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험, 서울이야기]⑨ 토성에서 적석총까지...'백제의 흔적' 묻어나는 송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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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탐험, 서울이야기]⑨ 토성에서 적석총까지...'백제의 흔적' 묻어나는 송파
  • 강대호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2.2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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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강대호 칼럼니스트] 서울을 천년 고도라고 부릅니다. 한양도성 일대로 서울의 영역을 국한한다면 그리 볼 수 있겠지요. 그런데 송파 일대로 그 영역을 넓혀본다면 서울은 이천 년 고도라 부를 수도 있습니다. 한강 변 일대에 들어선 한성백제까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면 말이죠. 이번 글에서는 송파구 곳곳에 있는 백제 시절의 흔적들을 찾아가 볼까 합니다.

주거 공간이 들어선 풍납토성

잠실을 다룬 지난 두 번의 글에서 저는 을축년대홍수를 언급했습니다. 1925년 7월에서 9월 사이 네 차례에 걸쳐 한반도에 닥친 을축년대홍수는 금강과 낙동강 유역은 물론 북한강과 남한강 일대에 큰 피해를 줬습니다. 한강에서 불어난 물이 남대문 일대까지 밀려든 것에서 보듯 서울보다 한강 상류에 있던 송파, 당시 광주군 일대는 큰 물난리를 겪었습니다.

이때 풍납동의 한강 변 토성이 무너지면서 백제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학자들은 풍납토성을 ‘한성백제’의 중심지로 여기지요. 1997년에는 풍납토성 인근에서 아파트 건설이 추진되었는데 기초 공사를 하려고 땅을 파니 백제 유물과 유구(遺構)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마침 현장을 지켜보던 어느 학자가 문화재청에 이 소식을 알렸고, 그래서 본격적인 발굴과 조사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천호대로 쪽 풍납토성. 토성 주변에 들어선 아파트와 주택가. 토성이 잘린 부분은 인근 도로와 주택가를 연결하는 출입로로 쓰인다. 사진=강대호

풍납토성은 송파구와 강동구를 가르는 경계이기도 합니다. 풍납토성의 북쪽 성곽과 맞닿은 천호대로는 송파구 풍납동과 강동구 천호동 경계에 있지요. 도로를 사이에 둔 두 동(洞)은 과거에는 광주군 구천면에 속했던 이웃 동네였습니다. 그러다 다른 구에 속하게 된 풍납동과 천호동은 차츰 생활권도 달라졌다고 하네요.

풍납토성은 홍수로 무너진 한강 변의 서쪽 성벽을 제외한 북쪽과 동쪽, 그리고 남쪽 성벽 일부가 남아있습니다. 천호대로를 지나다 보면 제방처럼 솟은 북쪽 성벽을 볼 수 있지요. 무너진 성벽 주변으로는 주거 공간이 들어섰습니다. 하지만 주거지가 들어선 땅바닥 깊은 곳에는 백제시대의 유구가 묻혀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측합니다. 

그래서 풍납동 일대에서 토지 수용과 함께 발굴 작업이 이뤄지고 있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 풍납동의 옛 삼표레미콘 공장 터에서 문화재 발굴과 토성 복원작업이 진행되고 있지요.

풍납토성에는 산책로와 공원이 조성되었습니다. 토성 옆으로 길을 내고 성곽 위로는 올라갈 수 없도록 차단했지요. 그 주위로는 주택과 아파트가 들어섰는데 위에서 보면 토성이 주거 공간을 감싸고 있는 모양입니다. 마치 성곽이 마을을 보호하듯이요. 어떻게 보면 자연 제방처럼 보이기도 하네요. 그래서인지 조선시대에도 토성 안에 마을이 있었다고 합니다. 

도시문헌학자 김시덕은 “백제시대의 왕성, 조선시대에서 근대에 이르는 서민 동네, 현대의 고층아파트”의 세 시대가 공존하는 풍납토성 일대를 '삼문화 광장'으로 칭합니다. 세 개의 다른 시대 문화를 한 곳에서 볼 수 있다는 의미이지요.

몽촌토성에 재현된 목책. 발굴 시 나온 백제시대의 목책 흔적을 토대로 재현했다. 사진=강대호

뒷산 산책로 같은 몽촌토성

한강의 섬이었던 잠실을 육지로 만들 때 많은 흙이 필요했을 겁니다. 하지만 턱없이 부족해서 관계자들은 공사장 인근 동산의 흙을 퍼서 쓰자는 의견을 냅니다. 그곳이 올림픽공원에 있는 몽촌토성이었지요. 

