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유신 150년…“서양 문물이 부국강병 초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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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유신 150년…“서양 문물이 부국강병 초석”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1.17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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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부강케 하려면 서양을 배워라”…해외 유학, 외국인 고용에 적극

 

올해로 일본이 메이지(明治) 유신 150주년을 맞는다.

1868년 3월 14일, 막부토벌군 대표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와 막부파 대표 가쓰 가이슈(勝海舟) 사이에 역사적인 담판이 벌어진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두 거물은 타협하고, 그 결과로 천황파 군대가 에도(도쿄)에 무혈입성한다. 이때부터 막부는 해체되고, 천황이 통치하는 통일된 중앙집권적 국가가 만들어 졌다. 일본인들은 이를 메이지유신이라 한다.

메이지유신은 일본의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정치질서에서 대외정책, 사회, 법률, 경제활동, 문화에 이르기까지, 유신 이전과 이후의 일본은 혁명적으로 변화했다. 일본은 이를 기점으로 서구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에 나서 한국과 중국등 이웃나라를 앞질러 간다.

17세기 이후 비유럽인 가운데 유럽에 맞서 독립을 유지한 나라는 일본과 에티오피아밖에 없다. 그중에서도 서구 열강에게서 문물을 배워 제국주의적 팽창을 한 나라는 일본이 유일하다. 그 시발이 메이지유신이었고, 그 지향점은 부국강병(富國强兵)이었다.

 

▲ 1869년 2월 20일 메이지 천황의 에도 행차를 그린 프랑스 르몽드지의 삽화 /위키피디아

 

막부를 지지하든, 천황을 지지하든 19세기 일본 지식인들은 서양문물을 배우기 위해 기를 썼다.

막부파 지도자 가쓰 가이슈(1823~1899)의 젊을 때 일화는 서양 지식에 목마른 일본 식자층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서구문물을 습득하려면 네덜란드어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나가사키엔 네덜란드 상관이 있었고, 일본인들은 네덜란드가 유럽에서 제일의 나라로 알고 있었다. 가쓰는 23세때 네덜란드어 사전을 사려고 했는데 가격이 60냥으로 엄두도 못냈다. 가쓰는 난학(蘭學, 네덜란드 학문) 의사인 아카기(赤城)라는 사람이 이를 가지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갔다. 그 의사는 사전을 1년간 빌려보는 값으로 10냥을 내라고 했다. 가쓰는 1년 동안 58권이나 되는 사전을 두 벌 베껴 한 벌은 10냥에 팔아 빌린 대금으로 지불하고 나머지 한권으로 공부를 했다. 이 필사본 사전이 오늘날에도 전해진다고 한다.

가쓰는 난학 가운데 특히 병학(兵學)에 관심이 많았다. 일본을 강력한 국가로 육성하려면 서양의 전쟁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관련 서적을 알아보았더니 이미 서점에서 팔려 나가고 없었다. 다행히 그 책자를 가진 사람을 알게 되어, 그 책을 빌려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는 밤 10시 이후에 와서 보고 가라고 했다. 가쓰는 매일밤 10시에 그의 집에 가서 반년만에 그 책을 모두 필사했다.

가쓰는 서양책에서 배운 지식으로 소총을 만들고 대포를 제작했다. 그는 막부군대를 총지휘하는 자리로 올라갔으며, 반막부파와의 막후협상에서 유신 세력에 손을 들어주었다.

 

▲ 메이지 유신기의 형세도 /오피니언뉴스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지도자 요시다 쇼인(吉田松陰)도 서양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본을 개항시킨 미국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 제독의 흑선(구로후네)을 보고 경악했다. 그는 저런 군함을 만드는 나라에 직접 가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개인적으로 외국에 나가는 것은 국법으로 금지되었다. 그는 밀항을 해서라도 미국에 가야한다는 일념으로 미군함 당국에 간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는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는 앞서 고향에서 쇼카손주쿠(松下村塾)이라는 학원을 내고 문하생들에게 그의 사상을 전수했다. 그의 문하생은 조슈번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다카스키 신사쿠[高杉晋作),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가쓰라 다로(桂太郎) 등 조슈번에서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중심인물들이다.

