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멜 이야기②…네덜란드, 조선 원정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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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 이야기②…네덜란드, 조선 원정 시도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1.19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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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레아호 건조…조선과 교역 위해 원정대 파견했지만, 일본 반대로 좌절

 

헨드릭 하멜(Hendrik Hamel) 일행이 조선에서 13년간 억류돼 있다가 탈출해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한 것은 1666년 9월 14일이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1년 이상 체류했고, 하멜은 이 기간에 조선억류 일지를 정리했다. 이들은 1667년 11월 28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본부가 있는 바타비아(자카르타)에 도착했다. 하멜은 밀린 임금을 받기 위해 남고 나머지 7명은 그해 12월 23일 고국으로 떠났는데, 그 일행에게 자신이 정리한 일지 복사본을 보냈다.

그 복사본이 네덜란드에서 출간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미지의 나라 조선에 관한 상세한 내용이 유럽인들에게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하멜의 조선체류 일지는 그후 50년 이상 신판을 거듭해 출판되었다. 막연했던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한 유럽인들의 관심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 하멜의 표류 및 귀국 경로 /그래픽=김인영

 

① 하멜 이전의 서양인

 

하멜이 태풍을 만나 제주도에 표착하기(1653년) 이전에도 조선은 유럽인들에게 희미하게나마 인식되고 있었다.

16세기 중엽부터 포르투갈인들이 만든 지도에 코레섬, 코레 제도, 코레이 해안등의 지명이 등장했다. 하지만 그 땅이 섬인지, 반도인지, 해안선인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들이 조선 땅을 직접 와서 경험하지 못하고 중국인 또는 일본인을 통해 간접적으로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정도의 정보를 전해들은 것이다.

하멜 이전에도 서양인들이 조선 땅에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다.

첫 기록은 1582년 (선조 15년) 3월 빙리이(憑里伊)라는 서양인이 제주도에 표착했는데, 곧바로 중국으로 압송되었다. 그의 국적이나 인적사항 등에 관해 일체 알려진 것이 없다.

그로부터 12년후인 1594년 포르투갈인 신부 그레고리오 데 서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가 왜병을 따라 들어왔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공한 왜병들 가운데 크리스챤이 1만8,000명이나 되었는데, 그는 종군신부로 조선에 들어와 전쟁 고아들을 돌보다가 1년후 돌아갔다.

그 다음으로 1604년(선조 37년) 포르투갈 상인 주앙 멘데스가 경남 통영 산양읍 삼덕항에 표착했다는 사실이 조선시대 국경수비일지인 등록유초(謄錄類抄)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34세로 무역상이었던 멘데스는 중국 복건성 사람 16명, 일본인 남녀 32명, 흑인 1명(노예인 듯) 등과 함께 조선 수군에 생포돼 조사를 받고 중국으로 송환되었다.

그 다음이 국내에서 박연으로 알려진 네덜란드인 얀스 벨테프레가 1627년(인조 5년)에 표착해 귀화했고, 하멜은 그후 1653년(효종 4년)에 조선 땅을 밟게 된다.

하멜 이전에 표착한 서양인들은 조선을 서양에 알리는데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 박연의 경우 죽을 때까지 조선에 살았지만 그는 하멜을 만나기 이전까지 서양인들과의 접촉도 없었다.

 

② 미지의 나라 조선

 

중국에 들어온 서양선교사들은 중국에 관한 기록을 남겼지만 조선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이 없었다. 약간 스치고 지나간 것들은 있다. 선교사 마테오리치, 마르틴 데 라디도 자신의 기록에 조선에 대해 언급했지만, 대단한 내용은 없다. 예수회 선교사 마르틴 마르티나가 1655년 ‘조선신도’(朝鮮新圖)라는 책을 유럽에서 출간했는데, 그 안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사실만 언급했을 뿐이다.

하멜의 표류 일지가 출간되기 이전에 유럽인들에겐 조선이라는 나라가 무척 궁금했다. 유럽에서는 탐험가와 무역상들 사이에 크리스토퍼 컬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새로운 나라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새로운 나라와 교역을 해서 막대한 이익을 올릴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에선 코레아라는 나라에 금, 은, 동이 풍부해서 짐승까지도 금 목걸이를 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았다. 당시 선도적으로 해양진출에 나섰던 네덜란드와 영국에서는 조선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지만, 정확한 정보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③ 조선 원정대 파견

 

17세기 초입부인 1609년 바타비아에 주재하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총독 자크 스펙스는 본국에 보낸 서한에서 “주석이 일본에서 많이 팔리는 것으로 보아 코레아에서 인기품목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보고한데 이어 “조선과 1년에 서너 차례 무역을 하자고 대마도(쓰시마)에 요구했다”고도 했다.

이런 보고에 자극을 받아 네덜란드 정부는 1610년 코레아와의 교역을 위해 일본과 교섭을 벌였지만, 일본의 반대로 실패했다. 일본은 네덜란드로부터 서양물건을 수입해 대마도를 통해 조선과 수출하면서 막대한 이득을 챙겼는데, 그 이익을 네덜란드에 넘겨주기 싫었던 것이다.

대마도 영주가 조선과의 무역을 독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네덜란드는 조선과의 직교역을 위해 1622년 조선 정복을 위한 원정대를 편성해 파견했다. 하지만 스펙스 총독의 지시를 받은 원정대는 계절풍의 시기와 방향을 놓쳐 조선 발견에 실패했다.

