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정취 물씬 풍기는 순천 낙안읍성
상태바
옛 정취 물씬 풍기는 순천 낙안읍성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1.21 12: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시대 읍성 완벽히 재현…수호신처럼 서 있는 임경업 장군 비

 

옛 생각이 물씬 나는 곳이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새마을 운동을 하면서 다 뜯어낸 초가집이 이 곳엔 그대로 살아 있다. 빨래터도 그대로 재현돼 있다. 아낙네들이 흰 빨래를 방망이로 두드린다. 빤 옷가지를 빨래줄에 그대로 걸어 놓는다. 1970~80년대 시골에서 살아본 사람들은 고향의 정취에 흠뻑 젖게 된다.

전라남도 순천 낙안읍성(樂安邑城)은 그런 곳이다. 낙안읍성은 안동 하회마을, 경주시 양동마을 등과 함께 대한민국에서 전통적인 촌락 형태가 온전하게 남아있는 몇 안 되는 마을로 자부한다.

 

▲ 낙안읍성의 겨울 /낙안읍성 사이트

 

고려말 왜구가 자주 침입하자 1397년(태조 6)에 낙안 출신의 절제사 김빈길(金贇吉)이 흙으로 성곽을 쌓았다고 한다. 『세종실록』에는 1424년(세종 6) 9월부터 성벽을 돌로 고쳐 쌓으면서 원래의 규모보다 넓혔다는 기록이 있다.

석축으로 고쳐 쌓는 작업은 1450년 경에 거의 마무리되었는데, 당시 성벽의 둘레는 2,865척이고, 높이는 평지에서 9.5척이지만, 높은 곳은 8.5척이었으며, 성벽 위에 낮게 쌓은 여장(女墻)이 420개로 높이가 2.5척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읍성으로는 계획적으로 설계되어 있다. 면적은 22만3,108㎡로, 성내 13만5,597 ㎡, 성외 8만7,511㎡이다. 이 곳에 거주하는 인구는 98세대 228명. (낙안읍성 소개자료). 건물은 300동이며 이중 본채 147동, 부속채 161동이다.

 

▲ 낙안읍성 안내도 /낙안읍성 사이트

 

조선 중기 임경업(林慶業) 장군이 젊은 시절에 낙안군수를 지내기도 했다. 낙안군수 시절에 그는 1627년 정묘호란때 후금이 쳐들어오자 군대를 이끌고 서울에 진군해 강화도까지 갔지만 이미 화의가 성립되었기에 싸우지도 못하고 낙안으로 되돌아왔다고 한다.

마을에는 임경업 장군을 추모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그 비는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자리집고 있다.

석성(石城)으로 성의 길이는 1.4km. 평지에 쌓은 성으로 일부 고갯길에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 곳도 있다. 관청과 일부 양반가는 기와집이지만, 대부분 초가집 노란 지붕을 유지하고 있다.

문은 동, 서, 남 세곳으로 열려 있다. 돌담으로 가옥 사이에 경계를 짓고, 물레방아와 민속장터, 기념품, 각종 체험코스를 만들어 놓았다. 관광지로 조성돼 인위적 냄새가 나는 게 흠이지만, 그런대로 현대화한 도시민으로선 옛 향취와 시골풍경을 느끼기에는 만족할만하다.

 

▲ 낙안읍성 이모저모 /사진=김인영
▲ 낙안읍성 이모저모 /사진=김인영
▲ 낙안읍성 이모저모 /사진=김인영
▲ 낙안읍성 이모저모 /사진=김인영
▲ 낙안읍성 이모저모 /사진=김인영
▲ 낙안읍성 이모저모 /사진=김인영
▲ 낙안읍성 이모저모 /사진=김인영
▲ 낙안읍성 이모저모 /사진=김인영
▲ 낙안읍성 이모저모 /사진=김인영
▲ 낙안읍성 이모저모 /사진=김인영
▲ 낙안읍성 이모저모 /사진=김인영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