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산성, 서울 수복의 거점
상태바
행주산성, 서울 수복의 거점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2.01 12: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배수진 전략, 군민 합심으로 왜군 물리쳐…해병대 한강 도강지

 

자유로를 따라 고양시로 가다보면 행주산성(幸州山城)을 만나게 된다. 야트마한 산이다. 산의 이름은 덕양산, 해발 124.6m다.

이 곳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것은 적에게 수도 서울(조선시대엔 한양)을 빼앗겼을 때 탈환하는 거점이라는 점이다.

행주산성 남쪽은 절벽으로 한강과 맞닿아 있고, 서쪽은 창릉천이라는 작은 내가 흐른다. 농성전을 벌일 경우 배수진 전략을 쳐야 하는 곳이다. 패하면 한강물에 빠져 죽는다는 각오를 싸워야 한다.

 

▲ 행주산성 위치도 /네이버 지도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 2월, 광주목사 권율(權慄)은 한양을 되찾기 위해 왜군 주력부대와 일전을 결심하게 된다. 당시 왜군은 평양성 전투에서 명나라 군대에 패해 퇴각하고 있었다. 권율은 왜군의 퇴로에 진을 쳐서 일격을 가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권율은 부하 장수 조경을 시켜 지형을 물색한 결과 행주산성이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자유로를 타고 가다보면 행주산성의 전략적 위치를 알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행주산성은 파주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에서 전략적 중요성을 갖고 있다.

병력의 수는 왜군이 압도적이었다. 권율이 경기도 각지에서 긁어모은 병력은 1만명이 모자랐고, 왜병은 3만명 정도. 1대3의 열세를 극복하는 방법은 죽음을 각오하는 배수진과 군민합동 전략이었다.

수성전에서 방비 전략은 성채와 화력, 그리고 결사항전의 의지였다. 권율은 전 인력을 동원해 성책을 이중으로 만들고, 화차, 수차석포 등의 무기를 총동원했다.

적이 몰려왔다. 왜군의 수는 압도적이었지만, 악착같이 싸우는 조선군을 이겨내지 못했다. 왜군은 9차례나 공격했지만, 조선군은 화포와 강궁을 쏘아대며 적을 밀어냈다.

죽음과 죽음의 맞대결은 조선군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 이 전투에서 부녀자들이 긴 치마를 잘라 돌을 나르고, 왜군에게 던졌다는 스토리는 군과 민이 합심단결해 적을 물리친 유명한 사례로 꼽힌다.

이때 적장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로, 왜군 주력부대는 이 전투에서 패하면서 한양을 포기하고 남쪽 지방으로 후퇴하게 된다.

사적 5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주변에서 삼국시대 토기조각이 출토되고 있어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군사기지였음을 알수 있다.

행주대첩은 한산도대첩, 진주성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꼽힌다. 선조 36년(1603년)에 이 곳에 행주대첩비를 세웠고, 1963년에 다시 대첩비를 세웠다. 권율 장군은 이곳 충장사(忠莊祠)에 배향되었다.

▲ 현대의 행주대첩비 /사진=김인영
▲ 조선시대 행주대첩비 /사진=김인영

 

행주산성 입구 좌측 언덕에 하얀 탑이 서 있다. 해병대 행주도강전첩비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한미 연합 해병은 경인가도를 따라 서울 탈환작전을 벌인다. 9월 19일 해병대는 행주산성 건너편 한강 남단에 도착해 도강작전을 벌였다.

 

 

▲ 해병대 행주도강전첩비 /사진=김인영

 

한강 북쪽에는 북한군의 격렬하게 저항했다. 칠흑같은 어둠을 뚫고 수륙양용 장갑차(LVT)를 탄 한미 해병대는 9월 20일 새벽에 도강에 성공했다. (한미 연합 해병대는 작전 당시 수륙양용장갑차를 활용했는데, 현재 전시된 장갑차는 그때 작전에 사용된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125m 고지인 행주산성을 탈취한다. 물론 희생자도 있었다. 그때 산화한 해병 영령을 모신 탑이다. 그들의 희생에 힘입어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게 된다.

 

▲ 권율 장군을 모신 충장사 /사진=김인영
▲ 행주산성 성벽 /사진=김인영
▲ 행주치마 /사진=김인영
▲ 권율 장군 상 /사진=김인영
▲ 행주산성에서 본 한강 /사진=김인영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