당시에는 아직 발굴 전이었지만 그 동산이 백제의 토성이고, 그 바닥에는 백제의 흔적이 많이 묻혀있을 것으로 확신한 학계에서 강력히 반대해 몽촌토성이 무사했다고 합니다. 이후 발굴과정에서 초기 백제의 유물과 유구는 물론 고구려의 흔적까지 출토되었습니다. 과거 이 지역을 두고 치열하게 싸운 흔적이 발굴된 거죠. 

몽촌토성은 남한산에서 뻗어 내린 구릉을 이용해 만든 토성입니다. 토성 외부에 급경사를 만들고 목책을 설치했지요. 토성 주변 산책로를 걷다 보면 출토된 목책으로 옛 모습을 재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몽촌토성 바깥으로는 성내천이 흐릅니다. 학자들은 한강으로 연결되는 성내천이 천연의 해자(垓字)였을 것으로 예상하지요. 

몽촌토성에 발굴된 유구들을 연구한 학자들은 몽촌토성을 초기 백제의 성곽이라고 조심스럽게 예측합니다. 삼국사기에 위례성이 남성(南城)과 북성(北城)이 있다고 언급되는데 인근의 풍납토성이 북성, 몽촌토성이 남성이라는 거죠. 일각에서는 풍납토성을 평시의 왕성, 몽촌토성을 유사시 대피하는 성이었다고도 봅니다. 발굴과 연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현재 몽촌토성은 올림픽공원 곳곳을 이어주는 산책로가 되었습니다. 성곽 위를 차단한 풍납토성과 달리 토성의 상단 부분에 걷기 좋게 길을 내고 계단도 만들었지요. 토성 안쪽은 경사가 낮고 잔디밭이라 온화한 계절에는 돗자리를 깔고 머물다 가는 이들을 볼 수 있습니다. 

석촌동 고분군 입구의 ‘돌마리’ 표석. 석촌동의 옛 이름으로 돌마을, 즉 돌이 많은 동네를 뜻한다. 석촌동 고분군을 지나는 백제고분로가 이 앞에서 지하도로 연결된다. 사진=강대호

이름부터 돌마을, 석촌동의 고분군

석촌호수가 이름을 딴 석촌동(石村洞)은 예전에 ‘돌마리’로 불렸습니다. 돌마리 즉 돌마을을 한문으로 옮긴 게 석촌이지요. 석촌역에서 백제고분로를 가다 보면 돌마리 표지석을 볼 수 있습니다.

석촌동에는 예로부터 돌이 많았다고 합니다. 백제 초기의 적석총이 근처에 많이 있었는데 돌마리라는 마을 이름도 적석총에서 무너져내린 돌이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요. 석촌동의 고분군이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기 전에는 이 돌들로 담을 쌓거나 아예 무너진 무덤 위에 집을 지은 주민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적석총(赤石冢)은 돌과 흙을 쌓아 만든 ‘돌무지무덤’을 말합니다. 돌을 쌓아 네모난 형태를 만들고 중심에는 동그랗게 흙을 쌓았지요. 특히, 석촌동 고분군은 돌무지무덤들이 서로 연결된 연접적석총이라고 합니다. 

석촌동 고분군. 앞에 있는 적석총이 4호분, 뒤에 보이는 게 3호분이다. 3호분이 백제 근초고왕의 묘라는 학설이 있다. 사진=강대호

석촌동 고분군에는 발굴이 끝난 돌무지무덤과 옴무덤을 복원해 놓았습니다. 고분군 공원 안에는 아직 발굴이 진행되는 곳도 있는데 생각보다 규모가 큰 돌무지무덤들이 눈을 사로잡습니다. 

특히 ‘3호분’은 한 변의 길이가 약 50미터로 고분군에서 가장 큰 돌무지무덤입니다. 그 크기가 다른 돌무지무덤들을 압도하지요. 이 무덤의 주인은 백제의 정복왕으로 알려진 ‘근초고왕’이라는 학설이 있기도 합니다.

저는 예전에 백제고분로를 차로 지나는데 도로가 갑자기 지하도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 위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석촌동 고분군이었지요. 처음에 저는 주택가 한가운데에 자리한 백제 유적이 이채롭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백제 적석총 한가운데에 주택가가 들어선 거였지요. 

큰 도로변에 있는 풍납토성이나 공원 안에 있는 몽촌토성이 백제의 유적인 걸 아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송파 지역에 석촌동 고분군과 같은 백제시대의 적석총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석촌동뿐 아니라 인근 방이동과 가락동에도 백제시대의 고분군이 있습니다. 

이번 주말 만약 날씨가 온화하다면, 그리고 잠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면 백제 유적을 한 번 둘러보면 어떨까요.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 그리고 백제 고분군 모두 걷기 좋은 길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매주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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