 

19세기, 조선과 청나라, 일본의 동양 3국 지식인들 사이에 공히 서양문물을 배우자는 논의가 일어났다. 중국의 중체서용(中體西用), 조선의 동도서기(東道西器), 일본의 화혼양재(和魂洋才)가 그것이다. 모두 자국의 정신문화를 지키면서 서양의 문물을 배우자는 주장으로 일치했다. 중국의 양무운동, 조선의 개화운동, 일본의 유신운동이 다 이 사상을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동양 3국 가운데 가장 앞서서 서양문물을 배운 나라는 일본이다. 1847년 청나라 지식인 위원(魏源)은 아편전쟁에서 중국이 힘없이 무너진 것을 안타까워 하면서 ‘해국도지’(海國圖志)를 저술해 서양을 배우고 문물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했다. 이 책은 조선, 일본에도 보급되었다.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는 1853년 페리 제독의 내항을 계기로 발빠르게 서양문물을 배우자는 움직임이 벌어졌다. 조선에는 김정희, 최한기 등 지식인에게 이 책이 전해졌으나, 당시 실학자들 사이에 서양문물을 받아들이자는 논의는 진척되지 못했다. 위원의 ‘해국도지’는 결국 중국, 조선보다 일본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 이와쿠라 사절단 /위키피디아

 

요시다 쇼인은 서양문물을 배우려다 1859년 사형 당했지만, 일본에선 1862년부터 유학붐이 일어났다.

막부는 유능한 청년들을 네덜란드로 유학보냈다. 이중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라는 인물은 유학 6년만에 네덜란드에서 준공한 최신예 군함을 타고 귀국했다. 그는 막부에 충성했지만, 유신 이후에 문부, 외무, 농상무 대신을 역임하며 일본의 기둥이 되었다. 막부는 법학 전공자도 네덜란드와 영국에 유학을 보냈다.

각 번에서도 별도의 유학생을 보냈다. 반막부파 조슈번에서는 1863년 이노우에 가우루, 이토 히로부미 등 5명을 막부 몰래 영국에 보내 유학시켰다. 이들은 영국에서 철도와 광산등 공학을 배웠다 또다른 반막부파 사쓰마번에서도 막부측 금지령을 어기고 19명을 프랑스로 유학시켰다.

당시 유학비는 엄청 비쌌다. 한 사람의 유학비가 여비까지 포함해 연간 1,000냥이었는데, 이는 저택 2채 가격이었다. 막부와 각 번주들은 서양기술 도입에 거액을 아낌없이 쓴 것이다. 이 유학생들은 막부의 지원을 받았든, 번주의 지원을 받았든 유신 이후에 일본의 인재로서 산업화에 기여하고 고위 관료로 성장했다.

 

▲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 가운데 외국인이 미국인 베르베크. 장소는 확인되지 않지만, 촬영시기는 메이지유신 해인 1968년. /위키피디아

 

유신 지도자들은 서양인들의 지도 없이는 급속한 근대화를 이룰수 없다고 판단했다. 근대화는 곧 서양화였다. 이에 메이지 정부는 젊은이의 유학 지원에 그치지 않고, 외국인 전문가들을 데려와 젊은이들을 가르치게 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미국인 베르베크(Guido Verbeck)였다. 그는 나가사키의 영어연수소에 교수로 있으면서 메이지 정부의 지도적 인물을 배출했다. 1871년엔 이와쿠라(岩倉)사절단을 조직해 세계 일주를 하게 해 서양문물을 직접 배우게 했다. 50명이나 되는 사절단에는 이노우에, 이토등 유신정부의 지도자급 거의가 참여했다.

독일인 로에스레르는 헌법초안을 만들고, 영국 해군중좌 더글러스는 근대 해군을 훈련시켰다. 킨데르는 금본위 화폐제도를 창설하고, 샨드는 중앙은행 설립의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다이에르 공학박사는 200명의 학생을 교육해 기술자로 배출시켰다.

일본 통계에 따르면 1874~1875년에 약 540명의 외국인이 고용되었다. 이중 기술자가 240명으로 절반을 차지했다. 그 이후 1980년엔 그 절반으로 줄었다. 유신 이후 약 10년간 기술교육, 국가제도 수립, 입법 등에 필요한 외국인을 적극 수용해 배웠던 것이다.

월급도 넉넉히 주었다. 1874년 통계를 보면, 당시 총리 월급이 800엔인데, 총리급 급여가 지급된 외국인이 10명이나 되었다. 200~300엔이 18%, 100~200엔이 35%, 100엔 미만이 18%로 되었다. 그해 외국인에게 지급한 봉급이 76만엔으로 공부성의 경상경비 227만엔의 3분의1을 차지했다. 당시 1엔은 쌀 40kg을 살수 있었는데, 메이지 정부가 얼마나 많은 돈을 외국인 고용에 썼는지를 보여준다.

아마도 외국인 고용 비용이 메이지 정부에게 재정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에게서 배운 일본인들이 나라를 부강하게 함으로써 몇배의 이득을 냈다. 일본에 고용된 외국인들은 일본 사회에 서구화를 촉진시키는 역할을 했다. 양복착용, 태양력 채택, 일요일 휴무제, 서양 부기법 채택, 노동 적립금제, 진료소 설치, 전신선 설치, 가스등 사용등도 외국인들의 지도로 이뤄진 것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이들 외국인이 일본인들에게 빨리 나라를 부강하게 해 서양처럼 잘사는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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