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황제 꿈이 서린 환구단은 사라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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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 꿈이 서린 환구단은 사라지고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2.11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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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의 단은 헐려 호텔 부지로 사용되고, 황궁우와 석고만 덩그러니

 

서울 중구 소공동의 웨스틴조선호텔은 서양식 호텔로 휘황찬란하게 빛난다. 그 옆에 고색창연한 황궁우(皇穹宇)와 석고(石鼓)만이 덩그러니 남아 우울하게 자리잡고 있다. 고종이 황제국을 선포한 원래의 환구단(圜丘檀)은 헐려 역사 속에 사라졌다.

황궁우는 베이징 천단공원(天檀公園)에도 있다. 중국 황제(천자)가 하늘에 제사지내는 곳이다.

우리 역사에도 황제가 있었다. 고종과 순종 황제다. 소공동 환구단의 일부인 황궁우는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한 고종이 다시 궁으로 돌아와 황제를 선포하면서 만들어진 건축물이다.

 

▲ 환구단의 황궁우 /사진=김인영

 

명성왕후를 잃고 1896년 2월 11일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고종은 곧바로 국정운영계획을 세웠다. 고종은 경운궁(덕수궁) 수리를 명하고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문 건립을 승인했다. 곧바로 환궁 준비를 한 것이다.

1년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문후 1897년 2월 20일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어했다. 고종은 을미사변 이후 미뤄왔던 명성왕후 국장을 치르고, 8월 17일 광무(光武)라는 새로운 연호를 채택하고 남별궁터에 환구단 건설을 지시했다.

환구단 터는 태종의 둘째딸 경정공주(慶貞公主)가 살던 곳으로 ‘작은 공주골’, ‘소공주동’이라 불렸으며 오늘날 소공동(小公洞)이다.

환구단 건설에는 열흘이 걸리지 않았다. 10월 2일 공사를 시작해 완공하고, 10월 11일 고종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환구단에 가서 천신에 고하고 제사를 지낸후 황제 위(位)에 올랐다.

 

▲ 인근 빌딩에서 내려다본 황궁우 /사진=김인영

 

환구단은 중국의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기 때문에 앞서 조선의 역대임금들은 환구단을 만들지 못했다.

고려는 중국에 크게 눈치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환구단을 지었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성종은 즉위 2년차(983년) 정월에 환구단에 풍년기원제를 드렸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초에도 환구단을 설치한 기록은 있다. 태조 7년(1398년) 4월, “가뭄이 심해 종묘(宗廟)·사직(社稷)·원단(圓壇)과 여러 용추(龍湫:폭포수 아래 깊은 웅덩이)에 비를 빌었다”고 했으며, 세조 때 환구단을 쌓게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하지만 동국여지승람 등에 환구단의 명칭이 보이지 않아 실제로 환구단을 지었는지에 대해 확인되지 않는다. 그후 제후국의 왕이 천자의 제사를 지내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사대부들의 지적으로 제천단을 폐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종황제가 황제가 되기로 결심한 만큼 중국의 천자, 일본의 천황과 버금가는 제단을 짓고 행사를 열 필요가 생겼다. 선대 임금들이 중국 황제의 눈치를 보느라 하지 못했던 황제 의식을 과감하게 진행한 것이다. 중국의 청나라는 앞서 청일전쟁에서 패해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상실한데다 왕후를 살해한 일본과는 맞장을 떠야 할 상황이었다.

고종은 우리나라도 천신에게 제를 드려야 한다는 심순택의 상소에 따라 영선사 이근명이 지관을 데리고 지금의 소공동 해좌사향(亥坐巳向)에 길지를 정하고 제단을 쌓게 했다.

 

▲ 석고 /사진=김인영

 

고종황제가 건립한 환구단은 환구단, 황궁우, 석고단 등 크게 세 영역으로 구분되었다.

환구단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단(壇)으로, 둥글게 지어 원단(圓壇)이라고도 했다. 예로부터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 하여 하늘에 제사지내는 단은 둥글게, 땅에 제사지내는 단은 모나게 쌓았기 때문이다. 이 단은 화강석으로 된 3층 단이며, 중앙 상부는 황색으로 칠한 원추형의 지붕이었다. 익공계(翼工系)의 양식을 따왔다고 한다. 건물의 1·2층은 통층구조로, 중앙에는 태조의 신위를 봉안했다. 건물은 청나라 영향을 받은 듯 복잡하게 장식되어 있는 가운데 사래 끝에는 조선시대 궁궐 건축에서 볼 수 있는 청동 토수들이 끼워져 있었다.

환구단이 조성된 2년 후인 1899년 북쪽에 3층 팔각정인 황궁우(皇穹宇)를 건립하고, 신위판(神位版)을 모시면서 태조를 추존하여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로 삼았다. 황궁우의 삼문은 세 개의 아치로 구성되었으며 문 앞을 장식한 석조 계단은 궁궐의 월대를 장식하고 있는 답도와 형태가 흡사하여 건물의 위계를 짐작케 한다.

또 석고(石鼓)는 1902년 고종 즉위 40년을 기념하여 세운 석조물이다. 3개의 돌북은 하늘에 제사를 드릴 때 사용하는 악기를 형상화한 것으로, 몸통에 용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이 용무늬는 조선말 조각을 이해하는 좋은 자료가 된다. 세 개의 석고는 친근하지 않은 특이한 석조물이지만 측면에 새겨진 용무늬는 매우 정교하면서도 힘이 느껴진다.

 

▲ 황궁우의 문 /사진=김인영

 

하지만 고종의 꿈은 허무하게 끝나 조선이라는 나라는 일제에 빼앗겼다. 일제는 조선의 왕이 천제를 지내는 것은 하늘에 대한 불충이므로, 천조대신의 후예인 천황이 지내야 한다며 원구단을 철거하기로 방침을 정한다. 1913년 4월에 조선총독부는 환구단을 헐고 그 자리에 건평 1,918㎡의 총독부 철도조선호텔을 착공해 이듬해 준공했다. 이 건물은 1968년에 헐리고 지금의 웨스틴조선호텔 건물로 대치되었다.

남아있는 것은 화강석 기단 위에 세워진 황궁우와 석고다. 환구단의 터에는 웨스틴조선호텔이 깔고 앉아 그 아래에 3층 주차장을 파서 사용되고 있다. 황궁우와 석고는 호텔의 입장에서 뒷마당 정원 정도로 활용되고 있다. 역사의 희롱이다.

환구단의 정문인 환구대문도 철거되었다. 사라진줄 알았던 환구대문은 2007년 서울 강북구 우이동 그린파크호텔에서 발견되었다. 호텔측은 영문도 모른채 시내버스 출입구로 사용했다. 발견 당시 현판은 사라지고 백운문이라는 현판이 대신했는데 건축 방식을 조사해본 결과 환구단 정문임이 밝혀졌다. 그린파크호텔이 재개발되면서 제자리로 이전돼 2009년에 복원되었다.

 

사적 157호로 지정되어 있다. 명칭에 대해 환구단(圜丘壇)과 원구단(圜丘壇, 圓丘壇)으로 혼용되던 것을 2005년 문화재청에서 한자 표기는 「고종실록」에 따라 '圜丘壇'으로, 한글 표기는 1897년 10월 당시 「독립신문」을 따라 '환구단'으로 정했다.

 

▲ 환구단의 황궁우 /사진=김인영
▲ 석고 /사진=김인영
▲ 황궁우의 문 /사진=김인영
▲ 황궁우의 해태상 /사진=김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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