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중립외교론의 허구③…잘못 읽은 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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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중립외교론의 허구③…잘못 읽은 고려사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2.05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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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항 밀지 내렸다면 역사적 과오…후금에 적극 대응했어야

 

「광해군 일기」 1621년(즉위13년) 6월 6일자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광해군이 요동의 상황을 보고받고 대신들을 질책한다.

 

“중국의 일의 형세가 참으로 급급하기만 하다. 이런 때에 안으로 스스로를 강화(自强)하면서 밖으로 견제하는 계책을 써서 한결같이 고려(高麗)에서 했던 것과 같이 한다면 거의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 나라의 인심을 살펴보면 안으로 일을 힘쓰지 않고 밖으로 큰소리 치는 것만 일삼고 있다. 조정의 신하들이 의견을 모은 것을 가지고 보건대, 무장들이 올린 의견은 모두 강에 나가서 결전을 벌리자는 의견이었으니 매우 가상하다 하겠다. 그렇다면 지금 무사들은 어찌하여 서쪽 변경은 죽을 곳이라도 되는 듯이 두려워하는 것인가. 고려에서 했던 것에는 너무도 미치지 못하고 있으니, 부질없는 헛소리일 뿐이다. 강홍립 등의 편지를 받아 보는 것이 무엇이 구애가 되겠는가.“ (국사편찬위,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은 이 대목에서 고려를 두 번이나 언급한다. 그는 고려가 했던 것처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광해군은 고려가 금(金)나라를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많이 공부하고, 답습하려 한 사실이 드러난다.

 

⑤ 광해군의 고려사를 제대로 읽었나

 

500년전인 1113년 아구다(阿骨打)가 여진의 추장이 되고, 2년후 거란의 지배에서 벗어나 황제를 칭하며 대금(大金)을 건국했다. 그때 거란족의 요(遼)나라가 고려에 대금(對金) 연합전선을 펴자고 제안했다. 고려는 이 제안을 거절하고 중립을 표방했다. 이번엔 금의 아구다가 고려에 형제의 의를 맺자고 요구해왔다.

고려 조정에선 주전론과 주화론으로 갈렸지만, 이내 주전론이 승리했다. 고려는 천리장성을 쌓고 전쟁에 대비했다.

그러는 사이에 금은 1125년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송나라를 침공했다. 송의 휘종과 흠종이 금에 포로로 잡혔다. 송의 유신들은 양쯔강 남쪽으로 내려가 남송을 세우고 금과 대치했다.

고려 조정에서 다시 주화론과 주전론이 붙었다. 주전론자들은 야만족을 섬길수 없다고 주장한 반면, 주화론자들은 금의 세력이 커졌으니, 사대를 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이땐 주화론이 이겼다. 현실론이 승리한 것이다. 1126년 고려 인종(仁宗)은 금과 군신관계를 맺는다.

고려는 현실적으로 정세를 판단했다. 요와 금이 북방에서 주도권 전쟁을 벌일 때엔 중립을 취했고, 금이 강성해져 요를 멸하고 송을 압박할 땐 사대를 취했다.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힘의 균형관계를 적절히 파악해 대처했다. 그러면서도 문화국가인 송(또는 남송)과의 교류는 유지했다. 고려는 몽골이 일어날 때까지 100년간 평화를 유지했다.

 

500년후에 북방에 대금(사가들은 이를 후금이라고 했다)이 다시 일어나자, 광해군은 역사책을 꺼내 고려의 방법을 답습하려 했다. 고려가 요와 금 사이에 취한 중립외교를 모방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고려는 성공하고 조선은 실패했다. 고려는 군사력을 온전히 보존한 상태에서 조공과 사대의 대상을 바꾸었지만, 조선은 두차례의 전란(정묘, 병자호란)을 거쳐 사대할 나라를 바꿨다.

그러면 500년 사이를 두고 고려와 조선은 어떻게 달랐나.

첫째, 군사적 대처의 방식이 달랐다.

고려는 금이 아직 만주에 머물러 국력이 상대적으로 약할 때, 전쟁 준비에 돌입했고 무장한 상태에서 중립을 지켰다. 금의 세력이 강해지고 우리 군사력을 대응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을 때, 고려는 사대로 전환했다.