네덜란드의 라이벌인 영국도 조선에 관심을 가졌다. 존 세리스, 리처드 칵스등 영국 상선대 선장들은 1614년에 조선과의 교역에 관심을 내용의 일지를 기록했다. 영국도 대마도가 조선과의 교역을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얼마후 네덜란드 상선 드 혼드호가 방향을 잃고 조선땅에 표착한 일이 있는데, 그때 해안선을 방위하던 조선 수군들이 급습해 교전한 사실를 보고했다. 조선의 해안선 경비가 삼엄하다는 사실을 서양인들이 알게 된 것이다.

1639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또다시 코레아 원정대를 편성해 파견했다. 이름 하여 ‘보물섬 원정대’였다. 조선을 보물이 가득한 곳으로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 원정함대 2척은 항해 도중에 파손돼 조선 원정을 포기하고 대만으로 되돌아갔다. 네덜란드는 그후 두어차례 원정대를 파견했지만, 조선을 찾지 못하고 쿠릴열도를 발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의 정확한 좌표를 갖지 못했기도 하거니와 쿠로시오 해류의 방향을 잘못 잡기도 했을 것이다.

 

▲ 헨드릭 하멜이 표착한 제주 서귀포시에 설치된 하멜상선전시관 /서귀포시 홈페이지

 

④ 하멜 표류기로 조선에 눈뜬 유럽

 

이렇게 유럽인들이 조선을 궁금해 하고 조선을 찾기에 혈안이던 때에 하멜 표류기가 출간되었다. 동아시아에 탐험욕구가 있던 항해사와 무역상, 군인들이 하멜의 기록을 읽었고, 그의 책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하멜 표류기를 보면 지금의 한국인들이 읽어도 놀라울 정도로 당시 조선의 상황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조선의 국왕 이야기에서 청나라와의 관계, 백성들의 삶, 군사 체계, 종교적 관념 등이 실려 있다. 몽골(元)의 사신 주달관(周達觀)이 1296년 캄보디아의 앙코르 제국을 다녀와 지은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처럼 조선이란 나라가 신기하다.

하멜에 앞서 네덜란드에 도착한 7명의 선원들은 동인도회사 관리들에게 불려가 조선의 현황, 무역할 품목 등에 관해 설명했다. 일행은 조선에 잘 팔릴 상품으로 후추, 녹비(鹿皮, 사슴가죽), 백단향, 유럽산 직물류 등을 적시했다. 이들은 조선에 무역관(商館)을 설치해 교역을 하면 큰 이득을 볼 것이라고 조언하고, 직교역을 위해 함대를 파견하면 자신들도 자원하겠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⑤코레아호 출항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즉시 조선과의 교역을 추진했다. 하멜이 조선 땅을 떠난지 2년후가 되는 1668년 네덜란드 정부는 바타비야의 동인도회사와 일본 데지마(出島)에 있는 상관에게 조선과의 직교역을 하는 방안을 마련하라는 내용의 훈령을 내렸다.

이듬해인 1669년, 동인도 회사는 이미 건조된 1,000톤급의 상선에 ‘코레아’(Corea)라는 이름을 명명했다. 이 배는 조선과의 직교역을 트기 위해 1670년 6월 1일 바타비아를 출항했다.

하지만 나가사키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은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내용인즉, 대마도 영주가 조선과의 무역을 독점하고 있는데, 일본은 네덜란드가 개입하는 것을 원치 않으며, 만일 네덜란드가 조선과 직교역을 한다면 데지마 상관을 폐쇄하라는 압력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조선과의 직교역을 중국이 반대할 경우도 고려해야 한다고 데지마 상관장이 주장했다.

데지마 상관장은 조선의 외국인 배척도 문제이며, 적당한 무역항이 없다는 점도 이유를 들었다.

동인도 회사의 입장에서 조선과의 불투명한 무역로를 개척하기보다는 오랫동안 상거래를 유지해온 데지마 상관을 유지하는 것이 이익이었다. 바타비아의 동인도회사 본부도 데지마 상관의 보고를 따기로 했다. 결국, 코레아호는 조선으로 항해를 하지 못하고 돌아 갔다.

이로 인해 조선은 타의에 해해 추진되었던 서양과의 접촉이 차단되었다. 조선은 200년후인 1876년,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 등 서양에 의해 개항한다.

 

▲ 일본 나가사키 만에 설치된 데지마 인공섬 /위키피디아

 

⑥ 그때 조선은…대기근 속에 예송논쟁 휘말려

 

코레아호의 조선 원정 포기가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알길이 없다. 역사는 가정할수도 없고, 되돌릴수도 없다. 만일 이때 동인도회사의 코레이호가 조선의 개항을 요구했다면 조선 조정이 받아들였을까.

당시 조선은 현종(재위 1659∼1674) 때였다.

하멜의 기록에도 기근 얘기가 나오지만, 그후 조선은 더 심한 경신(庚申) 대기근(1670~71)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전대미문의 기아 사태가 발생했다. 왜란과 호란 때 살아남은 노인네들은 “정쟁 때도 이보다 나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피해는 컸다. 1,200~1,400만으로 추정되던 당시 인구에 30만~40만명이 굶어 죽었다.

이런 와중에도 조선 사대부들은 왕실의 상가에 상복을 몇 년 입을 것인지 하는 예송(禮訟)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백성들의 삶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쓸데 없는 일을 벌이고 있는 마당에 네덜란드 상선(말이 상선이지 군함이나 다름없다)이 대포를 앞세우고 교역하자고 했을 때 조정이 어떻게 대응했을지, 상상에 맡기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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