 이 위원회는 사적 제155호 아산 이충무공 유허 내 현충사 사당 현판을 현행대로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현충사 숙종 사액현판은 1868년 흥선대원군 때 서원철폐령으로 사당이 헐리면서 후손이 보관해오다 1932년 일제 강점기에 국민성금으로 지어진 구(舊) 사당에 다시 걸리게 되었으며, 1967년 성역화사업으로 신(新) 사당이 건립되면서 구 사당은 숙종 사액현판과 함께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1932년 경매로 넘어갈 위기에 처한 이충무공 묘소의 위토(位土, 제사 등과 관련한 비용 충당을 위해 마련한 토지)를 당시 국민 성금으로 갚고 남은 돈으로 현충사(구 사당)를 중건한 바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친필 현판은 숙종사액 현판을 철거하고 교체 설치한 것이 아니라 성역화사업 당시 신 사당을 건립할 때 제작·설치하게 된 것이다.

현충사는 이순신 장군이 무과에 급제하기 전까지 살았던 곳으로, 조선 숙종 32년(1706) 사당이 세워졌다.

 

문화재위원회(사적분과)는 충무공파 후손들 간에도 서로 의견이 엇갈리고 있으며, 1967년 현충사 성역화 사업 당시 만들어진 신 사당에 1932년 국민성금으로 건립된 구 사당에 걸려있는 숙종 사액 현판을 떼어내 옮겨 설치하는 것은 그 시대의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건물과 현판의 일체성을 훼손하는 문제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현행대로 유지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한편 문화재청은 도산서원의 금송도 21일 열린 문화재위원회 심의 결과에 따라 사당권역 밖으로 옮겨심기로 했다. 도산서원 금송은 일본 특산종으로 파악되었다.

또 칠백의총의 금송은 올해 조경정비계획을 수립하여 문화재위원회에서 심의할 예정이다.

한편, 현충사 경내 금송은 2017년 10월에 조경정비계획을 수립하여 같은 해 11월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마쳤으며, 식생상태 등을 감안하여 올해 안으로 사당권역에서 사무권역으로 옮겨 심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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