이에 비해 조선의 광해군은 후금이 만주에서 흥기할 때 전쟁 준비를 하지 않았다. 그는 고려를 본따 외교로 해결하려 했다. 광해군을 쫓아내고 등극한 인조는 후금이 황제를 칭하고 중원을 공격할 때 대결구도로 전환했다. 적이 약할 때 강하게 대처하고, 강할 땐 물러나는 고려의 방식을 조선은 거꾸로 간 것이다.

둘째, 중국과의 관계가 달랐다.

고려와 송나라는 군사적 관계가 없었다. 하지만 조선은 임진왜란때 명나라 14만 대군의 지원을 받았다. 망할 왕조를 다시 살려준, 이른바 재조지은(再造之恩)의 관계에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혈맹관계다. 고려는 송나라가 어떻게 되든 북방의 힘의 변화를 주시하며 대처하면 되었지만, 조선은 명나라와 함께 북방 여진족에 공동대응해야 할 군사적 책임이 있었다.

광해군은 상황판단을 잘못한 것이다. 그는 고려사를 열심히 읽었지만, 잘못 이해했다.

 

▲ 심양을 점령한 후 1621년 건립한 후금의 궁궐 /위키피디아

 

⑥ 투항지시를 미화할수 있나.

 

광해군 중립외교론은 1619년 심하(深河) 전투를 앞두고 광해군이 파병대장인 강홍립(姜弘立)에게 밀지를 내려 후금군에게 투항하라고 지시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국내 역사학자 이병도와 일본인 학자 다카와 고조(田川孝三)는 광해군이 주화론자인 강홍립을 도원수로 임명한 사실을 근거로 출전에 앞서 밀지를 내려 투항할 것을 지시했다고 보았다. 이 견해에 동조하지 않는 학자들은 강홍립의 독자적 판단에 따라 투항했다고 주장한다.

여하튼 역사실 여부는 사학자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여기선 중립외교론자들의 골자인 광해군의 사전 투항지시를 사실로 보고 주제를 짚어보자.

광해군이 1만여명의 파병군을 보내면서 강홍립에게 사전에 투항하라고 지시했다면 너무나 잘못한 일이다. 이 전쟁이 명나라와 후금 사이의 전쟁만은 아니었다. 나중에 후금은 조선을 두차례 침공하고 후임 국왕과 백성들에게 굴욕을 주었다. 어찌 임금이 전장에 군사를 보내면서 투항하라고 지시할수 있다는 말인가. 인류역사책을 다 뒤집어보아도 그런 지시를 내린 군주는 없다.

투항 지시를 중립외교론의 근거로 대는 것은 일본 학자에겐 가능하겠지만, 적어도 우리 역사학자나 정치인, 언론인들이 그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 전쟁을 피하자고 1만여명의 군사에게 죽거나 포로로 잡히라고 한 지시를 어찌 미화할 수 있는가. 2차 대전때 프랑스 북부 덩케르크에서 포위된 영국군 30만명을 살리기 위해 윈스턴 처칠 총리와 영국민이 일치단결해서 노력한 장면을 생각해보라. 아무리 임금 자리에 있다고 해도, 그런 지시는 역사에 대한 배신이요, 백성에 대한 역적 행위다.

 

▲ 누르하치의 사르후 전투(1619년)를 그린 삽화 /위키피디아

 

우리 역사에서 심하전투, 중국사에선 사르후(薩爾滸) 전투라 부르는 이 전투는 예방전쟁의 성격을 띠었다. 후금이 만주 변방에서 커지기 전에 싹을 자르자는 작전이었다.

사르후 전투는 명나라가 먼저 걸었다. 명은 우방인 조선과 여진의 예허(葉赫) 부족의 지원을 받았다. 명군 8만8,000명, 조선군 1만3,000명, 예허군 2,000명이 각각 참여, 10만 대군을 일으켰다. 후금군은 6만명.

조명 연합군은 이 전투에서 대패했다. 명나라의 작전이 서툴렀다. 후금군은 조명 연합군의 침입 정보를 미리 알고 매복작전을 폈고, 명군이 패하고 조선의 강홍립 장군은 투항했다. 차라리 연합군이 공격을 하지 않고 방어전을 폈더라면, 옳았지 않았을까.

역사를 뒤집을 수는 없다. 이 전투는 명나라에 치명타를 입혔고, 후금에겐 기회를 제공했다. 후금은 곧이어 1619년 예허 부족을 멸망시키고 1620년 요양(遼陽)과 심양(瀋陽) 등 요동의 중심부를 차지하게 된다.

만약 중립외교론자들의 주장대로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투항을 지시했다면 큰 오류를 범한 것이다. 조선군 1만여명을 후금에 보태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회는 있었다.

후금이 만주를 장악했지만 아직은 명나라를 넘볼만한 국력이 되지 못했다. 사르후 전투 이후 명나라의 경제봉쇄 정책으로 후금의 경제는 기진맥진했다. 목축국가는 농업국가와 교역을 통해 물자를 공급받았는데, 여진은 극심한 물자부족에 시달렸다. 요동의 한족 농민들이 후금의 강압에 반발해 농사를 포기하고 봉기하는 사태가 빈발했다.

누르하치는 수차례 만리장성을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광해군이 쫓겨난지 3년째 되는 1626년 누르하치는 만리장성의 영원성(寧遠城) 전투에서 대패했다. 명나라엔 원승환(袁崇煥)이란 맹장이 버티고 있었고, 당대 최신 무기인 홍이포(紅夷砲)를 대량 보유하고 있었다. 후금군은 병력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홍이포 11문의 대폿밥이 되었다. 누르하치도 홍이포 유탄을 맞아 퇴각한후 곧바로 사망했다.

적어도 광해군 시기에 후금은 명과는 적수가 아니었다. 조선은 군사력을 키워 후금에 강하게 밀어붙였어야 했다. 조선이 후금의 배후에 강하게 버텼다면 전세가 달라졌을수도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2006년에 “이 책 한번 읽어 보세요”라며 권한 책이 배기찬씨의 「코리아-다시 생존의 기로에 서다」라는 책이다. 저자는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청와대 행정관으로 근무했고, 지금은 더불어민주당에서 직책을 맡고 있다.

배기찬씨는 그 책에서 광해군을 이렇게 평가했다.

 

“1608년 광해군이 집권했을 때 결사항전의 자세로 전쟁에 대비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7년전쟁(임진왜란)에서 상대적으로 타격을 덜 입은 함경·평안·황해도에 전력을 다해 성을 쌓고, 군대를 기르고, 무기를 제조하고 군량미를 확보했다면, 그리고 역사를 읽으며 전략전술을 세워 두었다면 전국민을 하나로 결집할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7년전쟁을 치른 경험이 있었고, 문명을 공유하고 대일전에 참전한 명과 대후금 공조를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나라의 지도층들은 조선의 아래에 있었던 ‘야만적’인 여진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광해군이 이런 노선을 견지했다면 후금에 승리하지는 못했다 해도, 참패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거란의 침략을 격퇴한 고려처럼 후금의 공격을 막아 낼수 있었을 것이고, 후금이 산하이관(山海關)을 지나 명을 공격하는데 조선이 큰 장애가 되었을 것이다.“

 

역사에도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다음 단추도 어긋난다. 광해군을 쫓아내고 임금에 오른 인조와 서인은 광해군의 반대방향으로 갔다. 쿠데타로 집권한 서인들의 모험주의는 광해군의 투항주의보다 더 나쁜 결과를 낳았다. 인조가 쿠데타를 일으킬 무렵에는 명이 기울고 후금은 부상하고 있었다. 오히려 인조와 서인 정권이 광해군의 노선을 따라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줄타기 외교를 벌이는 것이 옳지 않았을까. 고려처럼….

광해군은 1623년 반정으로 쫓겨난 후에도 19년을 더 살았다. 그는 정묘, 병자호란도 멀리서 지켜 보았다. 그가 천수를 누리는 동안 조선은 수십만(50만이라는 주장도 있다)의 백성이 끌려가고 수많은 여인들이 능욕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 영원성 전투(1626년) 지도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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